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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SF 스토리 공모전 수상작]안스리움

 

지난 줄거리

현세의 자본력에 따라 내세의 등급이 인간, 동물, 식물로 정해지는 세계에 사는 설진은 식물 등급을 받은 아버지의 내세 좌표를 받기 위해 구청에 들른다. 이후 중요한 미팅을 위해 채식 요리 전문 식당에서 투자 전문가 재관과 만난다. 대대로 동물 등급 이상을 받는 재관과 자신 사이에 간극을 느끼며, 설진은 더욱 인간 등급을 받고자 하는 열망이 커진다.

 

자본의 논리를 맹신하는 설진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구청이나 아버지의 내세 좌표 따위가 새까맣게 지워지고 없었다. 한참 기대감에 들떠 있던 설진은 불현듯 울린 진동 소리에 움찔했다. 하윤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액정을 보자 의식 한 켠에 숨어 있던 피로감이 또다시 밀려왔다. 그냥 무시해 버릴까 고민했지만, 오전에 일방적으로 끊어 버린 것이 마음에 걸려 일단 수신 버튼을 눌렀다.

 

“어, 설진아. 집이야?”

 

“응.”

 

“그렇구나. 다름이 아니라 아까 알려준 좌표로 여기저기 검색해 봤고, 주소도 찾았거든....”

 

설진은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는 누나의 말투만 듣고도, 이후에 나올 얘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요구에도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런데?”

 

“근데 내세 태생지가 외국인 경우에는 하루라도 빨리 찾으러 가야 한다더라고. 보통 한국에서는 한 달 정도 유예기간을 두는데, 아직 외국에서는 그런 유예기간 제도가 없나 봐. 그래서 그냥 태어나자마자 팔아 버리는 경우도 있고. 혹시 네가 한번 다녀와 줄 수 있을까? 누나가 비행기 표는 다 끊어 둘게. 마음 같아선 내가 가고 싶은데 몸이 이러니 집 앞에도 나가기가 힘들어. 지금 엄마도 집에 와 있는데 계속 걱정하시네. 아버지 못 찾아오는 거 아니냐고.”

 

“내가 어떻게 가! 내일 당장 계약 건이 있는데. 그리고 태어난 지 하루 이틀밖에 안 된 거를 누가 사 간다고 그래.”

 

“그래도 빨리 모시고 오는 게 마음 편하지 않을까.”

 

설진은 빙빙 말을 돌리며 그를 회유하려는 하윤의 화법이 마음에 안 들었다. 누구는 마음 편해서 이러고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저 인상만 찡그린 채 대답 없이 하윤의 말을 듣기만 했다.

 

“여보세요. 설진아, 듣고 있어? 네가 안 된다 그러면 엄마는 혼자서라도 갔다 오겠다는데, 어떻게 비행기 한 번 못 타본 엄마를 보내. 어떻게 금방 갔다 올 수는 도저히 없는 거야?”

 

끝끝내 혼자 다녀오겠다고 고집부리는 엄마와 기어코 말리는 하윤의 투닥거림이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설진은 제발 좀 들으라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누나, 아무래도 난 힘들 거 같고. 내일 스케줄 끝나는 대로 생각해보자. 일단 지금은 연락하기가 좀 그래. 나중에 연락할게.”

 

설진은 다시 한번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방 안이 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설진은 케이스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어 베란다로 나갔다.

 

공기가 꽤 쌀쌀했다. 담뱃불을 붙인 설진은 한숨과 함께 짙은 연기를 쭉 내뱉었다. 죽어서까지도 자신을 피곤하게 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이승을 떠나서도 굴레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걸까. 왜 하필 안스리움으로 배정받았을까. 조금만 더 벌어서 곤충으로라도 배정받았으면, 애꿎은 사람들이 그를 찾기 위해 굳이 먼 걸음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설진은 안스리움이라는 식물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도 몰랐지만, 아버지라는 사람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안스리움은 누군가에게 피해 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여러 상념이 머릿속에서 오가는 동안, 설진은 동네 전경을 새삼스레 살펴보았다. 주택가 한편에서 중장비 몇 대가 둔탁한 철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대형 교회가 있던 자리였는데 어느새 철거돼 버리고 희뿌연 콘크리트 조각들만 널부러져 있었다. 교회의 첨탑이 잔해들 사이에서 나뒹굴고 있었지만, 설진은 그것에서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태생부터 무교로 살아온 그에게, 종교의 몰락 따위는 살아생전 얼굴도 보지 못한 8촌 친척의 부고 소식만큼이나 별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삭막해져 버린 도시 전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설진의 주머니에서 또다시 진동음이 울렸다. 담배를 재떨이에 털어 버렸다. 휴대전화를 꺼내자 역시나 하윤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설진아, 지금 엄마 혼자 공항 가신다고 나가 버렸어. 예전에 여권을 만들어 드리긴 했는데 그걸 진짜 가지고 오셨더라고. 내 연락은 지금 안 받는데, 네가 한번 전화해 봐. 부탁이야, 설진아.]

 

왜 하필이면 오늘 이렇게도 자신을 못살게 구는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혹시 종교를 잃어버린 신이 분노해 인간에게 복수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주 운이 나쁜 설진이 하필 타겟이 된 것이다. 계약 건이 수포로 돌아가야만 신의 분노가 누그러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에 잠겨있던 설진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베란다 문을 세게 닫으며 방으로 들어온 설진은 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엄마는 왜 굳이 가겠다고 말썽인 것일까. 설진은 모든 상황이 불만스러웠지만 엄마의 행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연락이라도 해보자는 심산으로 아주 오랜만에 엄마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몇 차례 울리지 않았는데 예상외로 빨리 통화가 연결됐다. 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바깥인 듯했다.

 

“지금 어디야?”

 

“와? 혼자 지금 공항 가고 있다. 느그가 안 간다 캐서.”

 

엄마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잖아. 내일 천천히 생각해보면 되지, 뭘 그렇게 급하게 생각해. 아무도 안 사 간다니까 그거.”

 

“사가는지 안 사가는지 네가 우째 아노! 그라다가 진짜로 누가 사가삐면 어짤 끼고. 됐다, 마. 내 혼자 갔다 올라니까 느그는 신경 안 써도 된다.”

 

신경쓰지 말라는 이야기가 어째 더 신경써 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엄마도 설진 못지 않게 한 고집하는 성격이라 정말 필리핀으로 떠나 버릴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씩씩대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엄마의 숨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불규칙한 호흡이 마치 무언의 부탁처럼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더 이상 할 얘기 없으면 끊으라며 최후통첩을 했다. 설진은 하는 수 없이 일단 자신이 가는 거로 할 테니 집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답했다. 엄마의 숨가쁜 호흡 소리가 그제야 잠잠해졌다.

 

시계는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다. 오늘 출발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어둑한 밤 시간에 낯선 나라를 헤매는 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

 

책상 한켠에 위치한 스마트 패드에는 미처 채워지지 못한 발표 자료가 띄워져 있었다. 혹시나 내일 발표를 망친다면, 그리하여 계약이 불발된다면, 동물 등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조리 아버지라는 작자 때문이라고 설진은 생각했다. 심지어 왜 아버지는 하필 50일 전에 죽었어야만 했는가 하는 섬뜩한 생각까지 들었다.

 

어찌됐건 엄마의 마지막 초강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설진은 시간을 계산했다. 내일 오후 4시까지 한국에 오려면 적어도 내일 새벽 4시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설진은 하윤에게 비행기 표를 알아서 끊어 놓으라는 통보식의 메시지를 보냈다. 천금 같은 시간을 할애하는데, 사비까지 쓰고 싶지 않았다. 또한 내세 좌표를 상세한 주소로 바꿔 보내라고 일러두었다. 메시지를 보낸 휴대전화를 침대에 내팽개치고는 멍하니 프로젝트 파일을 바라보았다. 이젠 이 자료에도 온전히 신경쓸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벌써부터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안스리움인지 안스러움인지 하는 식물을 필리핀에서 받아다가 곧장 강물에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설진은 본인이 인간 등급을 부여받는 과정에 걸림돌이 너무나도 많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윤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오전 4시 15분 마닐라행 티켓을 끊어 놨고, 아버지의 내세 주소는 ‘’라는 내용이었다. 발라돌리드라는 마을은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다행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설진은 다행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사전에서 다시 찾아보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관두었다. 프로젝트 팀원에게는 내일 오전 중으로 화상 회의를 하자고 급히 양해를 구했다. 마음이 영 뒤숭숭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결정 난 상황에 감정만 소비하면 자신만 손해일 것이라고 설진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혹시나 일이 꼬여 버리면 그때 가서는 정말 그 표독스러운 식물을 불구덩이에 집어넣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새벽녘에 일어나야 했으므로 설진은 일찍 잠을 청해야 했다. 당연히 잠들기 어렵겠지만 내일 계약 협상을 위해 기력을 비축해 두어야만 했다.

 

초저녁의 어둠은 꽤 이질적이었다. 완벽히 깜깜하지도 않은, 허나 결코 무엇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설진은 모든 상황이 꿈인 것 같았다. 내일 프로젝트 계약 건도, 안스리움으로 새 삶을 시작한 아버지도, 부유한 전생을 누렸을 하윤의 뱃속 아이도,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내세배분제라는 신박한 제도까지. 오만 가지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지만, 결국 봉착한 지점은 하나였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한다. 설진은 이러한 몽상 속에서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니 오전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하필이면 오늘 비행기 편이 연착이 되어 두 시간이나 지체된 것이었다. 심지어 험상궂은 폭우까지 쏟아지고 있었다. 다급해진 설진은 1분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택시 정류장까지 전력으로 내달렸다. 검은색 정장은 이미 빗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겨우 택시에 탑승한 설진은 운전기사에게 발라돌리드라는 단어만 연신 외쳐 댔다. 운전기사는 설진의 어설픈 영어를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을뿐더러, 다짜고짜 고함을 질러 대는 그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한참의 설명 끝에 택시가 장대비를 뚫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폭우 탓인지 설진의 어설픈 영어 실력 탓인지 운전기사는 가야 할 길을 제대로 못 찾는 듯했다. 혼자서 필리핀 타갈로그어를 중얼거리며 헤매고 있는 운전기사의 모습에 설진은 속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시계는 어느덧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본 작품은 동아사이언스가 주최하고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지원한 ‘2022 SF스토리 공모전’ 수상작입니다. 공모전에는 483개의 작품이 출품됐으며 대상, 최우수상 등을 비롯해 우수작 25개를 뽑았습니다. 수상작은 <;수상한 작품집>;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수학동아>;는 수상작 중 숫자가 소설의 중요한 장치로 쓰이는 단편소설 <;안스리움>;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소설의 전문은 SF스토리콘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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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3월 수학동아 정보

  • EASTMAN
  • 진행

    손인하 기자 기자
  • 일러스트

    안재원
  • 디자인

    정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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