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종 세상은 방향을 갑자기 바꿉니다. 제 방향은 중학교 2학년 때, 가위바위보 한 판에서 바뀌었습니다. 그 패배가 과학을 공부하고, 공학으로 사회의 문제를 풀고, AI 창업 준비로 이어졌지요. 방향이 바뀐 제 삶은 늘 이 질문이 움직였습니다. “이 불편함을 더 낫게 바꿀 수 없을까?”
가장 결정적인 가위바위보
중학교 시절, 매년 4월엔 과학의 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반마다 대회 출전 정원이 할당됐고 저는 고무동력기대회에 나가려고 가위바위보를 했지만, 졌습니다. 대신 아무도 나서지 않던 과학경시대회에 나갔지요.
그때는 “내가 과학을 잘한다”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다만 운 좋게도 교내 대회에서 은상을 받고 선생님께서도 격려해주신 덕분에, 과학경시대회 대비반에서 친구들과 공부하며 경북과학고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가위바위보를 이겼다면 저는 다른 대회에 나갔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저도 없을지 모릅니다. 이때 제가 배운 건 삶에서는 우연히 열린 문일지라도 들어가 보는 성실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2 서비스를 사용하는 배송원들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직접 부릉 배송원을 경험 중인 필자.
과학동아가 비춰준 질문과 미래
과학동아는 저에게 ‘일상에 과학을 비춰준 창’입니다. 어머니께서 과학동아의 팬이셔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집에 있는 과학동아를 들춰봤습니다. 물론 처음엔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질문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재밌었지요.
과학고 시절엔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과학동아를 정기구독했습니다. 과학이 지금 사회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좋았어요. 그중 2006년 무렵에 읽은, 한국의 로봇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브이’를 실제로 만드는 데 필요한 과학·기술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연재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대형 로봇이 작동하려면 엄청난 연산 능력이, 만화처럼 조종하려면 뇌파 인식 같은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물론 인지과학, 인간-기계 상호작용 같은 분야를 이 기사에서 처음 접했지요.
창업의 가능성을 알려준 KAIST
과학고를 거쳐 진학한 KAIST에서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강의실 안의 수업 내용만이 아니었습니다. 학생이 원하는 연구나 활동을 마음껏 시도해 보도록 장려하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두 가지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제를 끝까지 파고드는 연구의 즐거움이었습니다.
먼저 동아리 활동은 제 시야를 강의실 너머로 넓혀줬습니다. 사진동아리에서 주말과 방학마다 동아리원들과 전국으로 출사와 촬영 여행을 했습니다. 렌즈로 세상을 가만히 응시하며,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기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때 몸에 익힌 자세히 관찰하는 습관이 사업 현장에선 고객의 숨은 불편을 찾아내는 강력한 도구가 됐습니다.
연극동아리 선배의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벤처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봤지요. 완벽한 계획부터 세우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작은 실험들을 반복하며 방향을 빠르게 수정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사건은 스스로 느낀 문제를 풀기 위해 뭉친 작은 팀에서도 시작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학부 4학년 때는 김문주 전산학부 교수님의 소프트웨어 테스팅 연구실에서 6개월간 인턴으로 랩 생활을 하며 대학원 생활을 미리 경험했습니다. 단순히 코드를 짜는 것을 넘어, 내가 만든 소프트웨어가 완벽히 작동하는지 검증하며 결함을 찾아내는 체계적인 방법론을 익혔습니다. 이 경험은 제가 창업 현장에서 멈추지 않는 단단한 시스템을 실천하는 뿌리가 됐습니다. 또 창업을 ‘내 옆자리 친구가 지금 하는 일’로 여기는 주변의 분위기 속에서, 기술로 문제를 푸는 창업의 꿈을 구체화했습니다.
서비스는 혼자가 아니다
KAIST 재학 중 라스트마일(Last Mile·제품이 최종 고객에게 도달하는 단계) 배송 서비스인 ‘부릉’을 공동 창업해 개발과 경영을 맡았습니다. 부릉은 정보 기술(IT)과 데이터를 활용해 배송원, 상점, 소비자를 촘촘히 연결하는 통합 물류 플랫폼입니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이용자 수가 빠르게 늘어난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용자의 요구도 다양해졌지요. 이 요구 사항들을 반영하면서 시스템 설계가 점점 복잡해지고 예상 못 한 지점에서 오류가 잦아졌습니다. 창업 초기에 그린 깔끔한 구조와는 달리, 현장의 수많은 변수를 담아내느라 시스템이 무거워진 것이지요.
이때 저는 전국의 부릉 서비스를 이용하시는 라이더님들, 음식점 사장님들을 찾아가서 많은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그중 충남 천안의 한 치킨집 사장님께 들은 말씀이 아직 선명합니다. “서비스가 멈추면, 우리 하루치 장사도 멈추고 손님들 식사도 멈춰요. 노력해서 더 좋은 서비스를 꼭 만들어줘요.” 이때 깨달았습니다. 제가 개발한 시스템이 많은 고객의 생계와 일상에 붙어 있는 생활 기반이라는 것을요. 쓰는 사람들의 생활에 편리함을 주고, 이 기술이 쓰일 수 있게 하는 많은 사람의 생계와 일상을 지탱하는 신기술의 사회적 영향력과 역할을 배웠습니다.
서비스의 의미를 현장에서 체험한 그날 이후, 제가 일을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졌습니다. 서비스에 새로운 기능을 빠르게 더하는 것만큼, 서비스가 멈추지 않는 것, 예측 가능한 것, 문제가 생기면 빨리 복구하는 것까지 중시하게 됐지요. 2023년에 부릉이 hy(구 한국야쿠르트)에 인수됐고, 이후 저는 hy의 로컬커머스 신사업을 운영하는 하이노크의 최고기술책임자(CTO)로서,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왔습니다.
규칙 너머의 문제를 해결할 인공지능(AI)
저는 지금 인공지능(AI)으로 우리 주변의 여러 비효율을 해결하는 창업을 준비 중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AI의 본질은 명확합니다. 기존의 컴퓨터 알고리즘은 풀지 못한 ‘비정형화 정보’를 AI가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컴퓨터는 정해진 규칙 안에서만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상의 수많은 정보는 그런 틀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문제를 일일이 판단, 처리해야 했지요. 사람의 지능이 필요해서 기계가 대신하지 못했던 이런 영역들을 AI가 하나씩 대체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여러 산업 현장을 살피며 새로운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직접 해야만 했던 복잡한 일이 무엇인지 관찰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AI라는 도구로 예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을 현실로 바꾸는 실험을 계속해 나갈 계획입니다.
우연을 진로로 바꾸는 용기
저의 경험에 비추어 과학동아의 학생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째, 진로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 인생도 가위바위보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우연을 기회로 바꾸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연 속으로 나아가 기회를 찾는 용기 말입니다. 그 기회들이 모여, 여러분의 진로로 이어질 것입니다.
둘째, 공부는 점수보다 질문을 남깁니다. ‘왜 그런지’를 스스로 끝까지 쫓아간 경험은 어떤 분야에서도 여러분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됩니다.
셋째, 세상은 앞으로 더 빨리 바뀔 겁니다. 그럴수록 여러분의 경쟁력은 하나의 특정한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들을 얼마나 빨리 배우고 적응하는지의 그 속도 자체가 될 겁니다. 보통은 불안이 성장 구간의 신호입니다. 여러분에게 신호가 뜰 때, 좀 더 나아가보길 바랍니다.
과동 피플에게 묻는다
Q.당신의 호기심은 보통 어떤 순간에 시작되나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공통된 패턴이 보일 때 시작됩니다. 서로 다른 두 세상이 알고 보니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이죠. 최근엔 육아의 원칙이 인공지능(AI) 에이전트를 훈련시키는 과정과 놀랍도록 닮았다는 점에 감탄합니다. 아이와 AI 에이전트는 스스로 문제를 추론하고 해결할 수 있는 ‘논리적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이 원칙의 핵심입니다. ‘지능을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시키는 법’은 생명과 기계가 본질적으로 같은 셈입니다.
Q.과학동아에서 가장 호기심을 자극한 기사는 무엇이었나요?
2006년 연재된 ‘로보트 태권브이를 현실로 만들려면 필요한 기술’의 기사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연재에서 “상상은 질문이 되고, 질문은 기술이 된다”는 감각을 배웠습니다.
Q.지금 과학동아를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AI로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어서 두렵기도, 기대되기도 합니다. 이럴수록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고, 내 생각을 또렷하게 표현하는 힘이 중요합니다. 좋은 질문을 제기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꾸준히 키우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