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영국인 메러디스 커처가 잔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됐어요. 용의자로 지목된 건 커처의 룸메이트였던 어맨다 녹스와 녹스의 남자친구 라파엘 솔레시토, 그리고 빈집털이범 루디 게드였죠.
이탈리아 경찰은 흉기를 찾기 위해 조사를 이어가던 중 솔레시토의 아파트에서 한 요리용 칼을 발견했어요. 수사관이 ‘유난히 깨끗하다’고 말한 이 칼은 법의유전학자인 파트리치아 스테파노니 박사에게 보내졌어요. 스테파노니 박사는 칼의 손잡이에서 녹스의 DNA를 찾았어요. 하지만 요리를 하면서 썼을 수 있으니 증거로 보기 어려웠죠. 문제는 칼날 부분에서 나온 커처의 DNA였어요. 커처는 단 한번도 솔레시토의 집에 간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으므로 칼날에서 커처의 DNA가 나왔다는 것은 흉기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죠.
사건이 거의 해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칼에서 검출한 DNA의 양이 당시 DNA 검사에 필요한 권장 기준보다 너무 적었던 거예요. 본래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시료를 둘로 나눠 각각 분석한 뒤 결과를 비교하는데, 세포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스테파노니 박사는 1번만 검사했어요.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DNA를 분석한 그래프에서 13쌍의 봉우리가 정확히 일치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에 스테파노니 박사를 비롯한 다른 유전학 박사는 ‘이것이 피해자의 DNA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DNA일 여지가 전혀 없다’고 증언했지만, 녹스 측은 이 검사 결과 자체가 무효하다고 주장했죠.
여러 번 항소심을 거치며 시간이 흐르던 중 새로운 DNA 분석 도구가 나타났어요. 아주 적은 양의 시료만 가지고도 정확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기법이었죠. 그리고 2011년 검찰은 칼에서 검출한 시료로 새로운 검사를 진행할 것을 요청했어요.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어요. 항소심의 재판을 맡은 클라우디오 헬만 판사가 ‘신뢰도가 낮은 두 시료의 검사 결과를 합쳐도 신뢰도가 높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판결 이유를 밝히며, DNA 검사 요청을 거부한 거예요. 결국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었던 DNA 검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녹스와 솔레시토는 2017년 3월 무죄 석방됐어요.
수학적 오류 반복된 확률 실험에 관한 오해
헬만 판사가 이 사건에서 범한 실수는 같은 실험을 두 번 시행했을 때 얻는 확률적 결과를 오해한 데 있었어요. 헬만 판사는 신뢰도가 낮은 두 시료의 검사 결과를 합쳐도 신뢰도가 높아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결과가 달라지거든요.
동전 실험으로 예를 들어 볼게요. 자, 여기 겉보기에는 완전히 똑같이 생긴 500원짜리 동전 두 개가 있어요. 두 동전은 모습은 같지만 던졌을 때 앞, 뒤가 나올 확률이 다르게 만든 특수 동전이에요. 한 동전은 앞, 뒤가 나올 확률이 50%로 같고, 다른 동전은 앞, 뒤가 나올 확률이 각각 70%와 30%로 달라요. 편의상 이 동전들을 각각 ‘반동전’, ‘앞동전’이라고 부를게요.
이제 두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어느 동전인지 모르는 상태로 하나를 꺼내 한 번 던졌다고 하죠. 앞면이 나왔네요! 그렇다면 이 동전이 앞동전일 확률은 얼마일까요? 또 이 동전을 한 번 더 던져서 다시 앞면이 나왔다면 앞동전일 확률은 얼마일까요? 먼저 구한 확률과 같을까요? 실험 결과는 오른쪽에서 확인하세요.
보셨나요? ‘던져서 앞이 나왔다’는 실험과정과 결과가 완전히 똑같은데도 두 번 던짐으로써 앞동전일 확률이 58%에서 66%로 증가했다는 걸 알 수 있죠? 따라서 같은 실험을 반복해 같은 결과를 얻는다고 확률이 그대로일 거라는 헬만 판사의 추측은 수학적으로 틀렸다는 사실이 증명됐어요. 만약 신기술로 실험을 여러 번 했다면 재판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