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과학동아 친구들은 4월 하면 무슨 날이 떠오르나요? 4월 5일 식목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요? 식목일도 무척 중요한 기념일이 지만 의미 있는 날이 하나 더 있답니다. 바로 우리나라 과학이 귀빠진 날인 4월 21일 ‘과학의날’ 입니다.
과학의날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다윈은 죽어서 과학의 날을 만든다?’
우리나라 과학의날은 처음에는 4월 19일이었다. 일제 시대였던 1934년 과학기술대중화운동가였던 김용관 선생이 과학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받던 진화학자 찰스 다윈이 죽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과학의날로 제정했던 것. 하지만 일본 총독부의 탄압으로 흐지부지되다가 1968년에서야 지금처럼 과학의날로 자리잡았다. 4월 21일로 바뀐 이유는 우리나라 과학행정을 담당하는 ‘과학기술부’ 가 1967년 4월 21일에 처음 생겼기 때문이다.
과학의날, 위대한
우리 과학자들을 만나 보자!
이번 과학의날에는 특별한 손님들을 만나 보기로 해요. 바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에 오른 19인의 우리나라과학자들 이지요. 아인슈타인이나 뉴턴 같은 외국의 위대한 과학자 못지 않게 훌륭한 과학자들이 우리나라에도 많답니다.
화약무기의 선구자 최무선(1325〜1395)
고려 말의 장군이자 화약 발명가. 화약연구기관인 ‘화통도감’ 을 설치해 화약과 화포 개발에 힘썼다. 1380년 왜구들이 지금의 군산인 진포에 침입했을 때 직접 군사를 이끌고 화포를 이용해 적을 물리쳤다. 그가 개발한 화약 기술은 조선시대로 고스란히 이어져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의 다 빈치 이천(1376〜1451)
세종대왕 때의 눈부신 과학 발전은 장영실뿐만 아니라 이천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우수한 장군이면서 도 뛰어난 관찰력과 기술력을 갖고 있던 그는 화약무기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인쇄술의 결정체인 금속활자‘갑인자’를 개발하였으며 각종 천문기구, 악기, 측정기계 등의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 역사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기술가. 이천과 함께 세종대왕 때의 과학 발전을 이끌었다. 일일이 꼽기 힘들 정도로 많은 발명품의 제작에 참여했다. 특히 그가 만든 물시계인‘자격루’는 현대에도 복원이 힘들만큼 정확성을 인정받고 있다. 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노비였던 신분의 한계를 극복했던 점도 주목할만 하다.
조선 천문역법의 대가 이순지(1406〜1465)
조선 초기의 천문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다. 당시 조선은 중국에서 만든 천문역법을 썼는데, 우리나라와는 위도와 경도가 틀려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정하기 힘들었다. 이런 점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대왕은 이순지에게 우리나라만의 역법서를 만들 것을 명했고 그는 세밀한 관측과 연구를 통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역법서이자 달력이라 할 수 있는 ‘칠정산’ 을 만들었다.
동양 최고의 한의학자 허준(1539〜1615)
조선 중기의 한의학자. 1613년 총 25권에 이르는 동양 최고의 의서 ‘동의보감’ 을 완성한다. 오랜 세월의 연구와 치료 경험, 의학에 대한 열정으로 만든 동의보감은 조선과 중국의 모든 의학 전통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에까지 한의학의 처방전으로 쓰이고 있다. 특히 백성들이 가정에서 쉽게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이용한 처방을 적어놓음으로써 의학의 대중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
실학의 선구자 홍대용(1731〜1783)
세종대왕 때 이룩한 독자적인 과학 발전은 조선 후기에 들어 그 빛을 잃고 만다. 바로 중국과 유교에 대한 지나친 숭배가 그 원인이었는데 홍대용은 당시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과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하려고 한 대표적인 실학자다. 그가 집필한‘의산문답’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땅은 움직인다는 지동설과 무한우주론이 담겨 있다.
별의 밝기를 표현한 천문학자 서호수(1736〜1799)
지구의 밝기는 다른 별에 비교해 어떨까? 이런 궁금증에서 시작해 별들의 밝기를 등급별로 표현한 조선 후기의 천문학자가 서호수다. 1등성은 지구의 68배, 2등성은 지구의 28배…, 그는 이런 식으로 정확한 밝기의 등급을 ‘상위고’ 라는 책에 기록했는데 이것은 서양에 비해 약 50년이나 앞선 높은 수준이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1864)
지도가 없으면 얼마나 불편할까? 하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하더라도 정확한 지도가 없었다. 또 일반 백성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이 지도였다. 김정호는‘ 팔도도’, ‘동국지도’ 등의 이전 지도를 연구하고 실제 지형과 비교해서 1861년‘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짐으로써 모든 백성들이 쉽게 정확한 지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1896〜1963)
천문학과 기상학의 선구자인 이원철은 1926년 미국의 미시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얻은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다.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학자들도 알지 못했던 독수리자리 에타 별의 시선속도가 변한다는 것을 밝혀 세계 천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일제 지배에 있던 국민들은 에타 별을 그의 이름을 딴 ‘원철성’ 으로 부르면서 자랑스러워했다.
한국 농업의 선구자 우장춘(1898〜1959)
씨 없는 수박의 개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우장춘은 ‘종의 합성’ 이론을 실험적으로 증명해 유명해진 농업학자다. 1935년에 배추를 통해 종이 서로 합성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고 이것은 다양한 종자의 재배를 가능하게 해 농업생산력을 크게 높였다. 씨 없는 수박은 1943년 일본의 히토시가 먼저 생산했으나 이것은 우장춘의 종의 합성 이론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학자 이태규(1902〜2005)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1930년대 이태규는 일본의 교토대학에서 이학박사가 되고 그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우리민족의 과학영웅이 된 화학자다. 평생을 화학반응을 촉진하는 촉매 연구에 바쳤으며 미국에서도 독자적인 화학이론인‘리-아리링’이론을 내놓는 등 한국 과학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했다.
공업을 일으킨 화학공학자 안동혁(1906〜생존)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은 중요한 산업기술을 쉽사리 한국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안동혁은 일본 유학을 통해 스스로 고급산업기술을 익혀 화학공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해방 후 가난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은 중화학공업이라고 판단하고 1950년대 상공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자금, 에너지. 비료로 대표되는 ‘3F 산업정책’ 을 이끌며 한국 공업발전의 기반을 쌓았다.
동양 최초로 안전유리를 만든 김동일(1908〜1998)
유리는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줬지만 부서지거나 깨질 때 사람을 다치게 하는 단점이 있었다. 김동일은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응용화학을 공부한 후 동양에서 처음으로 깨져도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 안전유리를 발명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1911〜1995)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장기려는 의사가 된 동기가 ‘평생 동안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는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라고 밝힐 만큼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펼쳤다. 의학적으로도 1959년 국내 최초로 간암 환자를 간 절제수술로 치료하는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우리 산을 푸르게 만든 현신규(1912〜1986)
195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산은 온통 뻘겋게 맨살을 드러낸 모습이었다. 산림학자인 현신규가 35년 간의 오랜 연구 끝에 ‘리기테다소나무’ 와 ‘현사시나무’ 등 추위에 강하고 병충해에 강한 종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그대로였을 것이다. 현신규는 새로운 종의 개발뿐만 아니라 우리 산을 푸르게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 위대한 산림학자다.
KIST 초대 원장 최형섭(1920〜2004)
뛰어난 금속공학자이자 한국과학기술개발의 기반을 닦은 과학행정가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이끌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초대원장이자 7년 동안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대전 대덕연구단지 건설을 계획하는 등 우리나라에 맞는 과학발전모델을 제시하였다.
화학계의 휴머니스트 김순경(1920〜2003)
한국을 대표하는 화학물리학자 김순경은 미국에서 연구활동을 하며 무려 72편의 논문을 발표해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수리물리학, 기체의 흡착이론, 화학반응 속도론 등 세계에서 주목한 뛰어난 이론을 완성했으며 과학이 인류에게 유익하게 쓰이도록 노력한 한국과학계의 휴머니스트 였다.
비운의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1935〜1977)
미국의 프린스턴연구소장이었던 오펜하이머가‘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고 이휘소도 있었지만 아인슈타인보 다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주목받던 천재물리학자가 이휘소였다. 입자물리학의 당대 최고학자였던 그는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1977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수많은 과학자 들은 이휘소가 살아 있었다면 한국 최초로 노벨과학상을 받았을 거라 이구 동성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뛰어난 물리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