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이 통과하기 어렵다’는 뜻의 뱃길 ‘난행량(難行梁)’. 이곳은 예로부터 파도가 험하고 거칠어 지나가던 배들이 자주 난파했어요. 선원들에게는 꿈에도 다가가고 싶지 않은 이곳은 사실 고고학자들의 보물창고랍니다! 난행량이 있는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반도 앞바다의 섬, 마도로 가 볼까요?
그물로 귀한 청자를 건지다!
2007년, 마도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심선택 씨의 그물에 이상한 것이 걸렸어요. 묵직한 그물에는 물고기가 아니라 청자 파편이 들어 있었죠. 이를 수상하게 여긴 심선택 씨가 도자기 조각을 태안군청과 문화재청에 신고하자, 놀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고고학자들이 마도 앞바다로 달려왔어요. 도자기 조각은 청자를 싣고 가던 배가 바닷속에 가라앉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는 국토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일찍부터 바다를 통한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폭풍을 만나거나 조류가 험한 곳에서는 많은 배가 난파되기도 했지요. 특히 서해에 가라앉은 난파선 위로는 갯벌의 고운 진흙이 쌓이면서 유물이 고스란히 보존됐어요. 난파선이 타임캡슐이 돼버린 셈이죠.
고고학자들은 난파선을 찾기 위해 청자가 발견된 해역 주변을 샅샅이 뒤졌어요. 음파로 물속 지형을 탐색하는 음향측심기 등의 장비를 사용하고, 때로는 고고학자가 직접 잠수하기도 했지요. 4년에 걸친 조사 끝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고고학자들은 마도 앞바다에서 세 척의 배를 찾아냈어요. 이 배들에는 발견된 순서대로 마도 1호, 2호, 3호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이렇게 바다에 침몰한 고선박, 호수에 잠긴 도시 등 물속에 남겨진 인류의 흔적을 ‘수중문화재’라고 해요. 수중문화재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을 ‘수중고고학’이라 하죠. 우리나라의 수중고고학은 1976년, 전라남도 신안군 앞바다에 가라앉은 난파선을 발굴하면서 시작되었어요. 초기에는 기술과 장비가 부족해 해군 잠수사의 도움을 빌려야 했지만, 지금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아시아 최대의 수중문화재 발굴선 ‘누리안호’가 있어서 걱정이 없답니다. 2012년에 취항한 누리안호에는 20여 명의 조사원이 20일간 체류하면서 수중 발굴조사를 할 수 있어요.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선박도 인양할 수 있지요.
목간이 알려준 고려 시대 택배의 목적지는?
고고학자들은 수중 발굴을 통해 마도 1, 2, 3호선에서 다양한 유물을 발굴했어요. 이 배들에서는 기존의 난파선에서 발견되는 도자기나 동전은 물론, 특이한 유물도 있었어요. 바로 대나무 상자에 담긴 동물의 뼈들이었지요. 고고학자들은 고민에 빠졌어요. 과연 이 배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언제일까? 발견된 유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비밀은 화물과 함께 발견된 ‘목간’ 덕분에 풀렸어요. 목간은 글을 적은 나뭇조각이에요. 종이가 없던 시대에 문서로 쓰였지요. 마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목간에는 배에 실린 화물을 보낸 사람과 지역, 받는 사람, 화물의 종류와 수량이 적혀 있었어요. 고고학자들은 목간에 적힌 이름과 관직명을 토대로 마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배들이 13세기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음을 알아냈어요. 이 배들은 ‘조세 운반선’으로, 남부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물자를 수도로 옮기다 마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이죠.
예를 들어,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목간에 따르면 마도 3호선은 전라남도 여수 등 남부에서 출발하여 당시 고려의 임시수도였던 강화도로 향하던 중이었어요. 화물을 받을 사람은 무신 정권기 최고 권력자인 김준과 그의 측근들이었죠. 실제로 ‘우삼별초 도령에게 상어를 상자에 담아 보낸다’고 적힌 목간과 함께, 곱상어 척추뼈가 가득 들어있는 대나무 상자가 발견되었답니다. 말하자면 목간은 나무로 된 택배 송장인 셈이죠!
마도선에서 발견된 물건들이 휘황찬란한 금은보화는 아니에요. 하지만 이 세 척의 배는 팔백 년 동안 물속에서 옛날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유물을 품고 있었지요. 마도 3호선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고려 사람들이 상어를 잡았고, 우삼별초 도령이 택배 사고로 상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어요? 그런 점에서, 마도선은 고고학자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진귀한 보물선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