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마지막을 새로운 충격으로 몰고 가는 사이버스페이스. 언뜻 이 공간은 젠더(性)를 따질 수 없는 중성으로 여겨지지만, 주민 대부분이 남성이란 점을 보면 여전히 남성 우월주의가 판치고 있다.
상상(想像)은 끝없이 자유로운가.
PC통신, 인터넷 등 네트워크와 네크워크 사이에서 디지털 형태로 존재하는 가상공간(사이버스페이스)은 또 하나의 사회로 우리 곁에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이에 따라 등장한 신조어도 상당수다. 네트워크 범죄, 온라인 미팅, 가상 기업, 전자 상거래, 사이버 섹스, 온라인 카지노….
인터넷이나 PC통신 등은 그저 현기증 일도록 빠르게 발전해온 여러 컴퓨터 기술 중의 하나로 치부하기엔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비중이 너무 커져 있다. 요즘들어 현실을 닮은 것 같지만 현실과는 어딘가 다른 사이버스페이스의 성격을 두고 수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이같은 가상공간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사이버스페이스도 분명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현실에서 해결되지 못한 제반 문제가 이곳에서는 모두 풀릴 것이라는 진단은 지나친 낙관주의다. 특히 남녀불평등, 성폭력, 여성의 상품화 등은 가상공간이라고 해서 ‘핑크빛’ 만은 아니다. 도리어 성폭력은 으슥한 뒷골목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PC와 모뎀, 키보드로 접속해 들어가는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전쟁, 인터넷, 그리고 남성
모든 사회현상에는 그 근원이 있는 법이다. 컴퓨터와 통신의 발달로 창조된 온라인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코 앞으로 다가온 21세기를 앞두고 저물어가는 20세기.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끔찍했던 전쟁이 있으며, 또한 정보시대란 말로 대변되는 컴퓨터가 화려하게 탄생한 시대다.
전쟁과 컴퓨터. 문득 떠올리면 매우 다른 성격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는 이 둘이 ‘한통속’임을 증언한다. 1996년 올해는 컴퓨터 탄생 50주년이다. 지난 46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ENIAC)이 미국 국방부의 의뢰를 받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모클리와 그의 제자 에커트에 의해 제작됐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미국이 세계적으로 국방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대포와 미사일의 탄도 계산을 빨리 하기 위한 컴퓨터를 만든 것. 전쟁이 컴퓨터를 낳은 셈이다. 이에 앞서 1940년 독일 과학자들이 히틀러에게 컴퓨터 설계를 제안했다. 히틀러는 전쟁에 곧 이길 것이라고 자만한 나머지 이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에니악이 진공관으로 만들어진 제 1세대 컴퓨터로 기록되면서 새로운 컴퓨터들이 앞다퉈 개발됐다. 컴퓨터는 점차 널리 쓰이게 됐고 곧 통신 분야로 불붙어 데이터통신망의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컴퓨터에 이어 인터넷도 그 뿌리를 전쟁에 두고 있다. 지난 69년 세계가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되는 냉전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미국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의 지원을 받아 대학과 연구소에서 인터넷의 전신 ‘알파넷’(ARPAnet)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통신망은 먼 곳에 떨어진 컴퓨터끼리 정보를 교환하거나 공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됐다.
당시 미국은 국방용 컴퓨터를 한 군데 모아 놓았기 때문에 적의 핵폭탄 공격을 받으면 국방 기능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될 지 모른다고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국방부는 이런 최악의 위험을 막으려면 여러 곳의 컴퓨터를 연결해 정보를 나눠 보관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알파넷은 이후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과학재단(NSF)이 주축이 돼 학술망으로 발전했고, 지금의 가장 거대한 사이버스페이스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家父長制)는 그 옛날 전쟁과 함께 공생해왔다. 전쟁에서 아웃사이더인 여성은 남성의 뒤치닥거리나 하는 존재로 여겨져왔다. 가부장제가 전쟁과 함께 자라난 것처럼 전쟁은 컴퓨터를 낳았다. 자연스럽게 가부장제는 사이버스페이스에도 전이돼 남성 위주의 사회로 발전되기 시작됐다.
인터넷을 비롯한 네트워크 초기는 주로 남성들이 활동해왔다. 따라서 여성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통신망은 남자 위주의 세상으로 다져졌고 정보인프라조차 남자가 좋아하는 ‘성적 환상’으로 꾸며져 갔다.
온라인 사회도 남녀 불평등
“I am looking for a hot & sexy woman(뜨겁고 섹시한 여성을 찾고 있습니다).”
“폰섹스 원합니다.”
“wanted:intercourse partner(섹스상대 구함)”
국내 유명 PC통신망의 한 게시판에 오른 글들이다. 쉽게 엿볼 수 있듯이 현실보다 더욱 강렬하고 대담하게 남성은 자신의 욕망을 가상공간에서 표현하고 있다. 인터넷 채팅 IRC(Internet Relay Chat)에 접속하면 반 이상의 대화방이 ‘사이버 섹스’를 제목으로 내걸고 있다. 노골적인 채팅 성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영어공부를 위해 인터넷을 배웠다고 하는 L씨(무역회사 여직원)는 이에 대해 “인터넷은 온통 섹스에만 매달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넷에서 여자란 존재는 ‘사냥감’정도로 여겨질 뿐”이라고 토로한다. 그녀는 “외국친구를 사귀려고 IRC에 들어가보면 늘 섹스를 즐기자고 치근덕거리는 남자가 우굴거린다”라면서 “남성 본위의 언어폭력이 지나치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서도 이미 지난 92년 한 여중생이 PC통신을 통해 친구를 사귀려다 익명의 남자들에게 성적 모욕을 당하고 비관자살했던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영국의 인터넷 전문가 해롤드 딤블비는 “인터넷이 컴퓨터통신의 홍등가(紅燈街)로 전락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음란물이 마구잡이로 전파되고 어린이들을 상대하는 변태성욕자들의 모임까지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결성되는 등 지구촌 규모의 환락가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터넷이 민주주의와 평화, 교육 혁명을 이룰 수 있는 뉴미디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컴퓨터 통신을 통해 만들어지는 지구촌을 유토피아인 것처럼 기대했다. 하지만 딤블비는 “현실은 이와 매우 동떨어져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검색어 8개 모두가 포르노와 관련된 것이다. 또 인터넷에 올라있는 가상점포의 10% 이상이 음란물을 팔고 있고, 전자게시판에 올라오는 정보의 10% 가량도 음란성을 띠고 있다고 공개했다.
가상공간에서 남자는 왜 이렇게 성적이며 공격적이 되는가.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익명성’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가상공간에 들어간 사람은 자신을 쉽게 숨길 수 있고, 현실의 자신과는 아예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감춰지고 억제돼 있던 욕망이 가상공간에서는 자유롭게 분출되고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지난 해 제이콥이라는 미국 미시간주립대 학생이 동료여학생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내용을 담은 소설 ‘파멜라의 시련’을 유즈넷(인터넷 주제게시판)에 올린 사건이 있었다. 제이콥은 현실에선 말 한마디 걸어보지 못한 여학생을 가상공간에 데려다가 성적 제물로 만들었다. 그의 숨겨진 욕망이 사이버스페이스로 발산된 것이다. 그는 결국 학교 당국으로부터 정학조치를 받고 미연방수사국(FBI)에 고발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불건전정보신고센터’를 운영하면서 지난해 적발한 ID사용정지건수는 2백18건. 그러나 올해는 지난 5월까지 3백8건으로 대폭 늘어났다. ID정지의 대부분 이유는 음란정보 유포나 음란물 판매 등 주로 여성을 상품화하거나 성적인 대상으로 다룬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은 온라인 사회에서도 남성에 밀리는 존재로 푸대접을 받아왔다. 남녀불평등은 현실보다 온라인에서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더 이상 피해자로만 남아있지 않는다. 여성의 반격이 사이버스페이스에 조용히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여성 사용자 30% 넘어서
지난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렸던 제 4차 세계 여성회의 비정부기구(NGO)포럼과 정부기구(GO)회의는 '새로운 출발' 을 눈으로 직접 보여준 행사로 평가 되고 있다. 그회의에서 가장 새롭게 부각된 이슈가 바로 "컴퓨터통신을 통한 여성 운동을 어떻게 활성화시킬 것인가" 였기 때문이다.
‘미래의 여성운동은 인터넷으로!’라는 주장이 제기된 ‘베이징 이후-국제 여성해방운동가 네트워크를 위한 전자우편 연계망 구축’ 워크숍에서는 ‘동-서 여성 네트워크’가 소개됐다. 이 네트워크는 지난 90년 옛소련과 동유럽 여성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은 미국을 포함, 불가리아 알바니아 폴란드 등 30개국 1천여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여성의 정보활용을 촉진하기 위해 이들이 ‘가상의 자매들’(Virtual Sisterhood)을 구축키로 결정한 점. 현재 이 홈페이지는 세계 여성들이 참여, 활발한 토론과 활동을 벌이는 곳으로 자리잡고 있다(http://www.nsnet.apc.org/vsister).
당시 회의에 참가했던 러시아여성공공연합 연구원 엘레나 마츠코바는 러시아내 통신망을 이용해 1년간 실시한 여성학강좌 시범프로그램을 기획해낸 주인공. 그녀는 “온라인이야말로 일반 여성에게 여성이 처한 현실을 일깨우는 교육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매체”라며 “현저하게 낮은 여성의 컴퓨터통신 이용률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여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여성을 위한, 혁명적인 의학서’로 평가받고 있는 ‘우리의 육체, 우리 자신’(Our Bodies, Our Selves)이 인터넷에 올랐다(http://www.healthgate.com). 이 책은 원래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이 대두됐던 25년 전 보스턴 지역 여의사 12명이 모여 발간한 것으로, 무지와 미신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여성 자신의 육체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처음 접근한 것이다.
아직 걸음마 수준이긴 하지만, 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 국내 PC통신 서비스에도 여성클럽, 여성학동호회 등이 자리잡고 여성을 위한 정보인프라가 본격적으로 구축돼 가고 있다.
그동안 여성은 남성보다 원래 컴퓨터 등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한다는 편견이 팽배해 있었다. 하지만 사회학, 심리학 등의 최근 연구 결과는 여성이 열등하다는 고정관념이 대단히 잘못돼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남성은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기계를 접하는 기회가 잦으며, 여성보다 전쟁놀이나 스포츠 등 공격적인 성향의 일에 익숙하도록 학습된다. 반면 여성은 이와 반대로 주위로부터 인형놀이와 같은 이른바 정적이고 ‘여성적인’ 행위에 익숙해지도록 교육되며, 조용히 말하고 양보하는 미덕을 강요받으며 자란다. 즉 부모들이 가진 성 역할에 대한 관념이 아이들의 행동발달에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것이다.
또 남성이 더 많은 사회참여 기회를 갖고 있는 것도 여성이 컴퓨터를 늦게 접하게 된 배경으로 설명될 수 있다. 컴퓨터는 초기에 가정보다 기업에서 먼저 사용됐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회 활동에 더 많이 참가하고 있는 남성이 컴퓨터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여성들이 ‘기계’로부터 소외된 것은 여성 스스로가 원해서가 아닌, 가정과 사회, 문화, 학교 모두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올해 들어 온라인에 새로 문을 두드리는 여성이 급증하고 있다. 미국 조지아공대 산하 온라인 여론조사기관인 GVU센터가 지난 4월 인터넷을 통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인터넷 이용자중 31.5%가 여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몇 년 전에 10%도 채 못된 것을 생각하면 새로운 변화임에 틀림없다. 국내 PC통신의 경우도 여성 이용자가 지난해에 비해 3백% 가량 늘어나 남자 대 여자 비율이 5 대 1까지 올라섰다.
이같은 현상은 컴퓨터가 최근 가정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고 있는 흐름과 맞아 떨어진다. 전업주부로 가정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여성이 점차 사이버스페이스에 참여, 새로운 사회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 있어 서구에 비해 아시아 지역의 여성 이용자는 훨씬 적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일본 인터넷서비스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여성이용자가 7.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도 인터넷 여성이용자는 5% 안팎으로 추정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여성 이용자의 참여가 더욱 늘어나야 한다. 또 이에 걸맞는 여성 중심의 정보인프라가 꾸준하게 쌓여나가야 한다. 온라인 사회는 세계 여성이 정보를 교환하고 공동문제를 토론하고 하나로 뭉치기 위한 가장 유리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희망이 실현된다면 가상공간은 거꾸로 현실의 여성문제까지 바꿀 수 있는 큰 힘으로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