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명사진처럼 정면을 보고 있는 동물들, 모두 얼굴이 푸른색이다. 이들은 모두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이다. 이들의 얼굴을 푸르게 그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작품을 그린 고상우 작가를 만나러 3월 27일 서울 송파구의 한 스튜디오로 찾아갔다. 스튜디오 벽면에는 호랑이부터 돌고래까지 다양한 동물의 스케치가 붙어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는 저뿐이었어요.”
고상우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 피사체가 공통으로 ‘소수자’라고 말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고 작가는 13살일 때 동양인이 거의 살지 않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로 이민을 갔다. 그곳에서 그는 극심한 인종차별과 외로움을 겪으면서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고 작가의 작품 주제가 멸종위기 동물을 비롯해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인 이유다.
고 작가는 피사체를 모두 푸른색으로 그렸다. 그는 푸른색이 “고대 로마에서 천대받던 색상이라 더욱 관심이 갔다”며 “억압받던 색상으로 차별받는 존재를 그렸다”고 말했다. 색 반전 기법을 이용해 사람들의 모습을 푸른빛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눈길은 자연스럽게 멸종위기 동물로 이어졌다. 멸종위기 동물은 개체수가 줄어들어 절멸할 위기에 있다는 점에서 소수자와 마찬가지로 지구 환경에서 약자였다.
사람과 동물, 작품의 차이는 눈에 있었다. 이전까지 그린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감은 모습이었다. 동물을 그린 순간부터 피사체는 눈을 뜨기 시작했다.
멸종위기 동물과의 눈 맞춤, 그림에 고스란히 담다
고 작가는 동물을 그리기 전에 늘 동물의 눈을 바라본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달리 소통이 어려운 동물의 허락을 받는 절차다. 호랑이와 고릴라, 반달가슴곰을 만나러 가 눈을 마주치고 그들의 눈을 그대로 작품 속에 담았다. 끝내 눈을 봐주지 않은 동물은 그리지 않았다. “기린과 하이에나는 끝까지 눈을 마주치지 못했어요. 마음의 문을 여는 데 실패한 거죠.” 고 작가는 아쉬워하며 설명했다.
물론 애초에 눈을 마주치기 힘든 동물도 있다. “바다거북과 돌고래는 눈을 마주칠 수 없지 않나요?” 기자가 스튜디오 벽에 붙은 작가의 바다거북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자의 질문에 고 작가는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인공지능(AI)을 활용 중”이라고 답했다. 만나서 눈을 보기 어려운 동물의 모습을 AI에 넣은 뒤 정면을 바라보는 동물을 생성하는 기법이다.


고 작가는 작업 중 유독 인상 깊었던 동물로 점박이물범을 꼽았다. 2025년 10월에 찾아간 인천 백령도에서 바로 점박이물범을 만나기란 어려웠다. 안개가 끼면 배를 못 탔고, 날씨가 좋은 날엔 백령도에서 다시 4시간 배를 타야 점박이물범을 보러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사나흘을 기다린 끝에 점박이물범 두 마리를 발견했다. 어미 물범은 고 작가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숨어버렸다. “제발 한 번만 여기를 봐 주겠니?” 고 작가는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홀로 남은 새끼 물범을 멀찌감치 바라봤다. 그 순간 기적처럼 새끼 물범이 고 작가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두 동물이 눈빛으로 교감한 찰나. 고 작가는 감격스러운 순간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았다.
장르를 뛰어넘어 생명의 소중함 향해
동물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나면 고 작가는 한 올 한 올 섬세히 동물의 털을 그리기 시작한다. “제 작품들을 계속 확대해 보면 모두 선으로 이뤄져 있어요. 이것이 디지털 미디어와의 차이점입니다.” 픽셀(화소)로 이루어진 화면과 달리, 고 작가의 작품은 모두 사람이 섬세히 그은 선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동물에 따라 하트와 꽃, 나비를 작품에 넣어주기도 한다. 그림 속 하트는 두 번째 심장을 의미한다. 고 작가는 “개체수가 얼마 남지 않아 위급한 상황에 처한 동물에게는 특히 하트를 많이 넣어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동물들이 외로워 보일 때는 배경으로 밤하늘에 별도 띄워주고 나비나 꽃도 곁에 그려줍니다. 나비는 환생을, 꽃은 자유를 상징하기도 하지요.” 완성한 동물 작품은 사람의 눈높이와 맞춰서 전시한다. “동물도 사람과 동등한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동물을 사람의 증명사진처럼 그린 까닭이기도 하다.
털 한 가닥을 섬세히 작업하는 고 작가지만, 그는 앞으로 디지털 도구를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 밝혔다. 최근에는 AI를 이용해 그림 속에 멈춰 있는 동물들을 움직이는 영상 작업을 만들기도 했다. “저는 누군가 제 최고의 작품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다음 주에 만들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을 그리는 도구와 디지털 기술 등이 점점 더 발전하고 기술 발전의 파도를 타고 제 작품도 발전할 거라고 봅니다.”
초상화와 영상을 넘어 건축물과 행위 예술까지. 고 작가는 한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만들고 있다. 2024년에는 플라스틱 폐기물로 고통받는 해양생물을 알리기 위해 청계천 산책로 곳곳에 고래 조형물을 설치하는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조형물 옆에 있는 QR 코드를 찍으면 플라스틱 쓰레기를 쏟아내며 유영하는 고래를 화면에서 볼 수 있고, 쓰레기통 위치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예술가는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사회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5월 열릴 전시회의 제목은 ‘Still Breathing’, 아직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고 작가는 “멸종위기 동물을 넘어 살아 숨 쉬는 것, 생명에 대해 다루고 싶다”고 말했다. 동물실험으로 백신을 많이 맞아 신경이 마비된 토끼, 갑갑한 우리를 뛰어나온 얼룩말 작품 등을 전시한다.
“아직 숨 쉬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해 볼 수 있는 전시이길 바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