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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알제리 전쟁 등 전쟁 중에 수학자들을 봤다는 증언이 줄을 이었다. 으레 수학자라고 하면 정치, 사회, 경제에는 관심이 없고 연구실에 콕 틀어박혀 연구만 할 것 같은데, 어째서 전쟁터에 나간 것일까?
한국 전쟁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6월,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수학자들을 만나 보자.

서프라이즈 시크릿➊ 핵무기 반대에 앞장선 버트런드 러셀

1955년 7월 9일, 영국 런던 캑스턴홀. 수많은 기자들이 모인 앞에서 백발의 한 남자가 ‘핵무기 없는 세계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호소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후 1957년 저명한 과학자들은 이 남자와 뜻을 함께 한다며 ‘퍼그워시 회의’라는 국제기구를 창설했고, 이 기구는 199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세계 평화에 앞장선 백발의 이 남자는 누구일까?


84세의 나이에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자들 앞에 선 남자는 바로 영국의 천재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이다. 그는 제1차 세계전대전이 발발했을 때부터 줄곧 전쟁을 반대했다. 이 일로 그는 교수로 재직 중이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고당하고 징역형에 처해졌지만, 이후에도 꿋꿋이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던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를 지켜본 러셀은 핵무기의 위력에 놀라면서도, 곧 이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진 수소 폭탄이 발명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특히 이 무기가 인류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본격적으로 핵무기 반대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51년, 러셀이 그토록 원치 않던 수소 폭탄이 개발되고 만다. 그러자 러셀은 절친한 친구인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전세계 정치가들을 상대로 핵무기 반대 성명을 내기로 한다. 러셀은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해 병상에 있는 아인슈타인에게 보냈고, 이후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며 선언문을 완성했다.

이후 독일의 막스 보른, 프랑스의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일본의 유카와 히데키 등 저명한 과학자 9명이 서명에 동참하면서 핵무기 반대 운동에 힘을 보탰다. 이렇게 완성된 선언문이 1955년 발표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이다. 이를 계기로 퍼그워시회의가 창설됐고, 현재까지도 전세계 65개국 수천 명의 회원들이 매년 한두 차례 만나 세계평화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서프라이즈 시크릿➋ 일가족이 몰살당할 뻔한 로랑 슈와르츠

1960년 프랑스 파리에선 벌건 대낮에 아파트가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아파트에는 아무도 없어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아파트의 주인은 1950년 필즈상 수상자인 수학자 로랑 슈와르츠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당시 로랑 슈와르츠는 함수론에 엄청난 업적을 세운 천재 수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동조했지만 개인보다 국가를 위에 두는 전체주의나 특정 국가가 다른 나라를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에는 반대했다. 따라서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가 알제리를 통치하는 것에 강하게 비판했다. 프랑스는 1830년부터 1962년까지 132년간 알제리를 식민지로 지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벌인 내전에서 알제리대 수학도인 모리스 오댕이 프랑스 군대의 고문을 받던 중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슈와르츠는 진상 규명 위원회를 만들어 오댕에게 명예 학위를 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학위를 받아냈다. 뿐만 아니라 오댕 외에도 식민지 국가들의 학자들을 돕기 위한 지속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활동은 프랑스 극우단체에게 미움을 샀다. 당시 극우단체들은 제국주의를 외치며, 프랑스가 알제리를 통치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슈와르츠도 식민지 체제에 반대하고 알제리 지식인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극우단체에게 폭탄테러를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사건 이후에도 굴복하지 않고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슈와르츠의 이런 정치활동은 젊은 시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숨어 다녀야 했던 일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이에 슈와르츠도 어쩔 수 없이 가족들과 함께 남부 프랑스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슈와르츠는 이처럼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전쟁을 반대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서프라이즈 시크릿➌ 전쟁 중에 수학 세미나를 연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미군 폭격기가 베트남 하노이를 무차별 공격을 하던 1964년 8월. 하노이 근교의 숲에선 수학 세미나가 열렸다. 머리 위로 포가 날아다니고 숲이 불탔지만 수학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일일까?


독일 태생의 무국적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는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수시로 수학 세미나를 열었다. 근처에서 폭탄이 터지고 총소리가 나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자는 의미로 뜻을 함께 한 수학자들과 함께 수학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다른 수학자들이 가끔씩 주위를 살피고 폭격에 놀라 줄행랑을 칠 때도 그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에 머물면서 현지인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어울렸다.

그의 독특한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58년 그는 프랑스의 부유한 수학자인 장 디외도네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파리에 고등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1970년, 프랑스 국방부의 군사용 연구자금이 연구소 운영에 쓰였다는 이유로 자신이 설립한 이 기관에 다시는 발붙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1966년에 소련에서 필즈상 시상식을 한다는 이유로 시상식 뒤에 열린 축하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1988년에는 크라포르드상★의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1970년 이후 수학적인 업적을 내지 못한 자신이 상을 받는 것은 윤리적으로 맞지 않다며 정중히 거절하기도 했다. 이후 종적을 감춘 그는 지인들과도 연락을 모두 끊었으며, 현재 생사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로텐디크의 이런 특이한 행동은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일을 몸소 겪으며 평화주의적 정치 성향을 갖게 됐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유대인인 그의 가족은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보내졌는데, 아버지는 고문을 받던 도중 사망했고 어머니와 그는 열악한 수용소를 전전하다 극적으로 탈출해 숨어 살았다. 이후부터 그는 국가는 부강해지기 위해 전쟁을 일삼는다며 국적을 갖는 것조차 거부했다.

크라포르드상★은 1980년 인공신장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한 홀게르 크라포르드와 그의 부인인 안나 그레타 크라포르드가 기부한 기금으로 운영되는 상이다. 수학과 지구과학, 천문학 등 노벨상 수상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분야에서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 스웨덴 왕립 과학원에서 매년 상을 준다.

서프라이즈 시크릿➍ 필즈상 시상식에 가지 못한 수학자

1970년 9월 1일, 프랑스 니스. 수학자들의 축제 세계수학자대회 개막식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의 주인공인 필즈상 수상자가 나타나지 않자 시상식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부가 수상자를 억류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러시아의 수학자 세르게이 노비코프는 정치적인 이유로 필즈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최초의 수학자다. 당시 러시아는 ‘소련’이라는 세계 최대의 사회주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을 탄압했다. 그런데 노비코프는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감금된 지식인들을 돕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었다. 소련 당국은 노비코프를 처벌하기 위해 감시하고 있었고, 마침 그가 필즈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그를 처벌하는 대신 필즈상의 영광을 빼앗는 걸 선택한 것이다.

러시아 수학자 중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필즈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이 또 있다. 1978년 필즈상 수상자인 그리고리 마르굴리스다. 당시 세계수학자대회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헬싱키는 당시 소련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반감의 대상이었다. 서로의 영토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유럽의 평화와 관련된 ‘헬싱키 조약’이 맺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소련은 이 조약에 대해 반발했고, 3년 뒤 헬싱키에서 세계수학자대회가 열리자 자국의 수학자를 보내지 않았다.

서프라이즈 시크릿➎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한 에르되시

1950년대 초, 미국에서는 조셉 매카시에 의해 일명 매카시즘이 판을 치고 있었다. 매카시즘이란, 확실한 이유 없이 국가 반역을 고발하는 행위다. 매카시는 특히 공산주의를 싫어해서, 공산주의와 조금이라도 관련되면 빨갱이 냄새가 난다고 하여 고발했다. 그런데 그가 고발한 사람 중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저명한 수학자도 있다. 과연 누굴까?


1952년, 헝가리의 수학자 폴 에르되시는 네덜란드에서 열린 수학 세미나를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입국이 쉽지 않았다. 공항 직원들은 에르되시를 다른 방으로 불러서 어디서 사는지, 누구를 만났는지를 물었다. 결국 에르되시는 미국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사실 에르되시는 당시 FBI의 조사 선상에 있었다. 그 이유는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에르되시는 세 명의 수학자와 함께 수학 이야기를 나누며 미국 롱아일랜드의 군무선 송신소를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출입금지 표지판을 보지 못하고 송신소 깊숙이 들어와 버리고 만다. 결국 경찰에 연행된 에르되시는 조사 결과 해를 끼치기 위해 침입한 것은 아니라고 판명됐지만, 이후 FBI의 요주 인물로 등록된다.

이보다 앞서 에르되시는 중국에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중국인 수학자와 수학 세미나를 하기도 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FBI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여러 이유를 더해 공식적으로 추방한 것이다.

사실 에르되시는 청소년 시절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면서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군에 잡혀 포로생활을 했고, 가족은 고문을 겪었다. 그도 모국인 헝가리에서 유대인 차별정책을 벌여 고국을 떠나야만 했다.

고국과 제2의 터전이었던 미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해서일까? 에르되시는 평생을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대학들을 전전하며 방랑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많은 수학자들과 교류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준 전쟁이 그의 연구에는 오히려 도움이 됐으니, 그야말로 기구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평화를 사랑한 수학자들의 업적

전쟁의 한가운데서 평화를 외치고,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학자들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 연구할 시간마저 부족했던 수학자들이지만, 그 업적은 누구보다 더 뛰어났다. 평화를 외친 수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알아보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
러셀의 가장 큰 업적은 기호나 언어 분석을 통해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는 분석철학을 창시한 것이다. 수학의 기초 원리를 연구하며 집합론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밝힌 ‘러셀의 패러독스’를 발견한 것도 큰 공으로 꼽힌다. 또 1+1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랑 슈와르츠(1915~2002)
슈와르츠는 연속된 모든 함수는 미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1950년 필즈상을 받았다. 그는 코흐 곡선처럼 특이한 모양의 함수도 미분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특히 프랑스의 젊은 수학자들의 모임인 부르바키의 회원으로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현대 수학을 공부해 석사 이상의 대학원생들이 보는 교재를 만들었다.

알렉산더 그로텐디크(1928~)
그로텐디크는 20세기 수학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힌다. 그의 연구로 현대수학의 새로운 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는 ‘스킴 이론’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통해 정수론과 대수기하학의 문제를 통합된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연구로 그는 1966년 필즈상을 수상했다.
 

세르게이 노비코프(1938~)
노비코프의 부모님은 유명한 수학자였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위상수학에 관심이 많았다. 덕분에 위상수학의 한 분야인 코보디즘 이론에서 공을 세워 1970년 필즈상을 받았다. 1960년에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이론물리학의 매력에 빠져, 물리학과 수학의 접점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리 마르굴리스(1946~)
마르굴리스의 주요 업적은 ‘군론’에 대한 것이다. 특히 현대 수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리군’에서 중요한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주어진 하나의 입자는 공간에서 같은 에너지를 갖는 곡면의 모든 부분을 골고루 돌아다닌다는 ‘에르고딕 이론’으로 업적을 세워 1978년 필즈상을 받았다.

폴 에르되시(1913~1996)
에르되시는 수백 명의 수학자들과 공동으로 연구하며 조합론과 그래프 이론, 수론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그래프 이론을 도입해 아주 단순하고 시각적으로 푸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에르되시는 헝가리의 수학자 엔드레 세메레디와 함께 40년간 미해결 난제였던 소수정리를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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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6월 수학동아 정보

  • 조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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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의 노벨상, 필즈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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