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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베르누이 가문 이후에도 많은 수학자 가족이 나와 수학계 발전에 일조했습니다. 그 중엔 여성 차별을 딛고 천재 수학자라 인정받은 에미 뇌터와 조선 시대 수학자들도 있습니다. 

 

‘여성의 고등 교육이 시작된 이래 가장 주목할 만한 창조적인 수학 천재.’
인류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받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칭송한 독일 수학자 에미 뇌터 역시 수학자 가족의 일원입니다. 아버지인 막스 뇌터와 남동생 프리츠 뇌터가 수학자였죠.

 

베르누이 가문에 버금가는 독일의 뇌터 가문


막스 뇌터는 ‘19세기 최고의 수학자’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업적을 냈습니다. 만 14세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이를 이겨내고 스스로 수학 공부를 해 독일 에를랑겐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됐어요. 다항식의 해를 기하학적으로 연구하는 ‘대수 기하학’을 주로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장녀 에미 뇌터가 살았던 시기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수학 교육이 자리 잡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당시 여성은 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 막스 뇌터가 교수로 있던 덕분에 청강생의 신분으로나마 수학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1904년 에를랑겐대학교가 여성의 입학을 허용하자 에미 뇌터는 그제서야 수학과 학생의 신분으로 수업을 듣고 박사과정을 밟게 됩니다.
연구 논문을 통해 많은 수학자로부터 인정을 받았을 때도 에미 뇌터는 계속해서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1915년 독일 괴팅겐대학교 교수가 돼 강의하려고 했지만, 여성 교수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독일의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성별과 교수 자격은 상관없다. 여기가 대학이지 공중목욕탕이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한 이후인 1919년이 돼서야 에미 뇌터가 괴팅겐대학교 교수에 임용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칠 수 있게 된 에미 뇌터는 다시 곤경에 처합니다.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유대인이였던 에미 뇌터는 또다시 강의할 수 없게 된 것이죠. 그래서 1933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교수를 계속하다가 2년 뒤 숨을 거뒀습니다. 사회적 상황이 수학자의 길을 방해했지만, 수 대신 문자를 쓴 방정식이나 구조를 연구하는 대수학 분야에서 큰 성과를 냈습니다.
에미 뇌터의 장례식 때 누군가가 에미 뇌터를 두고 ‘유명한 수학자 막스 뇌터의 딸’이라고 하자 독일의 수학자였던 에드문트 란다우가 ‘막스 뇌터가 에미 뇌터의 아버지’라며 ‘에미 뇌터는 뇌터 가문의 정점에 있다’고 소개할 정도로 많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조선 시대 수학자 가문의 일원 홍정하와 이상혁


우리나라에도 수학 명가가 있었습니다. 수학과 천문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조선의 수학자 홍정하(1684~?)와 이상혁(1810~?)의 가문입니다. 홍정하는 대대로 수학자를 배출한 가문의 일원이었고, 이상혁 가문은 이상혁의 5대조 이영현부터 무려 8대에 걸쳐서 조선 시대의 수학 분야였던 ‘주학’ 시험에서 합격자를 배출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홍정하는 어릴 때부터 수학을 즐겼고 어린 나이에 주학 시험에 합격해 수학자가 됩니다. 중국의 수학자 하국주를 만났을 때는 수학 문제 여러 개를 번갈아 내면서 답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그중 하국주가 낸 문제를 하나 소개합니다.

 


이 문제는 큰 정사각형이나 작은 정사각형의 한 변의 길이를 변수로 두고 방정식을 세워야 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큰 정사각형의 길이를 a라고 두면, 작은 정사각형의 한 변의 길이는 a-6이 됩니다. 그리고 각 정사각형의 넓이는 변의 길이를 제곱한 값과 같으므로 아래와 같은 식을 세울 수 있습니다.


a2 + (a-6)2 = 486


위 문제는 이차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일차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법을 연구하고 다항방정식의 근사해를 구하는 법을 공부했던 홍정하에게는 쉬운 문제였죠. 홍정하는 이런 문제들을 비롯해 10차 방정식의 풀이나 나무로 만든 가지를 이용해 계산할 수 있는 산목셈 등 다양한 수학 자료를 모아 ‘구일집’을 펴내기도 합니다.


홍정하보다 100여 년 후에 태어난 이상혁은 홍정하와는 조금 다른 수학자의 행보를 펼칩니다. 문제 풀이에 집중했던 조선 시대의 산학을 논리적으로 풀어낸 수학책을 썼으며, 이상혁은 방정식에 대한 ‘차근방몽구(1854)’, 기하와 삼각법에 대한 ‘산술관견(1855)’, 홍정하의 구일집과 함께 조선의 수학을 대표하는 수학책인 ‘익산(1868)’ 등을 썼습니다. 

 

 

_ 인터뷰 

국내 수학계 가족은 누구?

 

지금도 수학자 가족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수학자 가족이 있는데요, 바로 김영욱 고려대학교 수학과 명예교수 가족입니다. 인터뷰로 가족 구성원이 수학자여서 생긴 에피소드와 수학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Q 교수님의 가족을 소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김영욱 교수입니다. 저는 곡면과 같은 도형의 성질을 미분 개념을 이용해 이해하는 미분 기하학을 연구했습니다. 제 아버지인 김치영 수학자는 해방 후 1세대 수학자로 연세대학교 수학과를 비롯한 많은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셨어요. 우리나라에서 처음 미분 기하학과 위상 수학을 연구하고 가르쳐 학생들을 많이 양성하셨죠. 제 둘째 딸 역시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교 수학과를 나와 통계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Q 가족 중에 수학자가 많아서 생긴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나요?


사실 별다를 게 없었어요. 대학에 들어가면서 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을 때는 공부하느라 바빴고 그 뒤에는 유학을 가는 바람에 아버지와 연구에 대해 논의하거나 직접 수학을 배운 적이 없었거든요. 어렸을 적에는 수학 공부를 하다 곱셈, 나눗셈 계산처럼 궁금한 점을 여쭤보면 조금씩은 알려주셨던 것 같지만 억지로 수학 공부를 시키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수학자여서 그런지 항상 집에 수학책이 많았어요. 어릴 때는 그 책들을 보곤 했었죠. 물론 어려워서 이해는 못 하고 정말 보기만 했어요. 볼펜이나 색연필로 책 속 그림들을 따라 그리면서 책을 망가뜨리기도 했고요.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저도 모르게 수학을 가까이했던 이런 경험들이 수학을 공부할 때 간접적으로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

 

Q 자녀의 수학 교육은 어떻게 했나요?


오히려 수학을 안 가르치려고 노력했어요. 주변 수학자들이 하는 말 중에 “수학자가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들, 딸을 가르치면 실패한다”고 하거든요. 수학자 부모가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면 마음처럼 잘 안된다는 뜻이죠. 수학과를 나온 제 둘째 딸의 경우에는 의대, 미대를 모두 경험하다가 이공계 학과에 가기로 마음먹고, 이과라면 수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수학과로 진학한 경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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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5월 수학동아 정보

  • 홍아름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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