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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기사][SF 소설] 한여름의 투명도감 I 6장 “우리를 끌어안는 현실처럼” I

    ▲AI 생성 이미지(Midjourney)

     

    편집자 주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과학이 반드시 바라봐야 할 생명의 섬세함을 SF로 확장한 짐리원 작가의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쪽이 조용하고 어두워지니 저쪽의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사람의 말소리였다. 손전등 같은 불빛도 보였다. 노아가 모아를 잡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이끌었다. 다른 두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둘은 엘리베이터 옆의 벽에 몸을 숨겼다. 거대한 동굴 속에서 날 법한 깊고 습한 냄새가 감돌았다. 모아는 다리 옆에 느껴지는 꾸엥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머리를 놓치면 항성의 중력에서 벗어나 버릴 것만 같았다.
    다가오는 발소리.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승강기가 여기 왜 내려와 있지?”
    다시 엘리베이터 불을 켜는 소리.
    “팀장님, 여기서 대기할까요, 아니면 진입할까요? 시큐리티 코드 보면 아무래도….”
    귀를 쫑긋 세워 듣던 모아는 흠칫했다. 조심스럽게 목을 빼서 보니 붉은 안전조끼가 스쳤다. 장비도 똑같았다. 아까의 그 사람들. 세끝아파트 옥상에서 담쟁이를 묶던 사람들. 겨우 몇 시간 전인데 몇 년 전처럼 느껴졌다.
    핸드폰 진동 같은 소리가 들려서 모아는 본능적으로 바지춤을 더듬다 자신이 핸드폰을 잃어버린 지 여섯 시간은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그르르르르르 소리는 모아의 몸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울렸다. 꾸엥이었다.
    “아파?”
    모아는 작게 물었다. 이제 꾸엥은 그르르르를 넘어 으르렁거리며 부리를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쉿, 쉿” 모아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꾸엥은 날개까지 부르르 떨어댔다. 결국 꾸엥의 등을 쓰다듬으며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꾸엥은 낮게 “끄아아아아앙!” 하고 울부짖더니 생각보다 유연한 몸을 던지다시피 하며 쏜살같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모아는 그 꽁무니도 잡지 못했다.
    꾸엥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정확히 말하면 거기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 명 정도는 엘리베이터 밖에, 나머지는 그 안에 서 있었다.
    “뭐야, 뭐야 이거!” “쏴!”
     
    노아는 이미 꾸엥을 따라 달려 나가고 있었다. 모아는 보았다. 빛에 노출된 꾸엥 위로 자기 몸을 던지는 노아. 그리고 그의 몸에 맺힌 붉은빛의 점들. 거의 동시에 투명한 폭발이 일어났다. 더 정확히 말하면 투명한 무엇인가가 노아의 팔에서 터져 나갔다. 불가사리의 남은 세 팔이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팔들은 저녁 하늘에 나부끼던 거인 풍선 인형 의 팔처럼 펄럭였다.
    “으아아악!”
    진짜로 비명을 지르고 싶은 쪽은 어쩌면 불가살이였겠지만, 그리고 모아였겠지만,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의 비명이 이들의 귀를 꿰뚫었다. 불가살이의 투명한 팔에서 가을 운동회의 색종이 같은 조각들이 흩날렸고, 투명한 색종이 사이사이에는 불투명하고 찐득찐득하고 뜨거운 것들까지 섞여 있었다.
    모아는 흩날리는 조각 사이로 세희 씨가 엘리베이터를 다급하게 조작하는 모습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바깥에도 조작 스위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먼저 무거운 문이 드르륵 닫혔고, 엘리베이터는 벽 속에 숨은 통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사람들의 당황한 듯한 고함이 들렸지만 그것도 이내 사라지고, 오직 어둠만 남았다.

    어둠에 빛을 가져다준 것은 조금씩 통통 튀어서 노아 옆까지 모여든 고무공 같은 투명생물들이었다. 모두 죽은 줄 알았는데 꽤 많이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바닥에 남은 투명한 조각들은 연기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심계수 아저씨가 모아에게 절대로 밟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노아는 온 얼굴이 투명한 조각과 핏자국으로 뒤덮인 것에 비하면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불가살이가 감겨 있던 팔은 퉁퉁 부었고, 덴 듯한 자국도 남았다.
    “꾸엥이 갑자기….”
    모아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했다. 꾸엥은 아직 진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쓰다듬어 주려고 해도 싫다는 듯이 그르릉댔다. 노아는 설명할 필요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숨을 고르고 그가 입을 열었다.
    “말했지. 보기보다 기억력이 아주 좋다고. 복수심도 장난 아니거든.”
    모아는 처음에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기억 속 퍼즐 조각들이 조금씩 맞춰졌다. 다시 본 업화건설 직원들을 알아챈 건 모아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꾸엥을 걷어차 버리고 담쟁이는 묶어서 들고 갔던 모든 일을 꾸엥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심계수 아저씨는 미세하게 빛나는 투명 붕대를 꺼내서 노아의 팔에 감아 주었다. 아저씨는 말했다.
    “소문대로네요. 아무리 1단계라고 해도 불가살이를 자기 몸에 붙여? 택시에서도 팔에 뭐 이상한 게 있다 했지만, 나는 설마설마했지.”
    노아는 어쩔 수 없었다고만 했다.
    “내가 알기로는 통제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종인데 말이죠. 양날의 검일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 계산했다면 정말 대단한걸요.”
    배낭을 뒤지며 물건들을 꺼내던 세희 씨가 말했다. 카트는 엘리베이터에서 미처 챙기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배낭 하나를 세희 씨가 챙겼다.
    “무기처럼 썼다면 저는 자격이 없는 거겠죠.”
    노아의 말에 심계수 아저씨가 갸웃했다.
    “착취한 것 같아서 그래? 사용되지 않는 삶은 없어요. 사용하는 목적이 문제지. 그 정도면 괜찮게 사용된 삶이라고 생각하는데. 우주적으로 말이야. 그래, 불가살이 1인칭 관점에서는 예상치 못한 비극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치면 비극 아닌 게 어딨어요. 인간은 그걸 항상 정할 수 있나? 동물 좋아하는 사람들은 참, 항상 보면….”
    아저씨는 말할 거리가 잔뜩 있는 것 같았지만 세희 씨가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곧 멈추었다. 노아는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고, 그냥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은 예전에 마치고.
     
    투명 공들의 빛은 날카롭게 방사형으로 퍼지지는 않았지만 점점 주변을 마치 새벽처럼 물들여 갔다(노아는 이 공들의 진짜 이름은 ‘도깨비불’이라고 했다). 그러자 주변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동굴인 줄만 알았던 이곳은 거대한 지하 터널의 출발점 같았다. 돔 형태의 공간에는 공사 현장에서 쓰이는 비계나 사다리, 상자, 차량 같은 것들만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터널이 시작하는 곳에는 유리 상자 같은 것이 위에 설치된 단상이 있었다. 이 단상은 사람 키보다 높아서 사다리를 설치해야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세희 씨가 일행을 상자 앞으로 안내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뿌연 사각 공간 안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온실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하지만 투명한 잎들은 전부 갈색이었다. 모아가 바라보는 동안에도 잎사귀 몇 장이 떨어지며 공간을 맴돌았다. 또 나무의 군데군데에 커다란 포도 같은 열매들이 열려 있었는데, 잘 보니 벌집이었다. 모든 것이 진공 상태로 포장된 것만 같았다. 처음에 모아는 벌들이 잠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이무기를 찾으러 온 거죠? 그렇다면 제대로 왔어요. 여기가 업화건설에서 투명동물을 보관하는 지하 창고니까.”
    세희 씨가 말했다. 모아는 노아를 몇 번 쳐다보았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모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럼 정정할까요. 원래 보존하려고 했던 곳. 보존 계획이 있었던 곳. 이 경우는 온도 조절을 잘해 줘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하지 않았던 걸로 보이고요.”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런 짓을. 굳이 데려가서요.”
    모아는 말했다. 대기업은 그래도 다를 거라던, 우리가 고마워해야 한다던 세끝아파트 사람들의 희망 섞인 믿음이 머리를 맴돌았다. 세희 씨가 답했다.
    “할 수 없었던 건지, 하지 않기로 한 건지는 우리도 몰라요.”
    처음에는 실제로 투명동물의 생물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인식하고,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사진 중에 투명안이 있거나 어떤 식으로든 투명동물에 대한 정보를 접한 사람이 있던 것으로 보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 처음부터 설계가 잘못되었는지 보존 관리 예산이 부족해졌는지 해당 이사가 회사 지분을(혹은 관심을) 잃었는지, 일이 잘못될 수 있는 방식이 수백 가지는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누구의 의도도 아니며, 그냥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았던 것뿐이라고 세희 씨는 말했다. 또 원래 프로젝트가 계획대로 진행되었더라도 그것이 투명우산에서 원하던 방식의 프로젝트와 얼마나 가까웠을지는 별개의 문제였고 말이다. 강제로 번식을 시키고 실험을 진행했을 테니까.
    “그렇지. 너무 아쉬워할 건 없어.”
    심계수 아저씨의 말이었다.
     
    투명꿀벌의 무덤 너머의 어둠 속으로 유리 상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아득히 먼 미래까지 혹은 과거까지 늘어선 것 같았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터널은 또 수많은 작은 터널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터널들 안에서도 상자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모아는 이해했다. 이무기는 이 미로 어딘가에 있었다. 담쟁이를 찾으려면 그들이 투명동물들을 버려둔 이 미로로 들어가야만 했다.
    노아와 세희 씨와 구룩은 이미 짐을 챙겨서 미로 앞에 서 있었다. 도깨비불도 이 짐의 일부였다. 그들이 왜 지금 그리로 향해야 하는지는 모아도 알았다. 투명동물들은 기다려 줄 수 없었으니까. 한 번 헤어져 버리면 약속을 잡아서 다시 만날 수도 없고, 나중에 그때 미안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다음 생에서도 다시 볼 수 없었으니까. 어쩐지 그랬다. 다음 생이 진짜 있더라도, 내가 아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더라도, 사람이 동물을 다시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 세상이 아니라면, 특히 투명동물들은… 하지만 사람도… 모아는 망설였다.
    “저는….”
    “너는 돌아가야지.”
    심계수 아저씨가 모아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모아는 노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답을 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노아가 뭐라도 말해줬으면 했다. 마침내 모험이 끝났을 때, 할아버지 마법사나 다른 세상의 기사가 건네주는 그런 말. 이제까지 그들이 함께 무엇을 했고 무엇을 얻었으며 왜 이제 돌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말. 모아가 좋은 어른이 되고 멋진 삶을 살 것이며,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말. 하지만 이곳은 진짜 세상이었고, 노아는 웃으며 말했다.
    “뭘 하고 있어. 내일 학교는 어떡하려고.”
     
    “흠. 여기쯤이었는데.”
    심계수 아저씨가 동굴 구석을 더듬었다. 동굴 벽면을 따라 문이 여러 개 숨겨져 있었다. 그들이 연 모든 문은 자재실이나 탕비실이나 복도로 향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연 문은 새벽으로 통했다. 빛이 들기 시작하는 새벽 말고 아직 완전히 어두운 새벽. 공기만으로도 느껴지는 새벽.
    드디어 바깥세상이었다. 더바이빌리지를 빠져나왔다. 아저씨는 택시로 모아를 서울까지 다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는 풀과 나무들 사이에 숨겨진 길로 모아를 안내했다. 꾸엥은 타박타박 잘도 따라왔다. 포장도 되지 않는 길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모아는 내내 마음에 맴돌던 것을 뒤늦게 물었다.
    “나중에라도 나올 수 있는 것 맞죠? 노아는… 누가 쫓아오면….”
    아저씨는 방금 ‘그걸’로 시스템 구축이 두 달은 늦춰졌을 테니까. 그동안은 업화건설도 지하 구석구석까지 뒤질 여유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할 일을 하고 나와야지.”
    “테러는 아저씨가 한 거예요? 세희 씨랑 아저씨가.”
    모아는 이번에는 머리를 맴돌던 질문을 꺼냈다.
    “테러라. 그렇게 말해도 맞긴 한데.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일단 테러는 누구를 죽이거나 더바이건설을 망하게 하려고 벌인 게 아니라는 점은 알아줘요. 거대 자본이 그 정도로 망하지도 않고. 우리는 그냥 시간을 벌려는 거야. 시간을 벌고, 시간을 벌어 주고. 언더그라운드 포도밭 네트워크니까.”
    모아는 노아가 내뱉었던, PDBN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포(P) 도(D) 밭(B) 네크워크(N), 줄여서 PDBN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식물들을 구하려고…?”
    모아의 말에, 심계수 아저씨는 크게 웃었다. 잠깐 웃고 마는 것도 아니고, 모아가 슬슬 짜증이 날 때까지 실컷 웃어 젖혔다. 아저씨는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정말 동물 구호 운동에 어울리는 생각이네. 투명우산이 사람 하나는 잘 뽑았어. 이해는 해요. 이무기 한 마리에게는 이무기 한 마리의 고통, 이무기 한 마리의 기쁨이 전부니까. 이무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무기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지. 이를테면 저기 지하에서 천천히 죽어가기를 바라지는 않잖아요. 햇볕 받고 바람 맞고 수염 흔들며 행복하게 살면 좋겠고. 사실 그게 최종 목표인 거지. 하지만 그건 너무 동물 위주의 생각. 식물을 구하는 게 뭐죠? 그런 게 있나? 잘 생각해 봐요. 정말 식물을 위하는 게 뭘까? 그들을 위한 세상은 어떤 곳일까? 식물의 좋은 점은 살아 있지만 그 삶이 고통과 기쁨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거지. 고통과 번뇌는 동물적인 개념이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고통과 기쁨에 사로잡히지 않아서 얻는 이점은 뭘까? 하나의 삶을 넘어서는, 훨씬 긴 단위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아저씨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사악한 기업들이 있다면, 동물을 위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하죠. 그 기업의 손에 동물들이 들어가지 않게 막는 거야. 하지만 식물을 위하는 사람이 할 일은 뭘까? 특히 그 기업과 그 기업의 친구들이 지구상의 생태계를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면.”
    모아는 곰곰 생각했다. 힌트처럼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더바이빌리지를 장식하던 투명 화분. 해태가 먹던 투명미역 같은 것. 투명벌 상자의 작은 투명나무들.
    “그들에게 투명식물을 준다, 투명식물을 퍼뜨린다…? 누가 키워도 살아 있기만 하면 상관 없으니까…? 어떻게든 더 많아지는 게 좋으니까…? 그러면 아저씨 목적은 뭐예요? 그러니까 포도밭 네트워크는… 세희 씨는 왜 이무기를 구하려고….”
    모아가 말했다. 아저씨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무기를 진짜로 찾아야 한다는 건 우리도 똑같은 입장이니까. 투명우산은 이무기가 멸종위기 동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특이한 힘을 가진 식물이거든. 도깨비불도 마찬가지고.”
    아저씨는 PDBN, 즉 사밭나무 운동의 다른 활동들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얘기해 주었다. 평소에 사밭나무 운동은 가장 중요한 활동은, 투명식물을 인간 세상 이곳저곳에 보이지 않게 ‘심어 두는’ 것이었다. 투명식물과 불투명식물을 같이 심은 화분을 동네 부동산이나 미장원에 분양하거나, 투명식물이 섞인 씨앗을 선물하고, 투명식물과 같이 잘 자라는 불투명식물 모종을 텃밭 가꾸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거나 등등.
    하지만 누가 뭐래도 사밭나무 운동 최고의 자랑은 더바이빌리지에 심어둔 놈들이었다. ‘눈이 달린’ 나무들. 오카리나의 노래에만 반응하는, 모든 것을 보고 영원히 자라나는 나무들.
    “그냥 우리는 그 녀석들의 시간을 벌어 주는 거야.”
    아저씨는 정말 자랑스러운 얼굴로 목에 건 삼각형의 악기를 톡톡 두드렸다.
     
    그들은 택시를 세워둔 곳을 찾아 계속 걸었다. 산 너머에 또 산이 있었고 길 뒤에는 숨겨진 길이 있었다. 어떤 길들은 선명했고 어떤 길들은 투명동식물들처럼 아스라했다.
    가게와 차들이 드문드문 흩어진 곳까지 돌아왔을 때는 팔 벌린 송신탑 뒤로 어둠과 빛이 스쳐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무가 더 많았다. 더바이빌리지처럼 불타는 세계를 몇 개씩 짓고도 아직 지구에 나무들이 그렇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고속도로에 자리를 내주고도 여전히 옛길이 존재한다는 사실. 언덕이 언덕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나무가 어떤 땅들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길을 둘러싸고 하늘로 머리를 내밀고 팔을 벌리고 초록색으로 몰래 빛나며. 식물의 세상에 고통이 없다는 계수 아저씨의 말을 모아는 비로소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무들은 누가 그들을 걷어찼는지 옆 나무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하지 않고 그저 자라나니까. 그 모든 고통을 덮고 넘고 잊으면서.
    모아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스케일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닿은 적 없고 닿을 수 없는 더 큰 세상이 있다는 생각은, 모아에게 섬뜩한 느낌과 안도감을 함께 주었다. 마지막 투명동물운동 단체와 어쩌면 투명동물들까지 다 사라진 후에도 사밭나무 운동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파트 텃밭에서, 미장원 앞 화분에서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들이 번 시간으로 자란 나무들과 함께.

    꾸엥은 집에 오는 내내 모아의 무릎을 베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나 해서 봤더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꾸엥의 눈동자에 새벽의 마지막 가로등 빛이 맺혔다.
     
    훨씬 더 커다란 동물을 본 뒤였지만 그래도 꾸엥은 커다랬다. 모아가 이해하지 못하는 커다랗고 따뜻하고 고집 센 몸. 눈은 뜬 채였고 머리도 조금은 들고 있었지만 목은 편안히 몸 위에 놓여 있었고, 무엇보다 발이 편안히 시트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사실이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문득 기뻤다.
     
    서울로 향하는 차창 너머로 해저에 박힌 것처럼 빛이 맺혀 있었다. 세상 구석구석에 인간이 밝힌 빛들이었다. 저 길은 이대로 바다까지 흐르며 반짝거릴 것만 같았다.
    빛나는 계곡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산 사이에 길을 내고 전선을 깔아서 만들어 낸 믿을 수 없는 광경, 모아도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
     
    한강은 아름다웠고 그 너머로 번쩍이는 도시는 더 아름다웠다. 주차장 기둥들 사이에서, 앰뷸런스 소리 사이에서 도시가 빛났다. 그 빛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곳은 이미 더바이빌리지일까 아닐까. 아니면 더바이빌리지가 되는 중일까, 생각했다.
     
    서울이 적어도 아직은 더바이빌리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택시가 강을 휘돌아 세밑동으로 향하면서 새삼 또렷해졌다. 세밑동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마다 투명이무기가 한두 마리씩 감겨 있었다. 분명히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모아의 눈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많았다.
    아파트 머리마다 매달려서 조금씩 흔들리는 이무기들로 가득한 아주 조용한 구축 아파트 단지. 모아가 엿본 세상이다. 투명생태계가 불투명생태계와 함께 살아남은 세상. 시간이 되면 잠시 살짝 열리는 쪽문. 그리고 드나드는 사람들. 무더운 날마다 이무기 곁에 수건과 물그릇이 놓이고, 건물 여기저기서 자가발전기에 연결된 선풍기들이 셀 수 없이 돌아가는. 이것은 서울이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일까, 모아의 도시가 아직 품에 안은 미래일까.
     
    심계수 아저씨는 세끝아파트 진입로 초입의 골목에 모아와 꾸엥을 내려 줬다. 택시는 앞 유리에서 흔들리는 풀 포켓몬들을 태우고 새벽의 도시로 떠났다.
    모아는 꾸엥을 안아서 가고 싶었지만 꾸엥이 푸드득대며 거부했다. 꾸엥은 그렇다고 딱히 모아를 떠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울타리 사이에 감춰진 쪽문을 지나 단지로 들어가는 모아를 꾸엥은 찹찹 잘도 따라왔다. 내내 숲길을 밟았던 세 갈래로 나뉜 발이 이제는 아스팔트 길을 야무지게 눌러 밟았다.
     
    투명이무기인 담쟁이가 사라진 세끝아파트는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았다. 주차장 곳곳에 꽃으로 만든 머리띠처럼 이무기의 더듬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6동과 7동 사이에서는 부동산 아저씨가 자전거를 고치는 중이었다. ‘아, 자전거!’ 모아가 뒤늦게 깨달았다. 뭐라고 변명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모아의 마음을 알아챈 아저씨가 먼저 짐짓 씨익 웃었다. 뒤이은 의문들이 모아의 머릿속에 쏟아지자마자 금세 가볍게 풀렸다. 열려 있는 아저씨의 공구 가방 속에서 슬며시 머리를 내민 악기 덕분이다. 찰흙으로 마구 빚은 듯이 귀엽고 못생긴 삼각형에, 빛깔은 숲의 검푸른 색이었다.
     
    아직 세끝아파트의 새벽은 아주 많은 방향으로 열려 있었다. 그것이 설레면서도 가슴을 죄었다. 드디어 차가워지기 시작한 공기 속에서 당고새가 푸드득하며 제 몸의 온기를 털어냈다. 

     

    한여름의 투명도감 연재를 마치며
     
    좋은 현실을 억지로 얘기하지 않으면서
    너무 어두워지진 않고 싶었는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제목답게 아주 긴, 투명동식물도감으로 돌아오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이무기를 잊지 말아 주세요!
     
    여름을 앞두고 짐리원 드림

     


    짐리원
    ‘올림픽공원 산책지침’으로 2023년 제3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고, 과학동아 2024년 8월호에 ‘기억과 사회’를 기고했다. 기후위기와 환경 오염, 서울에 대해 계속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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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6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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