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음력 9월 16일 오전 6시 30분경 바닷물은 썰물에서 북서 방향으로 흐르는 밀물로 바뀌었다. 이 밀물을 타고 일본 군함은 전남 해남의 어란진을 출발해 울돌목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이때 조선군은 전투 준비를 마치고 우수영 앞바다로 출전했다.
오전 11시경, 드디어 조선군과 일본군이 맞닥뜨렸다. 당시 조류의 흐름은 일본군의 진격 방향과 일치해 조선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을 제외한 나머지 장수들이 이끄는 배는 일본군의 수에 겁을 먹고 500~800m 떨어진 곳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고 이순신 장군이 선봉에 서서 맹활약을 펼치자 조선군의 사기가 급속도로 올랐고, 전투 시작 1시간 30분 만에 뒤에 있던 군함들도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물의 흐름도 남동 방향의 썰물로 바뀌어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반면 일본 군함은 역류에 갇혀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 군함은 배의 방향을 바꾸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울돌목은 수심이 얕고 실제 배가 움직일 수 있는 폭도 좁아, 균형을 잡기 쉽지 않았다. 또 크고 작은 암초가 거센 물살에 부딪히면서 생긴 소용돌이에 휘말려 애를 먹었다.
이에 유리한 해류를 탄 조선군은 오후 1시경 화포를 쏘고 배를 몰고 가 적군의 배와 충돌하는 당파 전술을 쓰는 등 총공세를 퍼부었다. 그러자 일본 진영은 군선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자기편 군선끼리 서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전투의 총사령관인 도도 다카토라가 상처를 입었고,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는 물에 빠졌다가 구조됐다. 선봉장이던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죽고, 군함 30여 척이 물속에 가라앉아 최소 1,800여 명의 전사자가 생기자 일본군은 오후 2시경 항복했다.
조선군과 약 4시간 가량 대치하던 일본군은 오후 6시 56분이 되어 썰물에서 밀물로 물의 흐름이 바뀌자 밀물을 타고 퇴각했다.
임진왜란 6년, 누명을 쓰고 파면됐던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에 의해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전의를 잃은 병사와 두려움에 가득 찬 백성, 그리고 12척의 배뿐이었다. 이때 일본군은 해적 가문 출신인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앞세워 330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명량에 집결한다.
이순신 장군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명량’은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명량에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일본군을 무찌른 명량해전을 그린 영화다. 만약 명량해전에서 조선군이 패배했다면 일제강점기가 300여 년은 앞당겨졌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이는 조선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으로 손꼽힌다.
명량해전 당시 울돌목 조류의 비밀
불리한 상황에서도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의 거센 조류를 잘 활용했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당시 울돌목의 조류는 어땠을까?
2010년 국립해양연구소는 명량해전 당시 울돌목의 조류를 재현해냈다. 연구팀은 진도 울돌목에서 2009년 11월부터 6개월간 수평 초음파 유속계를 사용해 바닷물의 속도를 관측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조화분해법’을 이용해 400여 년 전 조류를 예측했다.
여기서 조화분해법이란 관측한 밀물과 썰물로부터 진폭과 지각을 구해 특정 시간의 조류를 예측하는 수학적인 방법이다. 이때 진폭은 밀물과 썰물의 수위 차의 2분의 1이며, 지각은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는 천체가 그 지역의 자오선을 통과한 후, 해수면이 가장 높아질 때까지의 시간을 각도로 표시한 것을 말한다.
이순신 장군의 필승 전술, 일자진과 학익진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쓴 첫 번째 전술은 ‘일자진’이었다. 조선군은 *백병전에 서툴렀기 때문에, 배를 일렬로 세우는 일자진 진형을 이룬 뒤 먼 거리에서 일본 군함을 향해 화포를 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일본 군함이 조선 군함의 코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일본군은 어떻게 해서든지 백병전을 벌여야 승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학익진 전술을 구사한다.
영화에서는 일자진 전술만 나오지만 <난중일기>를 보면 ‘학익진’ 전술을 구사한 것을 알 수 있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편 모양과 같은 모습으로 진형을 이루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술을 명량해전보다 앞서 있었던 한산도 전투에서 사용해 승리를 거둔 바 있다. 하지만 명량해전에서는 일본 군함보다 조선 군함의 수가 턱없이 적어 학익진 전술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날개를 접은 학익진’ 전술을 사용하기로 한다. 옹기종기 모여 원형으로 진형을 이룬 조선 군함을 일본 군함이 원 모양으로 에워싸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마치 학이 날개를 접은 모양과 같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 군함의 대형을 원 모양으로 유지한 채 수시로 여러 방향으로 움직여 일본 군함을 혼돈에 빠뜨렸다. 일본 군함은 물살이 거세 균형 잡기도 쉽지 않은 상태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조선 군함을 따라가다가 자기편끼리 부딪치고 말았다. 조선군은 이를 기회로 삼아 일본군을 향해 화포로 무차별 공격을 했고 결국 승리했다.
전격 비교 일자진 VS 날개 접은 학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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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조선 군함의 수가 13척으로 나타나 있다. 사실 이순신 장군 본인도 어떤 기록에서는 조선 군함의 수를 12척이라고 적었고, 다른 기록에서는 13척이라고 적었다. 학자들은 전투 직전 군함 1척을 수리해 전쟁 전에는 12척이라 기록하고, 이후에 13척이라 적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