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새하얀 관악산 산자락에 자리 잡은 서울대 과학영재교육센터. 흰 눈 사이로 파릇파릇 피어나는 보리싹이 아름답듯, 흰 눈을 헤치고 찾아온 꿈나무 한명 한명이 소중하다. 천하의 영재를 키우는 기쁨을 누리는 센터는 어떤 비법을 가지고 있을까?
영재가 책 읽는 이유
‘스티브 잡스 이야기’ ‘걸리버 여행기’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센터에서 만난 학생들의 가방에서 발견한 책 제목이다. 수학 심화반 학생들이 맞는지 다시 물어봤지만 맞다고 한다. 영재교육을 받으러 온 학생이 이런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이 책이 수업에 쓰이는 것은 아닐 테고. 서울대 과학영재교육센터에는 교육을 마치기까지 꼭 읽어야 하는 책 목록이 있다. 과학영재를 위한 교육기관에서 책을 읽게 한다는 사실이 무척 새롭다.
이곳 학생들은 매달 한 권의 책을 읽고 5, 8, 11월에는 한 권을 더 읽는다. 책을 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독후감도 쓰지만 책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활동이 덧붙는다. 소설을 읽고 나서는 주인공에게 편지를 쓰거나, 주인공을 가상으로 인터뷰한다. 시를 읽었다면 시나 노래 가사를 직접 써 본다. 자기계발서를 읽고서는 계획표를 짜고 미래 설계를 하기도 한다. 이 같은 독서 프로그램은 서울대 과학영재교육센터의 자랑거리로 자리 잡았다.
센터는 2008년부터 독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과학영재교육 프로그램은 학생의 지적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상대적으로 사회적·정서적 능력을 지도하는 프로그램은 활발하지 않았다.
영재가 지적 능력을 창의적으로 발휘하려면 집중력과 자신감, 의사소통 능력과 동기 부여 등의 사회적·정서적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또한 인격이 형성되는 청소년 시기에는 실력뿐 아니라 훌륭한 인품을 고루 갖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영재의 정서적 능력을 키우기 위해 서울대 과학영재교육센터가 개발한 것이 바로 독서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수학 분과부터 시작했다. 수학사나 생활 속 수학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으면서 수학이 실제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피게 했다. 수학자들의 수고와 도전 정신을 통해 수학의 매력과 수학자의 철학도 배울 수 있었다. 학생들은 문제 풀이 너머에 있는 수학의 넓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도서 목록은 크게 수학·과학 관련 도서와 그 외 도서로 나뉜다. 수학·과학 관련 도서는 5~6명의 교수와 수학 교사로 이뤄진 세미나에서 학생들의 수학과 과학 수준에 맞춰 권장 목록을 만들었다. 수학·과학 외 도서는 서울대에서 발표한 100권의 권장도서 목록과 도서 관련 주요 기관이나 언론에서 선정한 목록을 참고해 선정했다. 여기에는 소설과 같은 청소년 문학, 시·예술 분야, 사회교양과 자기계발 분야의 책이 포함돼 있다.
센터가 독서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할 때는 학부모의 불평이 많았다. “과학영재로 키워달라고 보냈더니 책이나 읽게 한다”던가 “편지를 쓰기에 누구에게 쓰냐고 물었더니 소설 주인공에게 쓴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독서 프로그램을 하는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면서 점차 동의를 얻어냈다. 이제는 과학영재에게 필요한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는 기회였다며 감사하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현재 이 독서 프로그램의 효과는 다른 영재교육원에도 알려져 저마다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책의 능력을 수치로 나타내
서울대 과학영재교육센터는 독서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도서 목록을 추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각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 지식, 창의성, 종합적 능력을 수치화해서 학생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책을 고르기 쉽도록 만들었다. 한눈에 책을 살필 수 있도록 개발한 도서 분류 체계에는 책을 읽고 난 뒤 할수 있는 활동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한 예로 센터는 수학 관련 도서로 선정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서울 어디서나 영재 발굴
현재 센터에는 서울 곳곳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있다. 한때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교육청에서 온 학생이 80%를 넘은 적이 있었다. 해당 지역의 학생은 이전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센터 입시 과정에서 영재성을 잘 발휘했다. 하지만 잠재력이 있어도 지역의 영향으로 훈련을 받지 못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래서 서울대 과학영재교육센터는 2010년부터 각 분과마다 서울시 교육청 산하의 11개 지역교육청에서 적어도 1명씩 선발하게 했다. 지역교육청에서 추천한 학생들 중에서 서류 심사로 1명씩을 먼저 선발한 뒤, 나머지 인원은 경쟁을 통해 선발하는 방식이다. 이 제도는 어디서나 영재를 발굴할 수 있으며, 훈련을 통해 영재성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증명한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미니 인터뷰
수학 꿈나무를 키우는 최영기 소장
수학동아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서울대 과학영재교육센터 최영기 소장입니다.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이기도 하지요. 저는 평생 수학자로 살아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수학의 미래를 위해 후배 수학자를 키우는 수학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어요. 영재센터의 소장까지 맡으면서 교육에 쏟는 노력과 시간이 더 늘었습니다.
제 연구실에는 수학책과 교육학책이 반반씩 꽂혀 있답니다.
우리나라 수학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어요. 우리나라 중고등학생의 수학실력은 세계 최상위권이지만 수학에 대한 선호도는 바닥권으로 나타나거든요. 대학에서도 수학 과목은 가능하면 피하려는 학생이 많아요. 하지만 외국에는 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는 학생이 많아요. 경제를 전공하고 수학을 더 공부한 학생 덕분에 외국에서 수학을 활용한 금융이 크게 발전하는 것이 좋은 예지요.
수학은 자연 현상을 이해하는 학문일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훈련시켜 삶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학문입니다. 문제를 잘 푸는 게 수학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저희 센터는 기본적인 교육을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닮고자 하는 모델을 하나씩 세울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책이나 유명한 학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모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재에게 창의력과 실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춰서 다른 사람과 잘 어우러져 지낼 때 자신의 능력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영재가 되길 응원합니다.
1998년 설립된 서울대 과학영재교육센터는 현재 교육과학기술부의 지원 속에 200명이 넘는 학생이 함께 교육받고 있다.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정보 6개의 분과가 있으며, 각 분과별로 심화과정과 사사과정이 있다. 지난해까지 중학교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하는 기초과정이 있었지만 올해부터는 중학교 2, 3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심화과정과 사사과정으로 특화했다. 분과별로 교육을 진행하지만 20% 정도의 전체교육과 각 분과의 교육을 골고루 받는 순환교육도 포함된다. 연간 수업시간은 100시간 안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