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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나 양피지 위에 쓴 글자를 불에 쬐었을 때만 보이게 하는 화학약품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도 아주 먼 옛날부터 사용돼 왔다는 사실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산화코발트를 왕수(王水, aqua regia: 염산과 질산의 혼합액)에 녹여 4배의 물로 희석시킨 것이 주로 사용되는데 이건 초록색을 띠지. 산화코발트 속의 불순물을 초산으로 녹인 것은 붉은 빛을 띠고. 이와 같은 색은 그것을 쓴 원료의 열이 식으면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사라져버리고 거기에 열을 가하면 다시 나타나지.

- 애드가 앨런 포의 ‘황금벌레’ 중에서


미국 남부의 설리반 섬에서 조개나 곤충의 표본을 채집하며 한적하게 살아가던 윌리엄 루그랑은 황금색의 희귀한 곤충을 발견하게 된다. 루그랑은 그 곤충을 잡은 뒤 주변에 떨어져 있던 오래된 양피지 조각으로 감싸는데, 뜨거운 난로불 가까이에 놓아둔 양피지 조각에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암호들이 나타난다. 그 암호는 먼 옛날 숨겨진 보물을 찾는 열쇠가 된다.

양피지에 나타난 수수께끼 암호

양피지는 양이나 새끼염소의 가죽을 다듬어서 만든 종이 대용품이다. 종이보다 무겁고 값이 비싸지만 종이보다 보존 기간이 길다는 장점이 있다. ‘황금벌레’에서 보물을 숨겨둔 장소를 표기한 암호도 종이가 아니라 양피지에 적혀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해변의 모래에 묻혀 있어도 부식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던 양피지 조각이 열을 받자 숨겨져 있던 메시지가 나타난 이유는 스테가노그래피(stegano graphy)가 사용됐기 때문이다. 스테가노그래피는 메시지를 숨기기 위한 기술이다. 고대부터 보이지 않는 잉크로 메시지를 쓴 다음, 열을 가하거나 약품을 발라서 메시지를 다시 나타나게 하는 다양한 은닉 기술이 개발돼 왔다.

스테가노그래피는 본래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의 머리카락을 깎은 다음, 두피에 기밀 문서를 쓰고 노예의 머리카락이 자란 뒤에 보내면, 받는 측에서 노예의 머리카락을 깎고 메시지를 읽도록 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고대에는 군주가 보내는 비밀 문서, 전쟁 중의 작전지시와 보고, 첩자들과의 통신 등에 다양한 스테가노그래피가 사용됐다.

고대 로마인들은 과일주스, 우유, 소변과 같은 자연원료를 투명잉크로 편지를 썼다. 이러한 편지를 불에 쬐면 잉크가 묻은 부분만 거뭇거뭇해져서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단순한 자연 원료를 사용하던 스테가노그래피는 연금술이 발전한 중세에와서 화학 반응을 이용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황금벌레’에 나오는 스테가노그래피는 산화코발트를 이용한 특수 잉크를 썼다. 산화코발트는 코발트가 산화된 흑색 가루인데, 이 가루를 무기산류에 녹이면 적색이 되고 염산에 녹이면 청색이 된다. 이 적색과 청색 잉크는 제조 직후에는 색깔을 유지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마르면 투명한 색깔로 바뀐다. 그리고 열을 가하면 다시 색깔이 나타난다.

해독의 묘미

여기에 또 하나의 트릭이 더해졌는데, 바로 크립토그래피(cryptography)이다. 스테가노그래피가 메시지의 존재 자체를 숨기는 것이라면, 크립토그래피는 메시지의 존재는 노출시키되 은어나 부호, 숫자와 같은 다양한 수단을 이용해 특정 인물 외에는 메시지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황금벌레’에서 루그랑은 양피지에 나타난 양 그림을 보고 카리브해에 출몰했던 전설적인 해적 키드(kid) 선장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해골 그림과 양 그림 사이에 띄어쓰기 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숫자와 각종 부호가 나타나는 빈도를 표로 작성한 뒤 알파벳에서 자주 사용되는 글자의 빈도가 e, a, o, i, d, h, n, r, s, t, u, y, c, f, g, l, m, w, b, k, p, q, x, z 순(j와 v는 소설 속에서 제외됐다)이라는 것에 착안해 양피지에 적힌 숫자와 부호에 알파벳 문자를 대입시켜 본다. 그러한 방식으로 암호를 풀어 영어 문장으로 바꾼 루그랑은 문장 속에 사용된 단어들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가 아닌 특수한 의미를 내포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금 그것을 해독해야 했다. ‘주교 저택의 악마의 의자의 좋은 안경’이라는 알쏭달쏭한 메시지를 해석하기 위해 루그랑이 사람들을 수소문해 의미를 조합해나가는 과정에서 암호 해독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과거의 암호 체계로 트립토그래피와 스테가노그래피가 있었다면, 현대에는 컴퓨터가 등장하며 더 복잡하고 고도로 발전된 암호학이 있다. 특히 최근에는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개인과 사회 전 분야에서 정보 보호가 필요해짐에 따라 더욱 중요한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추리소설의 매력이 이러한 과학의 세계로 연결돼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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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최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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