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김승섭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흰 가운을 입고 메스를 든 의사와 다르다. 그는 질병의 원인을 찾는 ‘사회역학자’다. 이 책은 대량해고 노동자부터 전공의, 소방공무원,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까지 차별, 낙인이 한국 사회의 여러 집단에 일으킨 건강 격차를 밝힌 그의 연구들을 소개하며 ‘사회적 상처가 우리 몸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지’ 묻는다.
편집자 주
의학의 아픔 속에서 찾은 사회의 물음들
먼저 저자인 김승섭 교수의 연구 분야인 ‘사회역학’을 알아보자. 사회역학은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남긴 상처, 질병을 분석하는 학문’이다. 생소할 수도 있지만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실린 사례들은 사회적 요인이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생생히 보여 준다. 경제적 결핍이나 사회적 폭력에 따른 스트레스가 혈중 코르티솔 농도를 높여 심장병, 고혈압 같은 만성 질환의 발병 가능성을 높이는 것도 그 예다.
통계, 설문조사에서 시작해 연구 참여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구 결과의 의미와 건강 대책까지 고민하는 저자의 연구 경험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사회적 상처가 우리 몸의 상처가 되는 과정을 만난다. 이 한 권을 읽어 가며 사회적 고통이 한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 더 나아가 사회를 병들게 하는 원리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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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원인의 원인’을 탐구하는 사회역학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1장은 사회역학의 역사와 기본적인 문제 의식을 다룬다. 사회적 관계가 질병의 원인일 수 있다는 이 인식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게다가 세균이 감염병의 원인임을 알게 된 지도 15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질병의 원인은 주로 세균, 바이러스나 환자의 가족력, 습관 같은 개인적 요인들이 지목돼 왔다. 현대 의학은 이 관점을 바탕으로 질병을 신속하게 진단, 치료하는 데 집중해 왔다. 항생제를 개발해 세균 감염 질환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게 됐고, 지금도 암,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의 새로운 치료법 개발이 활발하다.
역학은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 원인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학문이다. 질병의 진단이나 치료에 집중하는 임상의학과 다르다. 그중에서도 사회역학은 질병의 ‘원인의 원인’을 파고든다. 저명한 사회역학자 낸시 크리거 미국 하버드대 T.H. 챈 보건대학원 교수는 1994년 논문에서 그동안 질병 원인에 대한 논의가 개인 차원의 고정된 요인을 기본적으로 가정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유전적 요인인 가족력조차 환경적 요인과 상호작용하면서 개인의 질병 발생에 영향을 줄 수 있는데도, 1990년대까지 개인의 생활 습관, 분자생물학적 요소만을 중심으로 질병 원인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크리거 교수는 이 논문에서 질병의 개인적 원인에서 나아가 사회적, 정치적 원인도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계기로, 질병의 원인을 국가, 학교, 직장, 지역사회 같은 공동체의 특성에서 찾는 연구자들이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을 중심으로 모이게 됐다. 이렇게 사회역학은 질병의 ‘원인의 원인’인 사회적 요인을 찾고, 개인과 더불어 공동체의 건강에 주목하며 질병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가이드맵
중요도: [중요함] 우리가 익히 아는 의학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공합니다. 특히 의학에 꿈을 둔 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추천: KAIST 독서문화위원회 추천도서
난이도: [쉬움] 저자가 기고한 대중 칼럼을 모은 책이라 난이도가 어렵지 않습니다. 각 챕터의 호흡도 짧아 읽기 편하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더 읽기: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환경 오염이 생태계는 물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 주는 또 다른 과학 고전입니다.
‘폭염 사회’, 에릭 클라이넨버그: 이 책 1장에 소개된, 같은 폭염이라도 사회 계층에 따라 서로 다른 피해를 받는 ‘재난불평등’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기후 변화 시대에 갈수록 중요해지는 책입니다.
김승섭 지음|동아시아|320쪽|1만 8000원
소외된 고통을 드러내는 데이터의 힘
그렇다면 사회적 요인이 어떻게 사람을 병들게 할까? 우리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인 직장을 연구한 2장을 읽어 보자. 2장은 해고노동자, 소방공무원, 병원 전공의(인턴·레지던트) 등이 일터에서 겪은 고통, 안전에 대한 여러 사례를 다룬다. 저자인 김승섭 교수가 기획, 수행한 연구들이다.
그동안 연구되지 않은 특정 집단의 건강에 대한 질문이 생기면, 김승섭 교수는 “항상 데이터를 먼저 수집”한다. 사회역학 연구에선 무엇을 어떻게 측정할지 고민하고 질문과 측정법을 바꿔 가며 더 나은 답을 찾는 과정이 필수다. 여기서 데이터 수집이 중요하다. 저자의 사회역학 연구는 대부분 이전에 연구되지 않은 집단의 건강이 주제이므로, 데이터 수집은 지금까지 측정되지 않았거나 측정 자체가 어려운 항목의 측정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사회적 약자 집단의 건강 데이터가 이미 수집된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박사과정 시절에 만난 역학자 리처드 클랩 미국 보스턴대 공중보건대학원 명예 교수는 “데이터가 없는 역학자는 링 위에 올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저자는 이 말을 지침 삼아서 자신이 질문하는 집단의 건강 데이터부터 차곡차곡 수집해 일터,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문제들을 드러낸다.
저자가 2014년에 대한전공의협의회와 공동 진행한 ‘2014 전공의 근무환경 조사’를 보자. 한국 전공의의 주당 노동시간은 인턴 116시간, 레지던트 1년 차 103시간이었다. 현재 근로기준법 제50조가 원칙적으로 규정한 1주 노동시간인 40시간에 비해 근무 강도가 매우 높다. 전공의들의 무리한 장시간 노동은 병원에서 치료받는 환자의 안전과 직결된다. 설문조사를 토대로 수면 시간이 하루 7시간 이상으로 충분한 전공의와 하루 평균 5시간 미만인 전공의를 비교하니, 후자의 의료사고 가능성이 2배 이상 높았다. 주당 120시간 이상 일하는 전공의의 우울증 발병 가능성은 60~79시간의 경우보다 3배 이상 높았다.
친구가 많을수록 더 오래 산다
이 책에서 다루는 차별, 가난, 트라우마 같은 사회적 폭력이 건강에 끼치는 영향은 개인마다 인식이 다른 경우가 많다. 또 각자가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고 언어화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려, 설문조사로 측정하기도 어렵다. 3장에서 다룬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성소수자, 재소자 등의 건강 실태는 이런 어려움이 있더라도 사회역학 연구가 사회적 낙인과 차별이 원인인 질병을 측정하고 데이터를 확보해야 할 이유다. 한 번도 연구되지 않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집단의 경험과 질병은 첫 조사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조사 참여자도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 고통을 고민하고 응답하며,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경험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사회역학은 집단의 삶과 건강에 대한, 그동안 존재하지 않은 이야기를 학술적 언어와 통계 자료로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4장에서 저자는 그 해답으로 사회적 관계, 공동체, 그리고 규제를 제시한다. 사회적 관계망과 건강의 관계는 사회역학의 오랜 연구 주제다. 이 책이 소개한 네 편의 논문은 심장병, 감기, 비만의 유병률, 사망률 같은 지표가 사회적 관계망의 형성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사회역학자인 리사 버크먼 하버드대 T.H. 챈 보건대학원 교수와 그의 지도교수인 레너드 사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공중보건대학원 교수는 사회적 연결의 정도와 사망률을 비교한 연구에서,
“더 많이 연결되어 있을수록, 더 오래 산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이들은 이 연구를 위해 결혼 여부, 지역사회 조직에서의 활동, 친구나 친척 관계 등을 활용해 사회적 관계망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버크먼-사임 사회적 관계망 지표’를 개발했다. 심장병 사망률이 유난히 낮았던 미국의 로세토 마을에 대한 연구도 공동체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상호부조 문화가 개인들을 끈끈하게 연결한 이 마을의 사례에서, 공동체가 구성원을 지켜주고 위기나 슬픔에 빠진 사람과 함께하는 문화가 개인들의 건강도 향상시킬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사회와 공명하는 과학적 쓸모의 시작
과학은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를 탐구해 왔다. 가보지 못한 우주를 상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를 들여다본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인류의 물리적 지평을 넓힌 망원경이나 현미경처럼 우리의 의학적, 사회적 지평을 넓히는 새로운 렌즈 같은 책이다. 누군가는 우주나 미시 세계가 궁금하듯이, 다른 누군가는 나와 내 주변의 가족, 친구에게 일어나는 일이 과학적으로 궁금할 수 있다. 김승섭 교수가 수년간의 조사와 연구로 갈고 닦은 이 렌즈는,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해 온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한 과학적 사고와 방법을 일깨워 준다.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은 새로운 질문을 꾸준히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책의 연구들은 이 질문을 끌어낸다. 이들이 경험한 차별과 낙인을 해결하려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답을 고민하면 다시 근본적인 질문과 만난다. 국가란, 사회란 무엇인가? 국가와 사회의 역할, 책임은 무엇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책의 질문 속에서,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사회를 함께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의 고리가 만들어지면 우리도 질병과 고통의 원인을 개인이 아닌 사회에 놓을 수 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사회역학이란 학문의 눈으로, 한국 사회와 개인의 아픔을 돌볼 수 있는 적확한 질문들을 제시한다.
개인의 아픔이 집단, 사회의 아픔과 결코 떨어질 수 없듯이, 개인의 호기심과 궁금증도 사회와 공명할 수 있다. 사회역학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과학과 과학자도 사회의 일부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학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연구는 거창한 질문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잠시 눈을 돌려 우리 곁의 아픔을 살펴보자. 이 아픔에서 아직 아무도 던지지 않는 질문이 있다면 우리가 그 질문에서 시작해 보면 어떨까. 사회에서 나의 과학적 역할을 고민하는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