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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용품을 예술 작품으로~ 마르셀 뒤샹의 ‘샘’

 

100년 전만 해도 예술이란 예술가의 손을 거쳐 만들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법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술은 대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개념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시중에 파는 변기통을 두고 예술이라 말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때때로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 자아를 만들어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니 그저 남성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지만요. 누군지 눈치 채셨다고요? 네, 바로 프랑스 출신의 미국 예술가 마르셀 뒤샹입니다.

 

틀에 갇힌 창조와 해석의 미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던 뒤샹은 ‘개념미술’이라는 새로운 예술 세계를 열며 현대 미술의 선구자가 됩니다. 변기를 작품으로 만드는 기발함이 지금에 와서는 *레디메이드 개념을 최초로 예술에 도입한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여기에 작품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회화로 표현한 움직이는 신체

 

뒤샹은 어릴 때부터 조형물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회화 작품을 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뒤샹이 태어나고 어렸을 적 살던 곳은 프랑스로 걸출한 화가들이 활동하던 나라였습니다. 특히 뒤샹이 살던 20세기 초 서양 미술은 폴 세잔이 초석을 다듬기 시작해 파블로 피카소가 전성기를 이끈 ‘입체파(큐비즘)’ 미술 사조가 지배하고 있어 너도 나도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뒤샹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여기 ‘계단 위를 내려오는 누드’라는 작품을 보세요. 누드 형상을 마치 움직이는 기계로 묘사했습니다.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구성하고 한 공간에서 여러 시간을 한꺼번에 재현해 내는 기법, 누가 봐도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입니다.

 

 

다만 뒤샹은 입체파가 요구하는 그림에 다소 거리를 두고,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바로 ‘움직임’이었습니다. 당시 신기술인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뒤샹은 움직이고 있는 신체의 연속 이미지를 한 번에 표현하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3D 모델링처럼 사람에게 딱 붙는 옷을 입힌 뒤, 관절을 표시해 사진을 찍어서 신체의 움직임을 관찰했지요. 그렇게 뒤샹은 기하학과 차원이라는 수학 개념과 운동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발상을 결합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입체파인 듯, 입체파 아닌 뒤샹

 

 

입체파에 대한 뒤샹의 입장은 양면적이었습니다. 분명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파괴하고 공간을 여러 차원으로 분할하는 입체파에 매료됐지만, 입체파가 문화를 점령하고 체계화되는 것을 경계했지요. 그래서 입체파 화가들이 모여 떠들 때 오히려 수학과 철학 토론에 열광했습니다.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예술에서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리만 기하학’에 ‘진심으로’ 빠져 있었습니다. 기존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좋아했던 뒤샹이었기에, 그에게 타원 공간에서 펼쳐지는 리만 기하학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학문이었지요.

 

 

리만 기하학, 기존 유클리드 기하학을 부정하는 기하학이라! 이는 본질적으로 뒤샹에게 다른 시각을 열어주는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뒤샹은 리만 기하학에서 나오는 4차원의 개념을 수학적인 의미가 아닌 현재 3차원 세계를 ‘보충하는 차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색채를, 때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4차원으로 여겼습니다.

 

이렇듯 ‘새로운 관점’을 중시했던 뒤샹은 어느 예술가와도 비교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를 지배하다시피한 입체파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요. 급기야 뒤샹은 ‘유사 세잔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며 붓을 놓기로 선언합니다.

 

“시각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변화해야 한다.”

 

 

 

 

 

25세 화가, 회화와 결별!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붓을 놓는다니, 이해가 가시나요? 그러나 이 발언 이후 뒤샹은 미술사를 흔들어 버립니다. 뒤샹은 예술가가 의지만 있으면 진부한 물건이나 대량 생산된 일상용품, 즉 레디메이드도 얼마든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관습적인 미의 기준을 무시하고 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첫 작품이 1913년 작품 ‘자전거 바퀴’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만든 작품으로 ‘샘’이 있지요. 오늘 전시관에서 처음 본 바로 그 작품이요! 그런데 과연 샘을 처음 본 사람들이 ‘역시 뒤샹! 그의 명성에 맞는 참신한 작품이로군~!’이라고 했을까요?

 

샘은 1917년에 열린 미국 뉴욕의 독립예술가협회의 첫 전시에서 등장했습니다. 뒤샹은 과연 독립예술가협회가 수용성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반영하는지 시험해보기로 했지요. 시중에 파는 남성 소변기에 ‘샘’이라는 재치 넘치는 제목을 붙이고 무명의 예술가 알 뮤트의 서명을 적어 물품을 제출한 겁니다.

 

알 뮤트는 뒤샹이 만든 가상의 예술가였지요. 그런데 조직위원회가 방침을 어기고 이 작품을 전시하지 못하게 전시장의 한 구석으로 치워버립니다. 이때 분실돼 버리는 바람에 처음 출품한 작품은 영원히 사라집니다. 이후 뒤샹은 직접 17개의 복제품을 만들어 전시했지요.

 

이처럼 일상용품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고, 원래 의미를 상실하는 장소에 둬버리는 그의 작업은 ‘반회화주의’의 선봉에 나섭니다. 그렇게 뒤샹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그리고 개념미술이라는 다양한 미술사조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지금에서야 ‘이걸 누가 못 해?’라거나, ‘이게 왜 작품이야?’라는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샘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 된 것을 보면, 뒤샹이 이 작품을 생각해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는지 가늠도 안 됩니다. 늘 새로운 것을 찾으려 했던 뒤샹은 1967년 삐에르 까반느와의 대화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에게는 늘 나를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 체스선수 뒤샹

 

 

뒤샹은 밤낮으로 체스를 뒀을 정도로 ‘체스광’이었습니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작품 활동에 손을 놓고 국제체스연맹 대표와 체스 기고가로 활동하며 체스에 미쳐 있었지요. 이후에는 체스와 관련된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뒤샹은 체스를 두는 것이 펜화를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며 모든 예술가들이 체스 기사는 아니지만, 모든 체스 기사는 예술가라는 말도 했습니다. 

 

2019년 02월 수학동아 정보

  • 조혜인 기자
  • 도움

    국립현대미술관
  • 기타

    [디자인]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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