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하늘구경
연월기의 몸통을 만드는 일이 시작됐다. 밤낮으로 야장들이 쇠를 담금질하고 벼림질하는 소리가 천지관을 울렸다.
연월기의 설계도를 봤을 때, 지오는 소문으로만 듣던 첨성대를 떠올렸다. 연월기의 몸통은 삼국시대 신라에서 만들었다는 첨성대의 모양을 본뜬 듯했다.
“첨성대는 하늘의 기운을 고스란히 담은 천문대란다. 첨성대의 구조를 보면 일 년의 날수와 별의 수, 절기의 수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지. 연월기를 설계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좋은 본보기가 없을 거야.”
황산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지오는 연월기의 몸통 구조가 첨성대를 닮은 이유를 알았다. 설계도 속의 연월기는 첨성대 모양의 몸통 위에 둥그런 뚜껑이 덮였고, 그 위에는 날카롭고 긴 쇠침을 달고 있었다.
“이건 뭐예요?”
지오는 설계도에서 쇠침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요건 말이다, 해와 달의 정기를 모아 줄 도구지. 연월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어.”
“아하! 쇠침으로 해와 달의 정기를 모아서 연월기 몸통을 움직이게 하려고요?”
그제야 연월기의 설계도를 이해한 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문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그럼 해와 달의 정기는 어떻게 쇠침으로 모으나요?”
이번엔 황산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방법을 지금 장도사가 연구 중이지. 곧 찾아 낼 게다.”
순간 지오는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자신만만하던 황산사님인데 저렇게 곤혹스런 표정을 짓다니……. 연월기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나 봐. 에이! 괜스레 황산사님 기분만 망치게 했어.’
지오가 후회의 한숨을 몰아쉬는 참이었다.
“걱정하지 마쇼. 그 방법은 이 장도사가 꼭 찾아 낼 테니. 내가 괜히 장도산가, 도사 짓을 하니까 그리 불리는 게지.”
장도사가 배를 쑥 내민 자세로 뒷짐을 지고는 자신만만하게 걸어왔다. 장도사를 본 지오의 얼굴은 함지박이 됐다. 장도사라면 황산사의 기분을 바꿔 놓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렇죠? 장도사 아저씨라면 틀림없이 그 방법을 찾아 낼 거예요.”
지오는 다부지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장도사를 추켜세웠다. 황산사도 기분이 풀린 듯 빙그레 웃었다.
“지오야, 혹시 연금술이란 말을 들어 봤느냐?”
지오의 말에 기분이 들뜬 장도사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려줄 듯 다정하게 물었다.
“연금술요? 그게 뭐예요?”
“중국과 서양에서 쓰는 비법인데, 쇠붙이가 아닌 것도 쇠붙이로 만드는 방법이라지. 연금술을 사용하면 돌도 금으로 만들 수 있다더구나.”
사실 지오는 연월치인이 된 후로 장도사와 황산사로부터 재미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주로 산학과 과학에 관한 것인데, 중국이나 서양에 대한 이야기는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도 연금술만큼 신비한 이야기는 없었다.
“참말이에요? 정말 돌로 금을 만들 수 있어요?”
“그야 나도 모르지.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니까.”
한껏 부풀었던 지오의 호기심이 장도사의 한마디에 돼지 오줌보에서 바람이 빠지듯 푹 꺼져버렸다.
“소문으로는 벌써 연금술을 쓰는 연금술사들이 생겨났다는 소문도 있더군.”
장도사는 꺼진 지오의 호기심을 다시 부풀리듯 말했다.
‘연금술사?’
지오의 눈동자가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연금술이 가능하다면, 시간을 넘나드는 기구인 연월기를 만드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지오는 누나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지오의 마음을 알아챈 듯 장도사는 바로 지오의 팔을 끌었다.
“지오야, 내가 오늘은 특별한 곳을 구경시켜 주마.”
“구경요? 무슨 구경인데요?”
“하늘 구경!”
장도사가 지오를 데려간 곳은 궁궐의 호젓한 장소였다. 그곳엔 거대한 규모의 돌계단이 놓여 있었는데, 계단 위엔 쇠로 만든 기구가 세워져 있었다. 밤이라서 또렷이 보이진 않았지만, 별빛과 달빛에 드러난 기구는 마치 날아오르는 용 같았다.
“저게 간의다.”
“아! 간의! 지난밤에 황산사님께 들었어요. 궁궐 안엔 하늘을 살피는 기구가 있다고.”
지오는 지난밤, 천체의 위치를 각도로 측정하는 기구인 간의에 대해 설명해 주던 황산사의 말을 떠올렸다.
“황산사님 말로는 궁궐 안엔 천체시계도 있다고 하셨는데…….”
지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장도사가 계단을 앞서 오르며 지오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올라오렴.”
간의대 계단에 오르자, 하늘이 눈앞에 맞닿은 느낌이었다. 달빛과 별빛이 금세라도 손에 잡힐 듯 다정했다.
“저것이 천체시계다. 별자리 움직임에 맞게 돌아가는 시계지.”
장도사가 가리킨 곳엔 천체시계인 혼천의(세종 15년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천체시계)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 곁엔 혼상(천구의, 세종 19년에만들어짐)도 보였다. 둥근 공 모양의 혼상엔 밤하늘을 본떠 놓은 듯, 별자리의 위치가 잘 표시돼 있었다. 기구들을 보고 있으려니, 별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하늘을 땅에 옮겨 놓은 것 같아요.”
무언가에 취한 듯 지오가 말하자, 장도사가 장난스레 말했다.
“요 녀석! 달빛에 취했구나. 별빛에도 취했어.”
“달빛과 별빛에도 취하나요? 술에 취하는 것처럼요?”
“물론이지. 달빛과 별빛에 취한 탓에 내가 평생 하늘만 바라보는 천문학장이가 된 거 아니겠냐. 지오야, 이왕이면 너는 시간에 취해라.”
“에이! 시간에 어떻게 취해요?”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시간에 취하는 것 아니겠냐. 미래를 꿈꾸는 것도 시간에 취하는 것이고.”
장도사의 말에 지오는 왠지 뜨끔했다. 과거로 돌아갈 궁리만 하는 자신의 마음을 장도사가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저씨, 근데 정말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긴 한 거예요?”
“물론이지.”
장도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더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오도 잰걸음으로 장도사를 따랐다.
지오에게서 연월기의 정체는 마치 어둠에 숨은 달빛 같았다. 지오는 연월기에 대해 알듯하다가도 이내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어둠에 숨은 달빛을 찾듯 지오와 장도사가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거기, 누구냐?”
난데없는 목소리가 어둠 사이로 들려왔다. 소리는 간의대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저만치서 호롱불도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코! 공주님이 오셨네.”
장도사가 황급히 옷매무시를 고치더니,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공주님 납시었사옵니까?”
다가온 호롱불 아래로 공주의 모습이 드러났다. 단아하게 땋은 머리에 반달 같은 눈, 동그란 코! 지오는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누나!’
공주는 누나를 꼭 빼닮은 모습이었다. 나이도 어림잡아 지오보다 두세 살은 많아 보였다.
“뭘 하느냐? 혜명 공주님께 어서 인사를 올리지 않고.”
장도사가 황급히 지오의 머리통을 손으로 눌렀다. 지오는 뭔가에 홀린 듯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혜명 공주 곁엔 호롱불을 든 궁녀 한 명과 호위 군사로 보이는 병사 둘이 서 있었다.
“장도사로군.”
공주는 새치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혹 간의대에서 장도사와 마주친 모양이었다.
“오늘 밤은 잠이 오질 않아서 하늘 구경이나 하려고 왔지. 밤하늘 구경하기에 여기만 한 곳이 없잖아. 장도사도 잠이 오질 않았나 보군.”
장도사를 바라보는 공주의 눈빛이 당찼다.
‘우리 누나는 목소리도 나긋나긋 정다웠는데…….’
누나와는 영판 다른 목소리에 지오는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했다.
‘그래! 역시 누나가 아니야.’
공주의 눈빛이 지오에게로 향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이 아이가 지오라는 아인가? 셈 천재라는?”
“예, 공주님.”
공주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지오를 보았다.
“자세히 좀 보자꾸나.”
공주는 지오의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순간, 공주의 몸에서 풍겨오는 향기가 지오의 코를 간질거렸다. 봄날 피어나는 진달래 향기 같기도 하고, 봄나물 같기도 한 향기…….
‘누나의 향기야!’
뒷산에서 산나물을 캐고 온 날이면 누나에게서는 달보드레한 꽃향기가 났다. 지오는 그 향기가 참 좋았다. 지오가 향기에 취한 듯 공주에게 한 발 다가갈 때였다.
“너, 내일 아침에 내게 오너라. 눈 뜨자마자 곧장 달려와야 한다. 알겠느냐?”
지오의 귀로 또랑또랑한 공주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