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읊은 ‘중국인의 나머지 정리’
이 한시는 인생과 어우러진 적벽의 봄과 가을 풍경을 그린 시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한시 형태를 띤 ‘구결’이라는 중국의 수학 문제다. 과거 중국인들은 수학 문제를 쉽게 외우기 위해 시의 형태로 만들곤 했다.
이 시에서 첫 세 구절은 각각 3, 5, 7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70, 21, 15가 나오고, 네 번째 구절에는 105가 나온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70 : 5와 7의 공배수 중에서 3으로 나누면 나머지가 1인 가장 작은 수
21 : 3과 7의 공배수 중에서 5로 나누면 나머지가 1인 가장 작은 수
15 : 3과 5의 공배수 중에서 7로 나누면 나머지가 1인 가장 작은 수
105 : 3, 5, 7의 최소 공배수
이를 이용해 문제를 풀면 다음과 같다.
70×1+21×2+15×3=70+42+45=157
여기서 157이 답인 것 같지만, 이 당시에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수 중 가장 작은 값을 구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157에서 3, 5,7의 최소공배수인 105를 뺀, 52가 이 문제의 답이다. 이 문제처럼 구결은 외우기는 좋으나, 실제 이와 같은 설명이 없으면 풀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이 문제는 중국 수학 고전인 <;산경십서>; 중 하나인 <;손자산경>;에 실린 ‘손자의 문제’를 변형한 것이다. 손자의 문제는 해와 달, 행성의 주기를 이용해 달력 때 계산에 쓰였다. 이후 손자의 문제와 해법은 서양으로 전해져 ‘중국인의 나머지 정리’라고 불렸다.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1734년에 러시아의 한 잡지에 이 정리를 소개하기도 했다.
실용적인 중국의 수학
중국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수학이 발전했다. 기원전 14세기 것으로 생각되는 갑골문자에서 10진법이 발견됐는데, 이는 유럽보다 2300여
년 앞선 것이었다. 서양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쓰기 시작한 음수의 개념도 기원전 2세기부터 사용했다.
중국의 수학은 실용적이었다. 농사를 짓고,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수학이 발전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좋은 달력이 필요했다. 때에 따라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둬야 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달력을 만들기 위해 수학 연구를 장려했다. 기원전 2세기에 나온 수학책 <;구장산술>;에는 농업, 상업, 공업, 측량, 방정식의 해나 직각삼각형의 성질 등에 관한 246개의 문제가 실려 있다.
고대 중국의 수학 실력은 매우 뛰어나 오래 전부터 원주율의 값을 아주 정확히 계산했을 정도였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수학자 조충지는 원주율이 366/113이라고 계산했다. 원주율 값의 정확도로 수학이 발달한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데, 서양에서 이 정도로 정확하게 계산하게 된 것은 이후 1000년이 지나서부터였다.
중국에서는 특히 대수학이 크게 발전했다. 구장산술에서 이미 1차, 2차방정식은 물론 초보적 3차방정식도 다뤘다. 13세기에 진구소라는 수학자는 고차방정식의 해법을 찾아 10차 방정식까지 다루기도 했다. 그가 고차방정식의 해를 구한 방법은 19세기 영국의 수학자 호너가 고안한 ‘호너법’과 똑같았다. 이 당시에는 대수학의 특징 중 하나인 미지수를 ‘元’이라는 부호로 표시했는데, 이 방법을 ‘천원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대수학에 비해 기하학은 발전하지 못했다. 역법 연구에서 행성 운동의 규칙을 찾은 점은 서양과 같지만, 천체의 구조에 대해 관심이 적어 기하학에 대해 별로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파의 자존심 건 수학 대결 ‘산가쿠’
반지름의 길이가가 36인 원과 반지름이 9인 원 사이에 끼여 있는, 가장 작은 원의 반지름을 구하여라. 단 세 개의 원은 서로 접해 있으며, 한 직선에 접해 있다.
이 문제는 일본의 일본 에도시대(1603~1868년)에 유행한 산가쿠 문제 중 하나다. 이 당시 일본에서는 학파를 이뤄 문제를 내거나 풀며 수학 실력을 겨뤘다. 누군가 문제를 출제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여 문제를 풀고, 그 해법을 나무판에 새겨 신사나 사찰에 걸어 두었다.
이렇게 걸린 나무판을 ‘산가쿠’라고 하는데, 이는 자신이 속한 학파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실용적인 이유로 수학을 공부했다면, 일본은 수학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기 위해 공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각 학파에는 수학적 능력과 관심에 따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수학을 즐겼다.
위에 제시된 문제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이용하면 손쉽게 풀 수 있다. 각 원의 중점을 이은 뒤, 중점 사이의 거리를 구해나가면 된다. 이를 일반화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식을 얻을 수 있다.
에도시대에 꽃핀 일본의 전통수학 ‘화산’
일본의 수학은 에도 시대 때까지 별다른 발전이 없어 독자적인 수학 전통이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이 삼국시대에 중국의 수학을 받아들인 뒤 오랜 연구를 쌓아 조선 시대에 독자적인 면모를 갖추었듯이, 일본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가져간 수학책을 토대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한 수학사학자가 ‘한국에서 가져간 수학책을 이해하는 데만 100년이 걸렸다’고 말했을 만큼 조선의 수학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다음부터는 매우 빠르게 수학이 성장했다.
일본은 에도(지금의 도쿄)와 오사카 지방을 중심으로 수학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는데, 자신들의 수학을 ‘화산’이라고 이름 붙였다. 1622년 일본 최초의 수학책인 <;할산서>;가 출판된 뒤, 200년 동안 1300여 종의 수학책이 출판됐다. 양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행렬이나 함수의 극한 개념, 부정방정식의 해법과 같은 어려운 내용도 다뤘다.
앞서 얘기했듯이 일본은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수학 연구의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중국이 실용성을 중시했던 것과 다르게 ‘무용의 용’을 주장할 만큼 수학 자체를 연구했다. 다른 용도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수학 자체를 위한 연구를 했고, 결과적으로 지적 유희를 위한 도구로 수학적 방법이 등장했다. 그리고 수학책을 어려운 한자가 아닌 쉬운 일본어로 써서 사람들이 쉽게 수학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전통 수학은 기묘하고 어려운 문제를 잘 풀어냈으면서도, 그 해법이나 아이디어를 이론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서양 수학과 달리 기본철학이나 수학관이 부족한 채 연구됐기 때문에 하나의 학문 체계로 정립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서양 수학이 들어온 뒤 일본의 전통 수학은 사라졌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릴라바티>;
벌 무리의 15은 카탄바의 꽃에, 13은 시리도라의 꽃에, 그들의 차의 3배의 벌은 협죽도의 꽃에 날아갔다. 남겨진 한 마리의 벌은 케타키의 향기와 쟈스민의 향기에 갈팡질팡 하다가 두 사람의 연인에게 말을 시킬 것 같은 남자의 고독처럼 허공에서 방황하고 있도다.
이 때, 벌 무리는 전체 몇 마리인가?
이 시는 <;릴라바티>;라는 인도의 수학책에 실린 문제다. 1차 방정식 문제로 벌 무리의 수를 $x$라 놓으면 다음과 같은 식을 세워 손쉽게 풀 수 있다.
릴라바티에는 재미난 사연이 있다. 릴라바티는 수학자 바스카라가 그의 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수학책이다. 점성술사이기도 했던 바스카라는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좋은 날과 시간을 예측해 정했다. 그리고 시간을 알려 주는 장치를 만들었는데, 물이 가득한 통에 작은 구멍이 뚫린 사발을 놓은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멍에 물이 들어와 사발이 점차 가라앉는 원리로, 결혼시간이 되면 사발이 완전히 잠기도록 만들어 두었다.
그런데 릴라바티가 통 속을 들여다보다 그녀의 옷에 달린 구슬 하나가 떨어져 사발의 구멍을 메웠다. 구멍이 막힌 사발은 가라앉지 않았고, 릴라바티는 결혼 시각을 놓쳐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수학 공부를 좋아했던 릴라바티는 결국 결혼 대신 평생 수학을 공부했고, 바스카라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수학책의 이름을 지었다.
서양수학의 받힘돌이 된 인도수학
인도 수학자들은 일찍부터 십진법, 계산법, 방정식, 대수학, 기하학, 삼각법 등을 연구해 수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기원전 3000년 전에 폐허가 된 모헨조다로에서 수학의 흔적이 발견될 정도로, 인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수학을 연구했다. 벽돌을 4:2:1의 비율로 구울 정도로 비율에 대해 알았고, 건축물의 높이를 측정하는 측량도구도 사용했다.
우리가 쓰고 있는 0부터 9까지의 숫자와 십진법은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기원은 인도에 있다. 기원전 6세기부터 8세기 사이에 숫자와 십진법이 완성됐는데, 나중에 아라비아로 전해져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것과 비슷한 숫자가 됐다. 이를 아라비아의 알 콰리즈미가 서양으로 전해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수학은 주로 실용적인 이유, 특히 상업이나 무역에서 사용하기 위해 연구됐기 때문에 대수학 같이 수량에 관계되는 수학이 발달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10진법도 인도에서 계산을 쉽게 하기 위해 발명했으며, 인도의 무역업자 사이에서 700년 무렵부터 널리 사용됐다.
삼각함수도 인도에서 발달했다. 원시적인 삼각함수 개념은 그리스 수학에서도 발견되지만, 현대적 삼각법은 인도에서 시작됐다. 400년에 처음 등장한 인도의 삼각함수는 유럽에 전해져 수학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
인도의 수학 책이 중국어로 번역돼 중국에 전해지기도 했다. 큰 수와 작은 수의 이름에서 인도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0}^{128}$은 무량수라고 불리는데, 이는 인도의 불경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하지만 인도 수학은 계속 발전하지 못했다.엄격한 신분제도로 인해 승려나 왕족만이 수학을 연구할 수 있어 발전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수학을 시로 표현한 것도 발전을 저해한 요소였다. 시로는 수학적인 내용을 표현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시아 최고의 수학자는?!
서양 수학에 가우스, 오일러, 라이프니츠 등과 같이 위대한 수학자가 많은 것처럼 아시아에도 수학을 발전시킨 위대한 수학자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1000년이 넘도록 사용된 수학책을 만든 중국의 유휘, 일본의 ‘뉴턴’이라고 불린 세키, 0과 무한의 관계를 최초로 이해한 인도의 바스카라 등이 아시아의 대표 수학자로 손꼽힌다.
유휘(생년미상)
고대 중국의 삼국시대에 활동한 수학자이다. 위나라 사람으로 <;해도산경>;, <;구장산술주>; 등의 수학책을 썼다. 구장산술주에서 유휘는 원주율을 계산하기 위해 현재의 무한등비급수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리스 시대의 아르키메데스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원주율을 계산할 수 있었다. 조충지도 유휘의 방법을 발전시켜 원주율을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휘의 책은 1000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수학을 대표하는 서적이었다.
세키 코와(1642~1708년)
세키 코와는 일본 수학사에서 단연 제 1의 수학자로 손꼽히며 일본 전통 수학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이다. 세키는 행렬식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연립방정식의 풀이로 확장했는데, 이는 유럽의 연구보다 빨랐다. 세키는 극한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하는 원이나 구의 계산법, 원주, 원의 넓이, 호의 길이, 구의 부피와 겉넓이를 계산했다. 점차 다양한 곡선 도형에도 적용됐는데, 이는 미적분의 개념과 비슷했다. 이 때문에 세키에게 일본의 ‘뉴턴’이란 별칭이 붙었다.
바스카라(1114~1193년)
12세기의 인도 수학자로, 천문 관측기관의 책임자로 일하며 부정방정식과 원주율 계산에 몰두했다. 바스카라는 음과 음의 곱은 양이고, 음과 양의 곱은 음이라는 것을 내다봤다. 또한 3/0을 무한이라 말해, 0으로 나누는 것의 의미를 이해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근대 대수학처럼 미지수를 나타내기 위해 문자를 써서 1·2차부정방정식을 풀었다. 384변의 정다각형까지 조사해 π=3.141666이라는 정확한 근삿값을 얻기도 했다. 행성의 위치에 대한 천문관측과 지리학 연구에 쓰이는 수학적 기법과 천문장비 등에 대해 연구했다.
중국의 주판이나 인도의 숫자를 비롯한 아시아의 수학과 도구가 서양으로 전해져 수학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그동안 서양 수학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아시아의 수학사를 살펴보는 것은 수학을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