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를 향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오디세이는 기원전 8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 호메로스가 지은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원작으로 합니다. 그런데 호메로스는 약 1만 2110행에 이르는 이 서사시를 글로 쓴 게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대서사시를 노래하듯 읊어주던 시인이었죠.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3000년 전 음유시인은 오디세우스의 10년 귀환기를 어떻게 외울 수 있었을까요?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온 뒤, 기자에게 하나의 습관이 생겼습니다. 바로 책상을 치거나 손바닥을 때리며 단어로 말하는 겁니다. “쾅쾅쾅쾅 출근!” “쾅쾅쾅쾅 점심!” 이렇게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곧바로 누굴 따라 하는지 알 겁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입니다. 영화의 시작,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자리를 비운 이타카성의 식당에는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러 몰려온 이들이 가득 차 있는데 이들에게 바다 너머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음유시인은 악기를 연주하며 시나 노래를 들려주던 사람입니다. 고대와 중근세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읽지 못했기에 이야기는 말과 노래의 형태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이 기억해야 했던 구비문학의 방대함입니다. 글로 정리한 오디세이아는 총 1만 2110행에 이르는 대서사시입니다. 쉬지 않고 보통 속도로 낭독하면 약 18시간이 걸립니다. 더군다나 음유시인은 오디세이아만 외웠던 게 아닙니다. 오디세이아의 전편 격에 해당하는, 트로이 전쟁 중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다룬 서사시인 일리아스는 무려 1만 6000행입니다. 호메로스는 어떻게 이 서사시들을 다 외운 채로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었을까요? 첫 번째 힌트는 시 자체에 녹아있는 ‘리듬’입니다.

놀란 감독이 래퍼를 캐스팅한 이유
재미있는 사실은 영화에서 음유시인 역을 맡은 배우가 현재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미국의 래퍼 트래비스 스캇이라는 점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래퍼를 음유시인 역으로 캐스팅한 이유에 관해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온 오디세이아와 랩의 유사한 점을 표현하고 싶어 래퍼를 캐스팅했다”고 밝혔습니다.
오디세이아는 헥사메트로스(장단단격 6각운)로 이루어진 서사시입니다. 생소하게 들리지만, 헥사메트로스란 ‘쿵(장)-짝(단)-짝(단)’ 구조가 6번 반복되는 리듬입니다. 헥사메트로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서사시에서 사용된 가장 대표적인 구조입니다. 즉 긴 음절을 ‘쿵’, 짧은 음절을 ‘짝’으로 표현했을 때 ‘쿵짝짝 쿵짝짝 쿵짝짝 쿵짝짝 쿵짝짝 쿵짝짝’ 리듬으로 시행 하나가 구성됩니다. 다만 짧은 음절 두 개(짝짝)가 긴 음절 하나(쿵)을 대체할 수 있어 ‘쿵쿵 쿵짝짝 쿵짝짝 쿵짝짝 쿵짝짝 쿵쿵’ 리듬이 만들어지기도 하죠. 일정하게 반복되는 운율, 혹은 라임 속에서 말을 풀어나가는 모습에서 현대의 래퍼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쾅쾅쾅쾅) a face(얼굴, 트로이의 헬렌), (쾅쾅쾅쾅) a fleet(함대, 트로이로 간 그리스 함대), (쾅쾅쾅쾅) a war(전쟁, 트로이 전쟁), (쾅쾅쾅쾅) a man(남자, 오디세우스), (쾅쾅쾅쾅) a trick(묘책, 트로이 목마)” 영화에서 식탁에 지팡이를 내려치며 만든 박자와 하나의 단어와 단어로 이어지는 운율은 영어인데다 랩 음악에 가깝지만, 실제 구전시도 리듬과 박자로 동력을 얻어 앞으로 나갔다는 겁니다.
하지만 리듬만으로는 수만 줄의 서사시를 외우긴 어려웠을 겁니다. 약 100년 전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구전으로 창작됐음을 밝혔던 미국의 고전학자, 밀먼 패리는 음유시인이 완성된 시 전체를 암기하지는 못했으며, 운율에 맞춰 ‘공식’을 기억하고 이를 조합해 노래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죠. 이때 공식이란 운율 조건에 맞춰 표현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단어의 묶음입니다. 예를 들어 ‘장밋빛 손가락의 새벽’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여러 구절에서 앞부분은 달라도 끝은 ‘장밋빛 손가락의 새벽’이 반복됩니다. 음유시인을 단순히 새벽이 밝았다는 이야길 하고자 하더라도, 시행 후반부의 자리가 비어있다면 그 공간과 리듬을 정확히 채워주는 익숙한 표현을 꺼내 썼던 거죠.
유시인이 사용한 비법, 경험과 감각 기억
서사시의 내적 구조에 리듬과 운율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오디세이아를 외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여기에 여러 기억법이 더해집니다. 패리의 제자이자 고대 서사시 연구의 기반을 다졌던 미국 고전학자, 알버트 로드는 ‘장면’이 기억의 핵심이라 말했죠. 장면이란 식사를 준비하는 장면, 손님을 맞이하는 장면 등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건입니다. 음유시인이 장면의 진행 방식을 배우고 외웠다는 그의 이론은 1960년대 이후 구전 서사시 연구의 정설이었죠.
음유시인이 서사시를 외울 수 있었던 이유
“음유시인이 전형적인 장면을 배웠다는 주장에 오래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런 행동은 굳이 배울 필요가 없었어요. 일상생활을 통해 익힌 익숙한 행동이니까요.” e메일 인터뷰로 만난 엘리자베스 민친 호주국립대 고전학 명예교수가 말했습니다. 민친 교수는 호메로스의 구전시와 기억의 역할에 대해 연구해 온 고전학자입니다. 그는 구전시를 익히기 위해 음유시인들이 사용했을 기억법에 인지심리학 이론을 활용했습니다.
첫 번째는 ‘스크립트’ 개념입니다. “인간이 특정 상황에서 예상되는 사건의 순서를 ‘스크립트(대본)’라는 인지적 개념으로 머릿속에 저장한다는 이론을 접했는데 이게 구전시 속 전형적인 장면의 본질을 설명한다고 생각했죠.” 그가 말하는 스크립트 이론은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로저 생크와 로버트 애벌슨이 1977년 발표한 것입니다. 우리가 식당에 간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문을 열고-자리에 앉고-메뉴를 보고-주문한 뒤-음식이 나오면 식사하는 광경이 자연스레 그려집니다. 일상에서 비슷한 경험을 반복하면서 ‘식당 스크립트’를 머릿속에 일화 기억(에피소드 기억)으로 구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민친 교수는 음유시인의 식사 경험이 그리스 영웅의 식사 장면을 외우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누구와 누가 식사를 했는지, 그 식사 자리에서 중요한 사건 혹은 대화가 무엇인지만 이해하면 전체적인 흐름을 다 일부러 외울 필요는 없다는 거죠.
구전시 암기에 ‘공간 기억’이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공간 기억이란 주변 공간의 구조, 장소의 위치, 방향 등을 기억하고 인식하는 인지 능력입니다. 구전시에는 방대한 이름이나 물건의 목록이 나열된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음유시인이 본인의 기억력을 자랑하고 관객의 감탄을 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한 걸로 추정되는데, 민친 교수는 이걸 끝까지 노래하려면 공간 기억이 필요했다고 봤습니다. 대표적 예시가 일리아스에 있는 함선 목록입니다.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그리스 연합군이 어디서 왔고, 누가 지휘했고, 몇 척의 배를 끌고 왔는지를 길게 나열한 대목이죠. 민친 교수는 “190개 가까운 지명을 외우기 위해서 그리스 지도를 머릿속으로 여행하면서 기억을 순서대로 꺼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시각 및 청각 기억도 음유시인의 기억에 도움을 줬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일리아스에서는 아가멤논이 트로이군을 공격하는 장면입니다. ‘아가멤논은 사자처럼 공격했다’는 시행 다음 사자가 사슴의 보금자리를 습격해 새끼들을 잡아 찢고, 어미 사슴은 공포에 질려 떨며 도망가는 장면을 몇 행에 걸쳐 펼쳐놓습니다. 그런 뒤 다시 아가멤논과 도망가는 트로이군의 이야기로 돌아오죠. 민친 교수는 이런 비유를 기억해 낼 때 “시각 및 청각 기억이 보조적인 역할을 해 공연에서 실시간으로 완성됐다”고 설명합니다. 이 장면을 사자가 으르렁대는 소리, 어미 사슴이 공포에 질린 표정과 함께 상상해 본다면 쉽게 이해될 겁니다.
뇌를 벗어나 상호작용에 만든 기억
중요한 점은 음유시인이 매 공연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란 겁니다. “음유시인은 관객의 반응을 살피며 어떤 부분에서는 이야기를 길게 늘리고, 어떤 부분은 생략하며 즉석에서 시를 구성했을 거예요.” 최근 인지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구전시의 특색에 맞춰 음유시인의 기억을 연구합니다.
행화적 인지(Enactive cognition)가 대표적입니다. 행화적 인지란 인간의 인지가 뇌 안에서만 일어나는 수동적인 정보 처리가 아니라, 신체를 가진 유기체가 환경과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하고 행동하는 과정 자체에서 형성된다는 인지과학 이론입니다. 음유시인이 대장장이의 망치질이나 방패 속 인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 자체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시를 지어냈다는 뜻입니다. 기억이 뇌뿐만 아니라 몸, 주변 환경, 사물, 행동 등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패러다임입니다. 요나스 그레틀라인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그리스문학 석좌교수 등 고전학자들은 이 이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음유시인의 공연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억과 구전시 창작을 연구해온 고전학자의 눈에 트래비스 스캇이 지팡이를 내리치며 리듬을 만들고, 짧은 단어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놀란이 영화에서 음유시인을 묘사한 방식은 오디세이의 이야기가 ‘역사’가 아닌 ‘이야기’라는 사실을 영리하게 인식한 연출이었습니다. 리듬과 반복되는 신체 움직임 등은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에게 필요한 단어를 찾아내는 데 도움을 줬을 거예요. 또 제가 3000년 전의 음유시인의 상상했을 때도 그는 권위 있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을 것 같습니다. 관객이 자신의 이야기를 따라올 수 있도록 상당히 느린 속도로 노래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