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정시의는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정인지, 정초 등의 과학자가 만든 시계입니다. 해시계와 별시계의 기능을 하나로 모아서 낮과 밤의 시각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죠. 일종의 주야간 겸용 시계인 거예요. 그런데 최근 일성정시의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어요. 과연 무슨 일일까요?
6월 29일 문화재청은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에서 조선 시대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서울 종로구에서 조선 전기에 제작된 금속활자 1600여 점과 세종 혹은 중종 때 제작된 물시계 부품 등 금속 유물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거예요. 문화재청은 ‘이번에 발견된 유물들은 조선시대 전기, 더 나아가 세종의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번에 발굴된 유물 중에는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성정시의 부품인 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이 있습니다. 일성정시의란 낮과 밤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조선의 독창적인 천문시계입니다. 1437년에 장영실 등이 처음 제작했으며, 세종 대왕이 직접 일성정시의의 구조와 원리를 연구할 정도로 많은 공을 들였죠.
일성정시의가 만들어지기 3년 전인 1434년에도 시계는 존재했습니다. 장영실과 김조 등이 만든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입니다. 하지만 자격루는 이동이 불가능하고 구조가 복잡하며 유지비용이 많이 들었고 앙부일구는 밤에 시간을 측정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시계의 단점을 보완해 이동 가능하고 밤낮으로 측정할 수 있는 일성정시의를 만든 것이죠.
일성정시의는 네 개가 제작됐습니다. 하나는 경복궁 만춘전 동 쪽에 설치돼 자격루의 오차를 보정하는데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기후를 측정하고 예측하는 오늘날의 기상청과 유사한 기관인 서운관에 설치했습니다. 나머지 두 개는 함길도와 평안도의 군사 지역에 배치해 경비 임무와 군사 경계 태세를 강화하는데 사용했습니 다. 일성정시의는 정밀한 관측 기기지만 크고 무거워 군대에서 사용하기는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크기가 작고 사용법이 단순해 천문학을 잘 모르는 일반인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소정시의’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일성정시의, 왜 중요할까?
각 지역에서 측정하는 시간은 그 지역의 경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경도는 둥근 지구를 360°, 즉 동경 180°, 서경 180°로 나눈 것입니다. 경도가 1° 차이 나면 4분 정도의 시간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한반도의 서쪽과 동쪽 끝은 약 7.7°의 경도 차이가 나는데, 이로 인해 30분 정도의 시간 차이가 나타나죠.
위치에 따른 시간 차이 떄문에 조선 시대 때는 나라 전체가 수도인 한양의 시간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를 한양에 놓았고 조선의 표준시*를 알려주는 '표준시계'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자격루는 외부환경에 따라 물의 높이가 달라지는 등 매일 최대 15분의 오차가 생겼죠. 이 문제는 일성정시의를 이용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낮에는 해의 위치를 파악해 정오(낮 12시)를 정확히 구해 자격루의 오차를 교정했고, 밤에도 별의 운동을 살펴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했죠. 이런 점에서 자격루 등의 물시계가 없는 지역에서는 일성정시의를 표준시계로 사용가히고 했습니다.
동양철학에서 군주는 '관상수시'라는 덕목을 갖춰야 했습니다. 관상수시란 '한르의 뜻을 살펴 백성에게 시간을 알린다'는 의미로, 천체현상을 통해 절기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주로 농사를 짓던 조선 시대에 농사에 맞는 시간과 때를 아는 것은 국가적으로 중요했죠. 세종 시기에는 일성정시의를 비롯해 당시 최첨단 과학기술이 반영된 다양한 천문기기들이 제작됐습니다. 그 기기를 통해 천체의 운동과 시간을 알아보는 등 정밀한 천문 관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5세기 조선의 천문학은 당시 세계적 수준이었던 이슬람, 중국과 동등한 위치라는 평가를 받고 있죠. 일성정시의는 이때의 우수했던 조선의 천문학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담긴 각도와 시간의 수학
각도와 시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현대에 사용하는 ‘분’과 ‘초’는 시간의 단위지만 각도의 단위이기도 하죠. 예를 들어 각도 1는 60′(분)으로, 1′는 60′′(초)로 쓸 수 있습니다. 우리가 1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쓰는 것과 유사합니다.
일성정시의에도 비슷한 수학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천문학과 수학에서 한 바퀴는 365.25도라고 말했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365.25일인데, 여기에 맞춰 한 바퀴의 각도를 365.25도로 두면 태양을 비롯한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는데 편리했기 때문입니다. 이 각도를 표시하기 위해 이번에 발견된 일성정시의의 맨 바깥 고리를 이루는 부품인 ‘주천도분환’에는 총 1461개의 눈금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365.25에 4를 곱한 숫자로 한 눈금을 0.25도, 네 눈금을 1도로 표시한 것이죠.
정확한 밤시간 측정에도 쓰이는 각도
하루의 길이는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데 걸리는 시간’ 혹은 ‘태양이 정남쪽에 도달한 뒤 다음날 정남쪽에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앞의 시간을 ‘항성시’, 뒤의 시간을 ‘태양시’라고 부르죠. 일성정시의는 밤에는 별을 이용해 항성시를, 낮에는 태양을 이용해 태양시를 측정합니다. 그런데 지구는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동시에 자전하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태양시는 항성시보다 매일 4분 정도 느려집니다. 당시 조선은 태양시를 기준으로 정했는데, 그러다보니 별이 매일 4분씩 일찍 뜨는 것처럼 보인다는 문제가 발생했죠.
일성정시의로 밤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가장 안쪽에 있는 고리인 ‘성구백각환’을 매일 회전시켜 시간을 보정했습니다. 천체는 24시간(1440분)동안 한 바퀴(365.25도)를 회전합니다. 이는 1분에 약 0.25도를 회전한다는 뜻이므로 4분 동안 약 1도를 회전하죠. 그래서 성구백각환을 매일 1도만큼 회전시켜 시간을 보정했습니다.
_ 인터뷰
옛 하늘을 연구하는 천문학자
김상혁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연구센터 책임연구원
대전 한국천문연구원의 우리나라 옛 천문기기 모형이 가득한 방에서 김상혁 책임연구원을 만났습니다. 기자는 그곳에서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느낌을 받았습니다. 옛 천문학을 연구하는 김 책임연구원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Q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어떤 연구를 하고 계신가요?
고천문학, 그중에서도 천문기기를 복원하는 연구를 주로 합니다. 최근에는 국립중앙과학관과 함께 ‘흠경각 옥루’라는 자동 물시계를 복원하는 연구와 홍대용이 제작한 자명종 시계 복원 연구를 했습니다.
Q 옛날 천문학에는 어떤 수학이 쓰였나요?
천체의 위치를 표현할 때 좌표계를 사용합니다. 둥근 하늘 위의 별의 좌표를 표시하는 좌표계를 다루기 위해서는 구면기하학의 원리를 알아야 했죠.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좌표계를 썼어요. 따라서 서양의 천문학이 동양으로 들어올 때 둘의 좌푯값을 변환해야 했습니다. 이때는 구면삼각법이라는 기하학이 쓰였고, 비례식 계산도 많이 쓰곤 했습니다.
Q 이번 일성정시의 유물 발견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세종 시기의 천문 유물이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이 독창적으로 개발한 기기에 대한 제원과 원리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자격루와 일성정시의가 그런 경우죠. 그런데 이번 일성정시의 유물은 실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일성정시의는 세종이 직접 고안하고 디자인한 기기입니다. 이런 유물이 발굴된 유례가 없고 복원품과 큰 차이가 없는 점도 의의가 있죠.
Q 일성정시의의 실물과 복원품에 차이가 있었나요?
문헌을 토대로 유물을 복원할 때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 만듭니다. 왜냐하면 문헌 내용에 뭔가를 더해 복원하면 그것은 복원이 아닌 상상이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일성정시의 유물을 보니 환을 돌리는 손잡이 부분이 복원품과 달리 예쁘게 장식돼 있습니다. 또 일구백각환이 못으로 박혀있고 바깥과 안쪽 환이 레일 구조로 결합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도 새로 알았죠. 복원품은 환을 들면 쉽게 빠지는 구조거든요. 일성정시의를 새로 복원한다면 이번에 출토된 유물의 모습을 고려해 손잡이 디자인, 부품 조립 형식 등이 달라질 것입니다.
Q 수학동아 독자들이 주목할만한 또 다른 천문학 기기가 있나요?
동서양의 과학이 융합된 혼천시계를 봐줬으면 좋겠어요. 시계의 동력으로 물을 이용한 건 동양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동력을 서양의 자명종 시계와 연결해 썼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또 흠경각 옥루는 자격루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물시계예요. 경복궁과 흠경각이 불타면서 옥루가 여러 번 소실됐지만 조선 왕조는 이를 계속해서 만들었어요. 어찌보면 당시 국보의 위치에 있던 물시계라고 볼 수 있겠죠.
용어정리
* 표준시 : 한 국가 또는 넓은 지역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기준 시간. 현재 우리나라는 협정 세계시(UTC)보다 9시간 빠른 UTC+9를 표준시로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