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단이 바닥에 있는 막대기를 들어 절벽에 숫자 64를 쓰자 공간이 흔들리며 거대한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조심해요!”

멀리서 오던 파도는 해안선에 가까이 올수록 더욱 거세졌다. 무섭게 달려오던 파도는 결국 눈꽃송이처럼 뾰족뾰족한 프랙탈 구조의 해안선을 집어 삼켜버렸다. 해안선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고, 만델브로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때 위층으로 향하는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단은 어쩔 수 없이 만델브로를 남겨두고 위층으로 향했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다!

문이 닫히기 전에 간신히 세 번째 방으로 들어 온 단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걸어 들어온 방향으로 계속 걸었는데, 천장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 들었고, 안쪽을 향해 걸어도 어느 순간 바깥으로 빠져나와 버리는 것 같았다. 바깥인가 싶어서 다시 바깥쪽을 따라 걸어가면 또 안쪽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 같았다.

“뭐야.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거야?”

단이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쪽을 쳐다보았더니 한 사람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단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는 안과 밖의 경계가 없어서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바깥으로 나가버리고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겠다 싶으면 다시 안쪽으로 들어오게 돼 있어. 분명히 앞으로만 걷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위로 올라와 있고, 안쪽을 향해 걷고 있는데 바깥으로 나와 버리게 되는 거지. 계속 걷다 보면 위가 어디였고, 아래가 어디였는지 헷갈리게 돼. 안과 밖도 구분이 안 돼. 결국 공간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는 거야.”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은 콧수염과 턱수염이 길어질 대로 길어져 얼굴의 반을 감싸고 있었다. 눈이 나쁜지 두꺼운 코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안경 렌즈를 통해 보이는 동그란 눈은 한껏 찌그러진 채로 단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잘 안 보이나요?”

“다섯 살 때 디프테리아를 앓아서일까? 네 말대로 나는 눈이 굉장히 나빠. 어느 정도였냐면, 학교 다닐 때 칠판의 글씨가 보이지 않아 필기를 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 물론 악필이라 필기를 했어도 못 알아 봤겠지만.”

“저도 악필이에요. 이런 데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니!”

“너는 나 정도는 아닐 거야. 나는 글씨를 너무 못 써서 양손잡이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받을 정도였어. 양손으로 글씨를 다 쓸 줄 안다는 게 아니라 어떤 손으로도 글씨를 못 써서 구분이 안 된다는 조롱의 의미로 말이야.”

단은 박쥐처럼 매달려 있는 사람의 별명의 유래를 듣는 순간 웃음보가 터져 버렸다.

“푸하하.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웃을 일이 아닌데, 죄송해요. 그런데 필기를 하지 않고 수학을 배우는 게 가능하다고요? 흠…, 그럼 아저씨는 수학자가 아니군요!”

단이 웃음을 간신히 참아 내며 의심의 눈초리로 ‘양손잡이’를 추궁했다.

“난 단지 노트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야. 수업을 듣기만 하며 내용에 집중해 개념을 상상했지. 어릴 때부터 이렇다 보니 어떤 자료를 한 번만 읽어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는 능력도 생겼어. 지금 생각해보면 내 기억력이 좋았던 게 다행이었던 것 같기도 해.”

“수학 개념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그려내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내 단점이 상상력과 직관력을 높여 준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지. 필기를 안 하는 대신 상상하며 머릿속에 수업 내용을 그렸어. 잘 보이지 않는 대신 그만큼 상상을 잘 할 수 있었던 거지. 아마 이 때문에 내가 추상적인 공간을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지금 이 공간도 어떻게 보면 내 머릿속 상상의 공간이야. 수학에서는 위상공간이라고 말하지.”

“위상수학! 알고 있어요. 찌그러뜨리거나 늘려서 같은 모양으로 만들 수만 있으면 크기와 모양에 상관없이 같은 물체로 보고 연구하는 학문이요!”

“맞아, 구멍만 뚫지 않으면. 나는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야. 네가 말한 물체나 지금 이 공간과 같은 연구를 할 수 있던 것은 다 내 덕이야. 내가 위상수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거든. 이 공간은 독일의 수학자 클라인이 생각해 낸 ‘클라인 곡면’이지만. 대부분 ‘클라인 병’이라는 이름으로 많이들 알고 있더군.”



“푸앵카레의 추측을 내놓은 그 수학자요? 그게….”

“밀폐돼 있는 3차원 공간에서 모든 폐곡선이 수축돼 하나의 점이 될 수 있으면 그 공간은 구로 변형된다는 그 추측이지. 농구공 가운데를 매듭지어 위로 올리면 한 점으로 만들 수 있지만, 도넛은 매듭을 한 점으로 만들 수 없으니까 구로 변형될 수 없어!”

“아하! 그래서 위상수학에서는 물체를 구멍이 뚫려 있느냐 없느냐로 분류하는 것이군요!”

“지금 이 공간도 계속 바뀌고 있어. 너랑 대화해보니 넌 저기에 있는 이상한 문제까지도 풀 수 있을 것 같구나. 저 문제를 풀어 내가 이 공간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줘!”

문제 : 위상수학자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재밌는 문제네요.”

“그나저나 만델브로 아저씨가 아래층에 쓰러져 있었는데 걱정돼요.”

“마왕이 게임을 시작했군. 걱정 마. 네가 더 이상 도움을 받지 못하게 문제를 풀면 시간제한을 두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문을 잠가버리는 거야.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는 여기 문제를 풀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위층으로 달려가면 돼. 위로 올라가는 문이 닫히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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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3월 수학동아 정보

  • 조혜인 기자
  • 일러스트

    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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