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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의 나라


제 12 화 다시 만난 연월기

지난 줄거리 - 지오 일행은 힘들여 완성한 연월기로 시간여행을 떠났으나 실패했고, 궁궐에서 쫓겨났다. 지오는 공주가 준 지도를 받고 연월기가 버려진 곳을 찾아 나서는데…….

산은 골이 깊고 험했다. 먹빛 같은 어둠이 이미 산등성이를 점령한 터라 눈을 뜨고도 앞을 분간하기어려웠다. 약초를 캐며 산길에 익숙해진 지오조차 한 걸음을 내딛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지오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달빛뿐이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달빛은 등불처럼 지오의 걸음걸음을 비추었다.

갸르르릉! 야응야응! 쿠억쿠억! 산등성이로 가까워질수록 산짐승들의 울부짖음도 사나워졌다. 그 소리에 등골이 오싹거릴 법도 한데, 지오는 좀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지오의 걸음에 놀란 벌레 떼가 화르르 흩어졌다. 지오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분명히 여기 어딘데?”

지오가 걸음을 멈추고 공주의 편지를 달빛에 비춰 볼 때였다. 갑자기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화르르 흩어지며 날리는 나뭇잎들…. 순간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몸을 누이며 앞이 트였다. 그 사이로 하얗게 모습을 드러낸 무엇! 연월기였다.

연월기의 모습은 처참했다. 뚜껑과 쇠침이 제각각 떨어져 뒹굴고, 몸통조차 여기저기 파인 채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썩은 나뭇잎들과 눅신한 흙에 뒤덮인 연월기는 영락없는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연월기를 마주한 지오의 눈빛도 처참했다. 공주의 편지를 받아들었을 땐 지오도 한 가닥 희망의 끈을 잡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셈이 잘못된 거야. 연월기를 찾아서 잘못된 곳을 고치고 다시 시작하면 돼.’

하지만 막상 망가져 버린 연월기를 보자,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지오가 쓰러지듯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부서져서 휑하게 뚫려버린 연월기의 몸통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지오는 무릎걸음으로 반짝이는 빛을 따라 연월기의 몸통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지오의 입에서 신음 같은 탄성이 흘렀다. 지오가 본 것은 인절미 보따리였다. 비단 보따리가 달빛을받아 반짝였던 것이다. 보따리 옆엔 연월기록도 보였다. 연월기록은 지오가 연월기의 계획도와 관련 자료를 기록한 책이다. 책을 본 순간 지난 일들이 그림처럼 지나갔다. 지오의 볼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흑흑흑! 모두 끝났어…… 다 끝난 거야.”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지오는 밤새 꺼이꺼이 울었다. 그칠 것 같지 않던 지오의 울음이 잦아든 것은 새벽녘이었다. 울다 지친 지오는 보따리를 품에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지오가 잠들자, 바람도잠들었다. 사납게 울어대던 산짐승 소리도 거짓말처럼 멎었다. 모든 것이 잠든 세상에 달빛만 부시게쏟아지고 있었다.

“지오야! 지오야! 어서 일어나.”

따스한 손길이 지오의 몸을 흔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잘게.”

지오는 반쯤 깨어버린 잠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몸을 똬리 틀 듯 옹크렸다. 하지만 손길은 지오를그냥 두지 않았다. 지오의 엉덩이를 한 차례 툭툭 두드린 손길이 이번엔 옆구리를 간질거렸다.

“이래도 안 일어날 거야, 응?”

옆구리를 따라 올라온 간지럼이 겨드랑이를 지나 콧등까지 닿았다.“까르르!” 지오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간지럼을 떨치듯 지오는 벌떡 깨어나며 소리쳤다.

“그만해, 누나! 간지럽단 말이야.”

‘아차!’ 순간 지오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라니?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정말 눈앞엔 누나가 버티고 있었다.

“지오야, 어젯밤에 얘기했잖아. 누나는 오늘 김초시 댁에 일하러 간다고 말이야.”

누나는 낡은 무명 저고리를 입으며 나설 준비를 했다. 지오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우리 집이잖아. 누나! 누나도 그대로야. 여긴…… 여긴!’

지오의 가슴이 콩 볶듯 뛰기 시작했다.

‘그날이야. 누나가 김초시네 잔칫집으로 가는 날. 2년 전 그날! 내가 과거로 온 거야. 누나를 말려야 해.’

지오는 마음이 바빠졌다. 어떻게든 누나가 김초시네로 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가지 마. 누나, 가지 마.”

누나의 치맛자락을 잡으며 지오는 악을 썼다.

“지오야, 너 인절미 먹고 싶다고 했잖아. 김초시 댁에 가면 인절미도 가져올 수 있어. 아이코! 이러다가 늦겠네.”

영문을 모르는 누나는 지오의 손을 떼어내며 급히 방문을 나섰다.

‘안 돼! 어서 누나를 붙잡아야 해.’지오도 다급히 방을 뛰쳐나갔다.

“누나. 가지 마. 가면 안 돼.”

맨발로 뛰어나오는 지오의 모습에 누나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혼자 있기 싫어서 그래?”

다정히 물어오는 누나의 목소리가 봄 햇볕처럼 따스했다.

“응. 누나하고 같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가지 마, 응?”

지오는 누나를 와락 안았다. 누나의 품에서 개나리 향기가 났다.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향기였다.

“그럼 인절미도 못 먹는걸.”

누나가 지오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인절미 같은 건 안 먹어도 돼.”

“너 어제도 굶었잖아. 배 안 고파?”

“안 고파. 하나도 안 고파.”

지오는 절대 놓지 않으려는 듯 누나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꼬르륵!”

누나의 배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지오는 누나도 며칠째 쌀 한 톨 삼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 배고픈 건 알았지만, 누나의 굶주림을 미처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

‘누나도 얼마나 배가 고플까? 인절미 생각이 얼마나 간절할까?’

지오가 공주의 인절미 보따리를 생각해낸 건 그때였다.

“누나, 잠깐만 기다려봐.”

지오는 황급히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역시! 지오가 누웠던 자리에 비단보따리가 있었다. 지오는 보따리를 냉큼 집어 들고 나왔다.

“누나! 배고프지? 이거 먹어. 인절미야.”

지오는 보따리를 풀더니 누나 앞으로 쑥 내밀었다. 콩고물이 포실포실 덮인 인절미를 본 누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어디서 났니?”

“응, 공주님이….”

‘아차!’ 하며 지오는 말꼬리를 돌렸다.

“어제 달포 아저씨가 주고 갔어. 누나하고 나눠 먹으랬어.”

“정말?”

그제야 누나는 입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누나, 어서 먹어봐. 쫄깃쫄깃하고 정말 맛있어.”

지오가 인절미 한 조각을 내밀자, 누나가 조그만 입을 살그미 벌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소리쳤다.
 

누나와 지오
 

“참! 물부터 마시고 먹자. 인절미는 급히 먹으면 체하거든. 물 가져올 테니 기다려.”

누나는 걸음을 서두르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후유! 다행이야. 누나가 김초시네로 가는 걸 막았어.’

지오가 안도의 숨을 내쉴 때였다. 누나가 들어간 부엌문이 갑자기 뿌옇게 흐려지는 듯했다. 순간 지오는 제 몸이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누나! 누나!”

지오는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오의 몸은 이미 누나가 있는 집을 떠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힘이 지오를 당겨왔다. 다음 순간, 지오는 제 몸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느꼈다. 아니, 이상한 공간속으로 빠져든 느낌이었다. 돌아가는 것은 이상한 공간이었다. 공간은 칠흑처럼 어두웠지만, 별빛처럼 영롱한 빛이 끊임없이 빛나고 있었다. 어쩜 자신은 별빛을 흩뿌려놓았다는 은하수 속에 빠진 걸지도 모른다고 지오는 생각했다.

영롱한 빛은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색을 띠면서 빛났다. 그리고 빛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그림!아니 그건 또 다른 세상이었다. 지오는 제 몸이 순간순간 다른 세상을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세상에서 지오는 함성을 지르며 몰려드는 농민들을 본 듯했다. 다른 세상에선 전쟁터가 보이기도했다. 요란한 포성이 울리고 군복을 입은 군사들이 뒤엉켜 싸우는 모습에 지오는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 다음 세상은 평화로웠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사라진 풍경은 낯설었지만, 거대한 건물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지오의 흥미를 끌었다. 이상한 복장의 사람들이었지만 활기차 보였다.갓이나 관모를 쓰지 않은 것으로 봐서 양반이나 상놈 같은 신분이 사라진 듯 보였다. 누구는 가마를 타며 거드름을 피우지만 누군 무거운 가마를 메고 가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대신 네 개의 바퀴가 달린 이상한 가마가 달리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뭘까?’

지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네 개의 바퀴로 달리는 가마가 “빵! 빵!”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지오는 눈을 번쩍 떴다.

지오는 어리둥절했다. 햇살 아래 드러난 곳은 연월기 몸통 속이었기 때문이다. 주위는 어젯밤에 잠든 모습 그대로였다.

“꿈이었나 봐.”

고개를 떨어뜨리던 지오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인절미 보따리가 없어. 정말 누나에게 인절미를 준 거야. 꿈이 아니었던 거야.”

지오는 황급히 연월기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밤새 올라왔던 산길을 되돌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린 걸까? 저만치 달포 아저씨네 대장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복 아저씨! 장도사 아저씨! 연월기를 찾았어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며칠 뒤, 지오는 천복, 장도사와 함께 나룻배에 올랐다. 황산사가 유배된 강화도로 가는 배였다.

“연월기는 달포 아저씨네 대장간에서 수리하면 되고요, 설계도는 황산사님을 만나서 다시 고치면 돼요. 황산사님이라면 어디가 잘못된 건지 알아내실 거예요.”

“근데 황산사는 멀쩡할까? 우리야 곤장만 맞았지만, 황산사는 모진 고문도 당했다던데….”

“끄떡없어. 앓아누웠다가도 연월기 얘기만 들으면 벌떡 일어날 사람이 바로 황산사잖여.”

“히힛! 맞아요. 황산사님이라면 그럴 거예요.”

세 사람의 웃음소리는 강물을 따라 흘렀다.
 
지오는 문득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물이 마치 시간처럼 보였다. 유유한 물살은 흘러가는 시간처럼 출렁출렁 나룻배를 나르고 있었다.

그동안 ‘산학뎐 - 지오의 나라’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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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4월 수학동아 정보

  • 이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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