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남녀공학을 나온 기자에겐 처음인 여자중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자, 분홍색 벽면과 학생들의 분홍색 교복이 눈에 띄었다. 이제 막 수업이 끝난 듯,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학교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방과 후 학교는 썰렁했다. 동아리 활동 시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조용했다. “저기, 수학미디어실이 어딘가요?” 기자가 두리번거리며 묻자, 한 학생이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손끝이 가리킨 방향에선 나지막이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텅 빈 교실을 지나 수학미디어실의 문을 열자, 열 명 남짓의 동아리 학생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제법 시끌시끌했다. 책장에는 형형색색의 모형과 교구가 진열돼 있었고, 정면에 보이는 책꽂이에는 수학동아가 여러 권 꽂혀 있었다. 독자기자단에서 봤던 낯익은 이름이 적힌 명찰도 보였다. 학생들은 손에 큐브를 하나씩 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 명이 일으킨 수학 바람
지난 연말이었다. 한 학교에서 5명이 동시에 수학동아 독자기자단을 신청했다. 전국적으로 모집하는 독자기자단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한 학생이 친구들과 함께 수학동아 독자기자단 활동을 하고 싶다며 지원서 5부를 건넸다. 그때 그 학생이 바로 청주 중앙여중 수학동아리 파이의 1기 회장, 3학년 신현 학생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수학동아를 읽기 시작한 신현 학생은 2학년이 되던 해, 친구들과 함께 수학을 재미있게 즐기고 싶어졌다. 그래서 같은 학년의 이다민, 허은수 학생과 함께 수학동아리 ‘파이($π$)’를 만들었다. 원주율을 뜻하는 파이란 이름은 특별히 $π$를 좋아하는 신현 학생의 아이디어다. 끝없이 반복되지 않고 이어지는 숫자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동아리 지원서에 ‘$π$의 소수점 이하 100자리를 써 보시오’, ‘3월 14일은 무슨 날일까(화이트 데이 제외)?’ 같은 문항을 만들기도 했다.
3.1415926535897…. 그렇게 셋이서 처음으로 시작한 활동은 동아리 이름이기도 한 $π$의 소수점 이하 자리를 외우는 것이었다. 동아리를 소중히 생각하자는 취지에서다. 이후 후배들을 받으면서 동아리는 점차 활성화됐다. 거의 쓰지 않는 공간이었던 수학미디어실도 매주 수요일마다 북적였다. 세 명이 모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3의 법칙’이 통한 셈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π$의 소수점 이하 자리를 20개 이상 외우고 있는 친구들을 찾으면 동아리 부원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파이는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정해 활동한다. 기자가 방문한 6월의 주제는 ‘루빅스 큐브 90초 안에 맞추기’였다. 어떻게 하면 빠른 시간 안에 큐브를 맞출 수 있을지 서로 이야기하면서 학생들은 수학과 함께 ‘놀고’ 있었다. “큐브 맞추기 게임이 재미있어 보여서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복잡한 수학이 담겨 있어 신기했어요.” 2학년 이수현 학생의 말이다. 머리 아픈 계산과 골치 아픈 수학 문제 대신 즐겁고 유익한 수학 놀이에 관심을 가지면서 저절로 수학에 대한 흥미도 높아진다. 자체적으로 만든 수학 학습지에는 교과서에 없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전에 없던 수학동아리가 생겨난 덕분에 청주 중앙여중엔 이렇게 새로운 수학 바람이 불고 있었다.
수학동아 독자기자단이 5명이나 있는 파이는 동아리 활동에서 수학동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1학급 1수학동아’ 캠페인에 참가해, 동아리 부원뿐만 아니라 청주 중앙여중 학생이라면 누구든지 수학미디어실에 비치된 수학동아를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수학동아를 읽으면서 수학독서활동을 하기도 하고, 활동 주제를 정하기 어려울 땐 수학동아에서 힌트를 얻기도 했다.

만드는 수학, 함께 나누다
지난해 가장 인상 깊었던 활동이 무엇이었는지 묻자, ‘봉사활동’을 꼽는 학생이 가장 많았다. ‘수학동아리가 웬 봉사활동이야?’ 하는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봉사는 파이에게 한 해의 활동을 완성시켜 주는 꽃과 같다. 평소 만들기를 통해 느끼는 수학의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작년부터 ‘충북 수학축제’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충북 수학축제는 매년 여름방학에 충청북도 내 학교의 수학동아리 학생들이 모여 여는 수학 체험행사다.

지난해 충북 수학축제에서 파이는 지오데식 돔 만들기 부스를 운영했다. 지오데식 돔은 구면에 가깝게 내접하는 다면체로, 막대로 만든 반구 형태의 돔이다. 지오데식 돔을 만드는 과정은 일정한 규칙을 따라 막대를 연결하는 퍼즐 활동과 같다. 이를 위해 파이 부원들은 사전에 모여 지오데식 돔에 대해 탐구했다. 각진 돔부터 구면에 가까운 매끄러운 돔까지 단계별로 만들어 보면서 체험 행사에 가장 적합한 수준을 찾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쉬운 설명서와 친절한 지도 덕분에 어린 친구들도 재미있게 지오데식 돔을 만들 수 있었다. 입학하기도 전에 파이의 축제 부스에 다녀갔다는 1학년 박민정 학생이 입을 열었다. “선배들의 부스를 체험해 보고, 정말 수학이 재미있게 느껴졌어요. 직접 운영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하자마자 동아리에 가입했죠.”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박민정 학생은 올해 수학축제를 벌써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첫 참가인 만큼 어려움도 많았다. 축제를 며칠 앞두고선 밤 늦게 집에 가는 일이 당연했다. 노하우를 전수해 줄 선배들도 없어 막막했다. 게다가 그 동안 교내 동아리 활동이 많지 않았던 학교 분위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지원도 충분하지 않은 편이었다.
비용도 문제였다. 시중에서 7000원씩 하는 지오데식돔 키트를 활용하게 되면, 가진 예산으로는 80명에게만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최대한 많은 참가자들에게 지오데식 돔을 접하게 해 주고 싶었던 학생들은 좀 더 저렴한 빨대를 쓰기로 했다. 크기도 확 줄여 일반 빨대 하나를 둘로 잘라 손수 키트 250개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동아리 부원 7명이서 18,000개 정도의 빨대를 직접 잘라야 했다.
“사람들이 지오데식 돔을 구경할 뿐만 아니라, 직접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 보고 집에 가져갈 수 있게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각자 빨대를 수천 개씩 자르느라 다들 고생했죠.” 신현 학생이 말하자, 2학년 최윤정 학생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프고 힘들긴 했지만, 선배들이랑 어울리면서 축제를 잘 치러서 뿌듯했어요!” 이렇게 ‘함께 나누는 즐거운 수학’이야말로 파이가 가진 독특한 색깔이었다.


점점 더 커지는 파이
더 많은 사람들이 수학의 즐거움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신현 학생의 말처럼, 수학동아리 파이는 청주 중앙여중과 충북 학생들에게 수학 놀이를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다. 직접 만든 동아리인 만큼 잘 유지됐으면 한다며 3학년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아리를 이어나갈 후배들이 수학 나눔의 따뜻함을 기억한다면, 파이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청주 중앙여중의 대표 동아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