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후반, 미국 하버드대에서 과학사를 가르치던 물리학 박사 토머스 쿤은 사람들 사이에 팽배한 과학의 이미지에 만족하지 못했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변화 과정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이 책이 제안한 패러다임, 정상과학 등의 용어는 오늘날 과학의 이미지를 이루는 핵심이다.
편집자 주
점진적 과학이라는 소박한 착각
오늘날 우리 주변엔 과학이 충만하다. 스마트폰, 텔레비전, 인터넷, 자동차 등 과학과 기술이 결합한 도구들을 친숙하게 사용한다. 그리고 대개 우리는 과학이 이렇듯 편리하고 유능하며 전반적으로 인간에게 이롭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과학을 이처럼 긍정적으로 보게 됐을까?
과학의 역사는 대개 과학 교과서의 중간중간에 짧은 일화로 나오면서 고대 그리스부터 오늘날까지 중요한 발견과 이론이 조금씩 축적되는 식으로 과학이 발전해 왔다고 말한다. 철학, 예술, 정치, 경제 등 다른 영역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크게 바뀌었지만, 적어도 과학은 그런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지식이 순서대로 서서히 쌓이며 현대 과학 문명을 이룩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과학은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 객관적 지식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높은 수준까지 발전했다는 관점이 이 이야기에는 깔려 있다.
과학의 변화 과정과 과학에 대한 우리의 이런 소박한 이미지는 미국의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의 책 ‘과학혁명의 구조’가 1962년에 출간되면서 이미 무너졌다. 대담하게도 쿤은 위에서 말한 과학의 소박한 이미지에 우리가 “홀려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홀린 과학의 이미지를 보다 실제 과학사에 부합하는 이미지로 바꾸고자 했다. 쿤의 시도는 대성공이었다. 과학도 그 역사에서 몇몇 중요한 ‘혁명’을 겪었다는 쿤의 생각을 이제는 꽤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가이드맵
토머스 S. 쿤 지음|김명자·홍성욱 옮김|까치|360쪽|2만 원
의의 : ‘패러다임’이란 표현을 널리 퍼뜨린 책, 오늘날 인류가 생각하는 과학의 모습을 정립한 책입니다. 이 책 자체가 하나의 패러다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추천: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POSTECH 권장도서 100선
난이도: 어려움 처음 출간 이래로 꾸준히 개정판을 내며 물리학자이자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로서 토머스 쿤의 경험과 관점을 집약시킨 고전입니다. 이 책의 치밀한 논리를 이해하려면 집중해서 읽어야 합니다.
더 읽기
‘코페르니쿠스 혁명’, 토머스 쿤: 쿤의 첫 책입니다. 어떻게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천문학의 흐름이 바뀌었는지 설명합니다. 과학혁명의 구조보다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고 과학과 철학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궁금해졌다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책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적 설득력을 묻다
1922년 미국에서 태어난 쿤은 하버드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했지만,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역사, 철학 같은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전쟁이 끝난 1949년에 그는 고체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이미 그 전부터 제임스 코넌트 하버드대 총장의 제안으로 하버드대에서 인문학 전공 학생들을 위한 과학사 강의를 맡았다.
물리학자로서 긴 훈련을 받은 쿤은 전문 과학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과정을 거쳐 아마추어인 학생이 과학자 공동체에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되는지 충분히 경험했다. 그와 동시에 쿤은 인문학에 대해서도 깊은 존경과 흥미를 지녔다. 이런 이유로 쿤은 과학사를 가르치기 위해 옛 원전을 찾아 읽었고, 의문을 품게 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정치학, 시학 등은 많은 학자가 여전히 연구할 만큼 뛰어난데, 왜 그의 ‘자연학’(물리학)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과학자는 없을까? 왜 현대 물리학자가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형편없고 오류투성이일까?
이런 물음을 갖고 계속 과학사 원전을 읽던 어느 날, 쿤은 번뜩이는 깨달음을 얻었다. 현대인의 편견을 버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로 돌아가 ‘자연학’에서 펼쳐지는 개념, 논리, 구조에 최대한 공감하며 읽어 본 쿤은 이 책이 유기적인 개념 체계임을 알게 됐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허무맹랑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안에서 자연에 관한 설명은 매우 합리적이고 일관됐다. 쿤은 자신이 물리학자로 성장한 과정에서 배운 과학 이론, 과학사, 과학의 이미지가 철저히 현재의 관점에서 쓰였음을 간파했다. 마치 자연을 탐구해 규칙성을 찾으려는 과학자처럼, 쿤은 과학의 역사적 사건들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그 결과로 1957년에 그의 첫 저서인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나왔다. 다음 책인 과학혁명의 구조는 쿤이 하버드대를 떠나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과학사, 과학철학을 연구하며 쓴 것이다.
쿤이 소개한 핵심 개념, 패러다임
쿤이 볼 때 전문화된 오늘날 과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과학자 공동체가 공통으로 승인, 수용하는 ‘패러다임’이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를 양성하는 표준인 과학 교과서가 이런 패러다임을 잘 보여 주는 사례다. 과학 교과서의 내용은 어디서나 거의 같다. 동일한 모형과 수식(기호적 일반화)이 제시되며, 학생들은 주요 이론을 배운 후 시간과 노력을 들여 교과서의 각 장 끝에 있는 연습 문제들을 풀고, 이에 관한 다양한 실험을 해보며 실제로 과학을 하는 것의 의미를 체득한다.
패러다임(paradigm)
‘정상과학(normal science)’에서는 근본적인 주제를 둘러싼 논쟁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과학자 공동체는 이미 특정한 패러다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는 논쟁 대신에 특정한 자연적 사실(천문학에서 특정 행성의 주기)을 결정하거나, 이론적 예측과 실험적 관측을 조율(공기 속보다 빛이 느려지는 물속에서 광속을 측정하는 경우)하는 등 패러다임의 내용을 더 구체화, 명료화하는 작업을 한다. 과학자들은 세부 사항에서는 다소 이견이 있더라도 ‘상대성이론’이나 ‘진화론’ 같은 패러다임의 근본적 타당성은 논쟁하지 않는다. 반면 문학, 철학, 사회학 등 자연과학이 아닌 영역에서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주요 능력은 비판과 토론이며,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그 영역의 근본 주제들에 관한 논쟁이 빈번하다.
이처럼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수용하는 패러다임이 있고, 이 패러다임 아래에서 과학자들은 ‘퍼즐 풀이를 하듯이’ 연구한다. 퍼즐 풀이는 매우 지적이고 흥미로운 작업이다. 참여자들이 퍼즐의 기본적 규칙을 받아들이면 도전적인 문제들이 퍼즐 속에서 다양하게 등장한다. 퍼즐을 해결하면 자연 현상을 패러다임의 틀에 맞도록 구성하는 데 성공한 것이며, 과학자 공동체는 정교하고 복잡한 퍼즐을 풀어낸 과학자를 높이 평가하며 여러 방식으로 보상한다.
문제는 이 정상과학이 끝없이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가장 오래된 정상과학인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천동설)과 이후에 나온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지동설)을 살펴보자. 천동설은 지구에서 관측 가능한 대부분의 별과 행성의 운동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설명, 예측했다. 그러나 천문학이 발전하면서 천체 현상의 관측 자료가 더 광범위하고 정교해지자 정상과학이었던 천동설이 제대로 설명, 예측하지 못하는 이상한 현상(변칙 현상)이 탐지됐다. 천문학자들은 변칙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연구자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몇몇 천문학자는 ‘위기’를 느끼고 패러다임 자체를 의심하면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하는 대안(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게 됐다. 이것이 ‘비정상적 과학’이다.
이런 비정상적 과학의 시기에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에 속한 과학자들의 경쟁이 일어난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두 패러다임은 세계를 보는 방식에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두 과학자 집단도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같다. 두 집단 간의 소통은 가능하지만 한 집단의 언어를 다른 집단의 언어로 번역(통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두 집단 사이에서 공정하고 중립적인 패러다임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논쟁과 토론으로 상대 집단의 과학자를 설득하려 애쓰고, 설득된 과학자는 그동안 행성으로 본 달을 위성으로 정의하는 것과 같은 ‘급격한 관점 변화’를 경험한다. 최종적으로 이전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고 과학자 공동체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면, 변칙 현상으로 초래된 ‘위기’ ‘비정상 과학’ ‘과학혁명’이 종결되고 ‘정상과학’의 시기가 돌아온다. 천동설의 시대가 끝나고 지동설의 시대가 온 것이다.
혁명적 과학의 패러다임을 세운 고전
이어서 쿤은 현재 우리가 과학이 점진적, 연속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지금이 정상과학의 시기여서다. 이 시기에는 과학의 과거 인물, 사건에 대한 역사가 오늘날의 과학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작성된다. 쿤은 우리를 홀리는 과학의 이런 이미지를 뒤엎고 자신만의 새 이미지를 제시했다.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의 틀에 자연을 끼워 맞추는 작업을 강하게 추진하고, 그 과정에서 변칙 사례가 등장해 패러다임에 위기가 닥치면 새 패러다임이 낡은 패러다임을 교체해 다시금 과학의 자연 탐구를 이끈다는 것이다.
쿤은 과학의 이런 변화를 ‘진보’라고 말했지만, 이 진보는 세계의 불변하는 ‘진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혁명을 거듭하며 과학의 전반적인 ‘문제 해결 능력’은 높아지지만, 이 변화가 세계의 진리에 더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지구 위에서 다양한 생명 종이 진화를 거듭해 왔듯이, 과학도 변화하는 세계와 자연 속에서 좀 더 잘 살아남기 위해 변이를 겪으며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의 변화를 생물학적 진화에 비유한 쿤의 설명은 당대의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며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진정한 과학의 시대였던 20세기 중엽에 인간이 과학을 보는 관점을 가장 크게 바꿨다. 물리학자로 성장한 쿤은 과학사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며 이 책을 출간했고, 과학의 이미지를 송두리째 바꾼 세계적 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쿤은 미국의 프린스턴대, 뉴욕대, 매사추세츠공대(MIT) 등에서 본인이 제시한 과학의 새로운 이미지를 더 분명하고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 책의 핵심 개념과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반면 이 책이 등장한 이래, 과학의 이미지는 되돌릴 수 없게 달라졌다. 이 책 자체가 현대의 과학관에 ‘급변하는 과학’이라는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혁명의 구조는 명실공히 인류 역사 속 ‘불멸의 책’ 중 한 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