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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탐구생활] 제5장. 사랑으로 구원 받다

첫사랑

 

19세기 여름 영국.

“버티(버트런드 러셀의 애칭)야, 어디 있어?”

“저, 여기요! 책을 읽고 있었어요.”

알리스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나무를 향해 걸어갑니다.

“아, 여기 있었네. 그건 무슨 책이야?”

“*칸토어라는 수학자가 쓴 책인데 정말 대단해요.” 

“공원에서 전공 서적을 읽는 사람도 다 있구나.”

오후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저만치에서 봄바람을 타고 들려 옵니다.

“무슨 내용이길래 그렇게 빠져 있는 거야?”

반짝거리는 눈으로 러셀이 알리스를 쳐다봅니다.

“궁금해요?” 

“음, 네가 설명해준다면....”

살포시 미소를 짓는 알리스를 바라보며 러셀이 입을 엽니다.

 

 

*게오르크 칸토어

19세기에 활동한 독일 수학자로, 집합을 연구하는 수학의 분야 ‘집합론’의 창시자입니다. 무한이라는 개념에 관한 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인도
 

버트런드 러셀은 만 17세이던 1889년 다섯 살 연상의 미국인 알리스 피어솔 스미스에게 첫눈에 반합니다. 알리스는 러셀의 집 근처에 이사 온 부부의 딸로 미국 브린마칼리지에 다녔는데 방학 때마다 부모님이 사는 영국에 왔어요. 그때마다 러셀은 알리스를 만났고 해가 갈수록 그녀에게 빠져들었습니다. 

 

보수적인 할머니의 엄격함 속에 살던 러셀은 알리스를 통해 일종의 해방감을 맛봤어요. 저녁을 먹고 알리스와 모닥불 앞에 앉아 흑인들의 노래를 부르고, 연애를 포함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알리스를 막연히 동경하던 러셀은 1893년 성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알리스에게 다가가기로 결심합니다. 알리스와 일종의 ‘썸’을 타며 자주 만났고,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훗날 러셀은 알리스와 만나는 순간을 기다리던 때를 회고하며 자서전에 ‘나는 문득 인간의 삶에 행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답니다.

 

마침내 러셀과 알리스는 1894년 결혼합니다. 당시 러셀의 나이가 만 22세, 알리스의 나이가 만 27세였지요. 러셀은 알리스를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둘이 결혼에 성공하기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러셀의 집안 사람들은 알리스가 하층 계급이라며 결혼을 극구 반대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이 결혼할 의지를 굽히지 않자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러셀에게 아버지의 비극을 알려준 것이지요.

 

 

원인 모를 이유로 러셀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정신질환에 시달렸습니다. 만약 러셀이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면 그의 자녀들 또한 정신질환을 앓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둘의 이별을 진중히 권고했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러셀은 엄청난 충격에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자신이 언제 정신질환을 앓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괴로운 고민 끝에 러셀은 알리스에게 결별해야겠다는 의사를 전합니다. 하지만 알리스는 아이를 가지지 않아도 괜찮으니 여전히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상의 끝에 둘은 결혼하기로 합니다.

 

결과적으로 보아, 둘이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아는 위대한 수학자 러셀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력을 앓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한때 연구를 깊이 하지 않았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 덕분에 차츰 정신적 안정을 찾아갔거든요.

 

러셀은 이때를 ‘나날이 해가 따뜻했던 것 같다’, ‘감정상 힘든 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내 모든 에너지를 지적인 작업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고 자신이 쓴 책에서 회고한 바 있습니다.

 

청소년기 러셀은 외로움의 끝자락에 선 순간 ‘앎의 가치’를 발견했지만, 성인이 된 러셀은 공포의 끝자락에 선 순간 도리어 ‘사랑의 가치’를 찾은 겁니다. 물론 외로움과 정신적 공포는 러셀에게 피하고 싶은 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들이 없었다면 그는 앎과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겠지요. 진주를 손에 넣는 자의 옷자락에는 언제나 진흙이 묻어 있기 마련이니까요. 

 

"좋은 삶은 앎과 사랑의 인도를 받는다."

-버트런드 러셀

 

 

수학 기초를 향해

 

러셀은 알리스와 몇 년간 독일, 프랑스 등지로 자유로이 여행을 다녔는데 이때 했던 폭넓은 독서가 연구의 큰 토대가 됐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러셀은 알리스와 번갈아 가며 서로에게 책을 읽어줬고, 수학뿐 아니라 정치,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알리스는 수(數)가 뭐라고 생각해요? 가령 10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최근 수학이 다루는 대상의 본질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이론이 필요해지고 있어요. 이 대상을 엄밀하게 정의하지 않고 현대 수학을 연구하면 삽시간에 엉터리 결과에 휘말릴 수 있거든요. 

 

이 엄청난 과업에 도전장을 내민 수학자가 칸토어에요. 칸토어의 핵심 아이디어는 ‘집합’이라는 개념이에요. 집합은 특정 대상들로 이뤄진 모임이에요. 단순하죠? 집합론을 이용하면 10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어요. 먼저 ‘두 집합의 크기가 같다’를, ‘두 집합의 원소를 일대일대응할 수 있다’로 정의해요. 그러면 10은 ‘손가락으로 이뤄진 집합과 크기가 동일한 집합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어요. 이 근사한 정의로 숫자 10까지 셀 줄 모르는 사람도 일대일대응을 통해 우리 둘의 손가락 개수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이렇게 자연수를 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하면 논리학의 원리만 이용해서 수 체계를, 나아가 수학 전체를 엄밀히 구축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인류 최초로 수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세대가 되겠지요. 근사하지 않아요?”

 

“일대일대응이 수의 핵심이구나. 낭만적이야. 모두가 자기만의 짝을 찾는 거잖아.”

“하하, 그렇게 볼 수도 있네요. 어떻게 보면 수학의 핵심은 짝을 찾아주는 거지요.”

 

이때 러셀은 *화이트헤드 교수를 찾아가 수학 기초론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던 1896년에는 집에서 독일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의 논문을 읽고 요지를 공책에 베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10년에 걸쳐 러셀과 <;수학원리>;를 써 수리논리학의 기초를 확립했어요.

 

 

밤을 지새우게 한 집합론

 

 

여러분은 공부를 하다가 ‘이 지식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라는 질문은 제쳐 두고, 단순히 ‘이 지식을 알게 돼서 기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나요? 저는 집합론을 공부하면서 그런 경험을 적잖이 했습니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집합론을 공부했는데, ‘존재하는 모든 집합은 표현 가능한가?’라는 집합론의 핵심 주제를 만났어요. 우리가 논증할 수 있는 것의 한계까지 생각한다는 점이 너무나도 신비로웠는데요. 그래서 침대에 누워서도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집합들을 헤아리며 잠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집합론은 명실상부 현대 수학의 가장 큰 쾌거입니다. 칸토어가 19세기에 고안한 이후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집합론은 수학의 본질을 포착하는 가장 유력한 이론으로 여겨지거든요. 도서관을 가서 대학 수준의 수학 교재를 펼쳐 보세요. 어느 책을 펼치든 십중팔구 첫 번째 장은 집합론의 기초 개념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을 것입니다.

 

집합론이 아니었다면 아마 저는 지금 영국에 없었을 거예요. 집합론 같은 수학 기초론을 접한 경험은 제가 수학의 신비를 절감하는 계기였고, 그 신비감은 철학적 주제들의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알고 싶은 것이 많아졌고, 이윽고 한 학기 정도는 수학 기초론과 철학을 공부하는 데 투자해도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환학생을 신청했어요. 그만큼 수학 기초론과 철학에 관한 논의는 저의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가슴이 뛰는 분야를 찾은 것도 행운인데, 그것에 매진할 기회마저 얻은 것은 천운이라고 해야겠지요.

 

아마 여러분도 여유를 가지고 다양한 분야를 기웃거리다 보면 언젠가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만날 겁니다. 그날 전까지는 호기심을, 그날 후에는 열정을 가지시길 바라요. 

 

 

2023년 05월 수학동아 정보

  • 최정담
  • 진행

    이채린 기자
  • 디자인

    정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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