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을 지지한 평화주의자 ●
1940년 영국.
“러셀 교수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제1차 세계대전 때 평화를 위해 투쟁하자고 함께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아돌프 히틀러를 권좌에 앉힌 독일은 *파시즘과 반유대주의를 전면으로 내세우며 경악스러운 행보를 보였습니다.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은 독일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잇따라 전 세계의 강대국과 식민지가 전쟁에 얽히며 또 한 번의 큰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버트런드 러셀은 평화주의자로 활동하며 반전 운동에 참여했고,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목도한 러셀은 입장을 바꿨습니다. 그는 영국이 독일에 맞서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이것은 많은 평화주의자에게 당혹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러셀을 찾아가 어째서 평화 운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지 따져 물었습니다. 러셀은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일평생 한 가지 다짐을 마음 속에 간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특정 교리나 믿음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나의 믿음을 검토하고, 주어진 상황과 근거에 따라 수정해 나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저는 전쟁이 절대 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작년에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히틀러의 요구 사항을 최대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저는 틀렸습니다. 제가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파시즘 :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상으로,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한다.
● 인류를 위해 히틀러에 맞서자 ●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님. 전쟁은 절대 악이 맞습니다.”
“청년들을 살육의 현장으로 내모는 것은 분명 잘못됐습니다!”
“맞습니다. 전쟁은 참혹하기 그지없으며, 이번 전쟁은 분명 지난번 전쟁보다도 훨씬 더 비참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주장을 하시는 건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가 히틀러와 싸워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차마 히틀러가 유럽을 집어삼키는 광경을 지켜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추악하고 간사하며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인간입니다. 국내에서는 인종차별과 *선민주의로 대중을 선동하고 국외에서는 협잡질과 침략을 일삼습니다.
그런 작자에게 세계를 넘겨준다는 것은 여태껏 인류가 이룩한 모든 문명, 추구한 모든 가치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러셀의 말에 한 평화주의자가 반박했습니다.
“교수님은 히틀러가 전쟁을 감수할 정도로 사악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단호하게 확신합니까?”
“히틀러에 대한 교수님의 반감은 민족주의적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서 히틀러가 유럽을 번영의 길로 이끌지 누가 압니까?”
이 질문을 들은 러셀은 일순 서글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담담히 말을 이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이 저를 괴롭게 합니다. 어쩌면 히틀러에 대한 저의 판단은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영국 언론의 선동에 휘둘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또한 인정합니다. 그 경우 저는 미래의 후손에게 역사의 심판을 받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자신이 걷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알 수 없지만, 바로 그 이유로 우리의 사유가 가치있다고요. 만약 매 순간 답이 주어졌다면 애초에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안개가 자욱한 숲속에서 올바른 길을 걷고자 고군분투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안개가 자욱할수록 노련한 등산가는 언제라도 자신이 길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알기에 자신감을 굽히고 경계심을 높입니다. 무작정 나침반만 보고 북쪽으로 성큼성큼 걷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낭떠러지가 보이는 것 같으면 다른 길을 택하고, 다져진 길이 보이면 그쪽으로 향합니다.
젊었을 적 저는 안개가 자욱한 세계에서 사는 것이 두려워 나를 구해줄 대피소를 찾아다녔습니다. 그 대피소는 처음에는 종교, 그다음에는 수학, 그다음에는 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압니다. 대피소는 그곳에 평생 머무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숲속으로 돌아가기 위한 힘과 용기를 얻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요.
저는 종교와 문학에서 인류애를 배웠고, 수학에서 합리성을 배웠으며, 철학에서 자기성찰의 태도를 배웠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는 대피소를 떠나 안개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겠습니다. 과거의 발언이나 평화주의적 행보에 복종하는 대신 현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과 고민의 결론으로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러분, 정의를 위해 그리고 인류를 위해 싸웁시다!”
*선민주의 : 자신들이 한 사회에서 특별한 혜택을 받는 소수의 집단이라는 생각으로 타인을 이끌어가려는 태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8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유럽의회에 참석한 러셀의 모습이에요. 유럽 전역에서 지식인 750명이 모여 유럽의 발전을 논의했어요.
● 사유의 훈련장으로서 수학의 가치 ●
2023년 한국.
“이것으로 <;발칙한 수학책>; 북토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질의응답 시간인데요. 질문이 있으실까요?”
한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최정담 작가님께서는 책에서 수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의 힘을 키운다고 한들 수학 문제를 푸는 상황 이외에 어떤 도움이 될지 잘 와닿지 않는데요. 이에 대한 작가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문제를 하나 내 보겠습니다. 여러분 확률이 0%인 사건이 있을까요?”
질문을 들은 학생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사건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생각은 틀렸습니다. 직접 보여드릴게요. 여러분 제가 지금 종이에 어떤 자연수를 하나 적었습니다. 혹시 이 수가 어떤 수인지 맞혀보겠어요? 정답을 맞히는 분께는 제 노트북을 드리겠습니다.”
가벼운 탄성이 일었습니다. 한 학생이 82라는 숫자를 외쳤습니다.
“아, 안타깝게도 정답이 아닙니다. 제가 적은 숫자는 672,923,102,561이었습니다.”
황당한 답에 웃는 청중들을 향해 말을 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숫자를 맞힐 확률은 얼마일까요? 자연수가 무한히 많으므로 가능한 정답의 가짓수는 무한히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적은 수는 단 하나이지요. 따라서 확률은 무한 분의 1, 즉 0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확률이 0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이 숫자를 맞히는 것은 분명히 가능했습니다. 아까 82를 외친 학생이 기막히게도 672,923,102,561을 외치고 저의 노트북을 가져갔을지도 모르죠. 따라서 이 사건은 확률이 0이지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의 존재는 확률의 개념을 더욱 엄밀하게 정의하려는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측도론’이라는 분야가 만들어졌죠. 만약 ‘확률이 0이면 불가능하다’라는 명제를 수학자가 의심 없이 수용했다면 측도론은 발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학자는 아주 당연해 보이는 사실도 끈질기게 의심하는 사람이고, 그런 의심 덕분에 수학은 지금과 같은 놀라운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스스로에게 자문해봅시다. ‘확률이 0이면 불가능하다’와 같이 아주 당연해보이는 명제조차 거짓이라면, 과연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얼마나 견고할까요? 어쩌면 여기에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들으면 치가 떨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죠. 반대로 진보나 페미니즘 운동은 언제나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과연 수학자가 수학을 대하듯이 치밀하고 잔혹하게 자신의 믿음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은 그러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믿음을 엄격한 심판대 위에 세운다면, 여러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몇 가지 개념이나 이데올로기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옳은 사상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특정 믿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삶을 선택한다면 수학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살기를 거부한다면 여러분에게는 의무가 생깁니다. 바로 매 순간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고, 지금의 상황에서 올바른 선택은 무엇일지 신중히 고민할 의무입니다.
둘 중 무엇을 선택할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만, 만약 후자를 택한다면 여러분은 사유의 훈련장으로서 수학이 지니는 유용성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와 함께 명료한 사고가 주는, 자극적이지는 않을지언정 은은하고 충만한 만족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그것이야말로 제가 생각하는 수학의 가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