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미술 사조가 등장합니다. 색채와 빛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요소의 순간적인 인상, 분위기 또는 감상을 표현하는 인상주의 회화지요. 이것은 곧 음악가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인상주의 표현법을 음악에 이용합니다. 그래서 라벨의 곡을 듣고 있으면, 마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라벨이 그린 음악을 들어 봐요!
※ 편집자 주 : 가장 유명한 미국 음악 잡지 ‘롤링스톤’을 표방하는 롤링수(數)톤. 롤링수톤에서는 음악 이야기뿐 아니라 음악 속에 숨겨진 수학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QR코드를 찍어 음악을 들으며 읽으면 더 재밌을지도~!
지금 보고 있는 이 두 마디 악보를 기억해 주세요. 단 두 마디만 완벽하게 연주하면 클래식의 거장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볼레로’의 작은북 악보입니다. 15분가량 연주되는 곡에서 마지막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이 두 마디가 계속 똑같이 반복됩니다. 이 리듬 위에서 선율을 이루는 악기만 달라질 뿐이지요. 곡을 이루는 주요 선율은 2개인데, 이 또한 반복됩니다.
리듬과 선율이 반복돼 곡이 지루할 거라는 염려는 마세요. 끝날 듯 끝나지 않으며 계속 반복되는 선율은 한 번 들으면 중독돼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게 될 거예요.
두 마디가 만든 협주곡
라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덕분에 라벨은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와 화성을 배웠고, 음악원을 다니면서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또 라벨은 수학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정교하고 논리적으로 잘 짜인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라벨은 환상적이고 감상적인 음악가 클로드 아실 드뷔시, 그리고 미국 현대 음악의 거장 조지 거슈윈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재즈나 전통 민요가 가미된 라벨만의 독창적이고 다채로운 음악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라벨은 스페인과 프랑스 경계에 있는 바스크 지방 출신입니다. 그래서 라벨의 작품에는 스페인 색채가 많이 묻어나옵니다. 볼레로도 본래 두 사람이 추는 3박자의 스페인 무용 또는 그 춤곡입니다. 같은 박자의 왈츠보다 훨씬 느리지요.
라벨의 관현악곡 볼레로는 들릴락말락한 작은북 소리로 시작됩니다. 곡이 흘러가면서 그 위에 플룻, 클라리넷, 바순 등이 차례로 가세하고, 소리는 점진적으로 고조되다가 마침내 클라이맥스★에서는 공간을 집어삼킬 듯이 커집니다. 라벨의 말 대로 이 곡에서 변화의 요소는 ‘관현악 합주의 크레셴도★’밖에 없는 것이지요.
클라이맥스★ 흥분 또는 긴장이 가장 높은 정도에 이른 상태.
크레셴도★ 음악에서 음의 세기를 ‘점점 세게’ 하도록 지시하는 셈여림표.
그러나 계속 다른 악기가 쌓이기 때문에 단조롭지 않고 오히려 통일감이 느껴집니다. 그야말로 빈틈없이 완벽한 음악입니다.
덕분에 이 곡은 단순한 재료로 최대 효과를 나타내는 곡의 대명사가 되며, 이후 미니멀리즘★이라 불리는 사조에도 영향을 줍니다.
미니멀리즘★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 또는 문화 흐름.
단순해 보이는 이 곡은 관현악단에게는 연주하기 매우 어려운 곡입니다. 관현악기 독주가 두드러지는 곡이어서 연주자의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또 작은북 연주자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같은 리듬을 일정하게 연주해야 하니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한번 실수하는 순간 악단 전체가 흐트러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뇌신경학자들이 볼레로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같은 주제를 반복한다는 데서 라벨이 곡을 쓸 당시 뇌 전두엽에 이상이 있었다고 주장한 것 이지요. 전두엽은 고등 기능을 담당하는 부분입니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과 행동이 전두엽을 통해 이뤄집니다.
그래서 이곳이 망가지면 어떤 동작을 새로운 동작으로 바꾸지 못해 원래 하던 동작만 반복합니다. 볼레로에서 반복되는 리듬과 선율은 라벨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뇌에 이상이 생겨 나타난 결과라는 거지요. 볼레로와 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도 박자 변화가 이전의 작품과 다른 경향을 보였습니다.
라벨의 다채로운 음색에 대한 의문도 있습니다. 음색이란 말 그대로 다른 소리와 구별되는 음의 색깔입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로 같은 크기의 동일한 음을 연주해도 구별할 수 있는 건 두 악기의 음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청각은 이 음색에 민감한데, ‘음악적인 청각’을 잃은 라벨이 정교하게 다뤄야 할 작업을 대체하기 위해 음색에 빠져들었다는 겁니다.
그림으로 찾아낸 라벨의 병
다른 이유로 같은 주장을 한 뇌신경학자도 있습니다. 라벨 음악에 매료된 캐나다 화가 앤 애덤스가 볼레로를 시각화해 표현한 그림 ‘언라벨링 볼레로’를 보고 나서요. 이 그림에는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돼 있습니다.
각 도형은 볼레로 악보의 한 마디를 나타냅니다. 도형의 높이는 소리의 크기를 나타내는데, 소리가 클수록 높아집니다. 음표의 종류는 모양으로 표현하고, 음정은 색을 달리해 표현했습니다. 도형의 색은 전체적으로 일정하다가, 곡이 급변하는 326번째 마디에 다다르자 새로운 색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이 그림을 보고 라벨이 뇌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전에도 반복된 패턴을 보이는 그림으로 뇌 질환을 추측해 연구하는 사례가 있었는데, 라벨의 볼레로를 시각화해보니 뇌 질환을 앓았던 화가의 그림과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볼레로가 기본 리듬은 같지만, 주제가 반복될 때마가 악기 수를 늘리며 변하기 때문에 실제 환자 증상과는 상관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주제마다 편성을 바꾸며 변화를 모색했으며, 오히려 곡 전체 리듬을 똑같이 유지하는 게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방법이라는 거지요.
당시 라벨 자신도 볼레로를 작곡하면서 실험적인 곡을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라벨이 실제로 노년에 뇌 질환을 앓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여러 사람이 관심 갖는 이유는 그만큼 볼레로가 독특하면서 신비로운 곡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