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나카는 전쟁 와중에 일본에서 교육받은 세대지만,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대수학자로 성장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82세의 나이인 지금도 강의와 연구를 하며 정렬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에게 ‘학문’은 어떤 의미일까?
전쟁의 와중에 수학에 사로잡힌 소년
히로나카는 1931년에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전쟁의 궁핍함 속에서 보냈다. 재혼한 그의 부모는 무려 열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일곱 번째가 히로나카 헤이스케였다.
중학교 시절에 피아노를 배워 몰입했지만, 연주에 큰 재능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등교해 학교의 피아노로 연습을 하곤 했다. 그때의 영향으로 평생 고전음악에 심취했던 그는 요즘도 연주회에 가는 것을 인생의 큰 즐거움으로 여긴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히로시마 대학의 수학교수가 그의 학교를 방문해 대중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이 강연을 듣고 수학에 열광적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니 히로나카가 평생을 걸쳐 좋아한 두 가지, 즉 수학과 음악은 모두 감수성 강한 중고등학교 시절에 싹튼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게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보여 주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히로나카는 재수를 해서 1949년 교토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교토대에는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가 있었는데, 그가 일본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으면서 전쟁의 폐허에서 신음하던 일본 국민들은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유카와 히데키는 만인의 영웅이 되었다.
그 영향으로 히로나카도 대학에 입학해서 물리학을 전공할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곧 본인의 수학적 재능을 깨닫고 수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당시 일본에 대수학 및 대수기하학을 도입하고 연구에 매진하던 아키주키 교수가 당대의 수학자 자리스키를 교토대학으로 초청한 일이 있었다. 히로나카는 자리스키에게 자신의 관심사를 열심히 설명하다가 그의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원에 입학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기회는 숨어 있다가 난데없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말처럼 말이다.
철학적 사유로 수학 난제를 풀다
물리학으로 시작해서 위대한 수학자의 반열에 오른 고다이라 구히니코는 1954년에 필즈상을 수상하면서 아시아인으로서 처음 필즈상을 받은 수학자가 되었다. 히로나카는 그 16년 후인 1970년에 아시아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필즈상을 수상했다.
히로나카가 필즈상을 수상한 주 업적은 ‘특이점 해소’에 관한 것이다. 그의 저서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에 본인이 쓴 내용을 보면, 모순과 문제로 가득한 세상도 그 너머에 있는 이상향의 투영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특이점’은 무엇이고, 형이상학은 또 왜 나오는지 생각해 보자. 붓으로 큰 종이에 글을 쓰는데 손을 떼지 않고 한 번 지난 곳을 다시 지나지도 않고, 또 급하게 방향을 바꾸지도 않으면서 쓰는 상상을 해보라. 부드러운 그림이 될지언정 의미를 담은 글씨가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붓글씨에서 붓이 두 번 지난 곳이나 급하게 방향을 바꾸느라 꺾인 곳을 ‘특이점’이라고 한다. 특이점은 부드러움이 깨지고 문제를 만드는 점인데, 그게 있어서 흥미로운 모양이 생기고 의미 전달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오른쪽 그림에서 바닥에 그려져 있는 2차원 곡선은 붓이 두 번 지난 점, 즉 특이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이 곡선의 한 쪽 끝을 잡고 위로 조금씩 올려나간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더 이상 특이점이 없는 부드러운 3차원 곡선이 만들어진다.
밑에 있는 2차원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상징하는데, 여기에 있는 곡선에는 모순과 문제 덩어리인 특이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세계를 나가서 한 차원 높은 3차원으로 가면, 특이점이 없는 부드러운 곡선이 있다. 그리고 이 곡선이 우리의 세계, 즉 2차원으로 투영된 것이 우리의 문제 덩어리인 특이곡선이라는 것이다. 번뇌도 완벽 그 자체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는데, 지극히 불교적인 우주관으로 볼 수도 있겠다.
히로나카는 이를 수학적으로 일반화 시켜서 이러한 특이점은 모두 차원을 높이면 사라지게 할 수 있음을 보였다. 흔히들 일컬어 <;특이점의 해소>;라고 불리는 이론이다. 이 증명으로 그는 일본인으로서 두 번째로 필즈상을 받았다.
"수학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나는 ‘난 바보니까’를 중얼거린다. 어차피 나는 바보니까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다.“ _히로나카 헤이스케의 저서 <;학문의 즐거움>; 중에서
학문의 즐거움을 미래 세대에게 전하다!
히로나카는 여러 강연이나 저술에서 스스로 평하기를, 평범한 지능을 가졌지만 학문의 즐거움에 대한 경험과 호기심을 가진 덕에 어느 정도의 성취를 했노라고 말한바 있다. 그의 뒤를 이어 일본에서 세 번째로 필즈상을 수상한 모리 시게후미를 평하면서는, 두말이 필요 없는 천재라고 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그가 사유와 즐거움의 대상으로 수학을 본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래서 그는 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자서전인 <;학문의 즐거움>;을 통해 수학을 통한 즐거움과 삶의 자세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필즈상을 탈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말한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고. 똑똑하지도 않다고. 그저 평범할 뿐이라고. 그 쟁쟁한 천재들 사이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도 성공했다며, 여러분도 할 수 있다고 잔잔하게 이야기를 펼친다.
그 자신의 인생을 바꾼 유년 시절의 경험 때문일까. 그는 교육에도 헌신적이어서 일본수리과학재단을 만들어 고등학생인 영재들에게 수학적 소양을 가르치고, 수학분야로 해외유학을 가는 학생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노력도 해왔다.
그가 필즈상을 수상한 곳은 1970년 세계수학자대회가 열린 프랑스 니스였다. 그때의 감격 때문인지, 그는 아시아에서 열린 최초의 세계수학자대회인 1990년 교토 세계수학자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전력을 다해 지원했다. 사재를 털어 대회에 참석하는 각국의 젊은 수학자들을 위해 여비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자신은 재능보다 더 많은 것을 평생 얻었으니 다음 세대에게 이를 돌려주어야 마땅하다는 그의 평소 생각 때문이었다.
히로나카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2008년부터 3년간 서울대에서 석좌교수로 지내면서 매년 3개월씩 보냈는데, 그의 강의를 듣고 대수기하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학생도 여럿이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대 석좌교수로 지내면서 받은 수입 대부분을 국내 학생들의 수학 교육을 위해 기부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일관된 관심과 애정을 가진 이 노수학자를 어떻게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