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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미인도의 비밀

조개껍질, 진사, 한지의 조화

"그린다는 것이 무엇이냐?"(김홍도)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그리움을 부르지요."(신윤복)

- 소설 ‘바람의 화원’ 중에서 -

조선 후기 대표적 화가 김홍도(金弘道, 1745년~?)와 신윤복(申潤福, 1758년~?)이 21세기적 상상력으로 책과 스크린에 살아났다. 필자도 소설 ‘바람의 화원’을 읽은 뒤 우리 옛 그림에서 뜯어보고 읽어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이렇게 풍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삼 놀랐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장승업과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화가로 불린다. 김홍도가 서민들의 생활을 주로 그렸다면 신윤복은 남녀간의 은밀한 정을 소재로 많이 삼았다. 그래서인지 신윤복은 섬세하고 유연한 선과 색채의 ‘달인’이었다.

소설과 드라마, 영화에서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남장여자로 설정한 점은 그의 이런 여성적인 화풍에서 상상력을 발휘했으리라. 신윤복이 여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리 여자의 심리를 잘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붉은색은 황화수은, 하얀색은 산화칼슘
신윤복의 그림을 분석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신윤복의 그림은 동양화인가, 한국화인가. 그동안 미술계에서는 동양화와 한국화라는 명칭을 섞어 사용하다가 최근에는 한국화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본질적으로는 동양화와 한국화가 동일하다.

그렇다면 한국화와 서양의 수채화는 같은 것일까? 서양의 수채화 기법으로 한국화를 그릴 순 없을까? 한국화나 수채화 모두 물을 매개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서양의 수채화는 물감의 전색제(vehicle)로 아라비아검을 사용하기 때문에 마른 뒤 수용성이 유지되는 반면 한국화는 아교를 사용해 마른 뒤에는 불용성이 된다.

이 때문에 서양의 수채화는 한번 마른 뒤에도 물에 닿으면 색이 번져 보존하기 어렵지만 한국화는 오래 보존된다. 흔히 한국화는 병풍이나 틀에 풀로 붙이는 배접과정을 거치는데, 이것도 한국화가 물에 강하다는 이점을 활용한 것이다.

또 신윤복은 종이나 비단에 그림을 그렸는데, ‘종이는 1000년 비단은 500년을 간다’는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라는 말처럼 한지도 한국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종이는 105년 중국 채륜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후 조선의 종이가 품질이 좋아 중국의 화가들도 조선의 종이를 구하려고 애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왜 조선의 종이가 좋은 것일까.

한지는 닥나무로 만든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자라는 닥나무는 중국과 일본에서 서식하는 닥나무에 비해 섬유가 가늘고 길다. 그래서 한지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거칠게 스며들지 않고 섬세하고 치밀하게 스며든다.

종이를 만드는 방법도 다르다. 소설 ‘바람의 화원’에서는 조지서 장인의 종이 뜨는 작업을 ‘초지를 할 때 종이의 결을 반대로 두 겹 세 겹 거듭하는 복초지 기술만은 이 공장의 비법이라 하겠지만 (중략) 전후좌우로 초지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 기술이라면 기술이겠지’라고 묘사한다.

그래서 중국이나 일본의 종이는 섬유가 한 방향으로만 늘어선 반면 한지는 섬유가 직각으로 엇갈린 구조다. 현미경으로 한지를 관찰하면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한지는 질기면서도 물감의 번짐이 사방으로 일정하다. 어쩌면 이런 특징이 신윤복의 화풍을 더욱 돋보이게 했는지도 모른다.

신윤복은 우리나라 어느 옛 화가들보다 색채를 잘 구사했다. 그의 ‘미인도’(美人圖)에서 치마의 옥색과 속치마고름의 붉은색은 유달리 눈에 띈다. 특히 속치마고름의 붉은색은 진사(辰砂)라는 광물에서 얻는데, 한국에서 흔히 주(朱)라고 부르는 색이다.

진사의 주(朱) 성분은 황화수은(HgS)이다. 독성이 매우 강하지만 색이 아름다워 오랫동안 화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왔다. 서양에서는 버밀리언이라고 부르는 붉은색이 여기에 해당한다. 변색도 잘 일어나지 않아 ‘미인도’에서 여인을 칠한 다른 모든 색은 누렇게 변했지만 속치마고름만은 여전히 생생한 붉은색을 자랑한다.

한국화 중에서도 채색화에는 흰색 안료를 쓰기도 하는데, 이때 도자기 재료로 사용되는 백토(白土), 수정 원석을 간 수정말, 광택이 뛰어난 운모 같은 여러 가지가 이용된다. 그 중에서 호분(胡粉)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하얘지는 특성이 있다.

이는 호분이 조개껍질을 빻아 만들기 때문이다. 조개껍질의 주성분은 산화칼슘(CaO)으로 산화칼슘이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 산화되면서 소위 탈색된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색이 좀 남아 있는 조개껍질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고 아주 하얀 조개껍질은 죽은 지 오래된 것인데, 이것도 같은 원리다.

한편 소설에서 도화서 화원을 독살할 때 등황이라는 안료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등황은 중국, 태국에서 자라는 망고스틴 나무의 줄기에서 채취한 수액으로 만드는데, 화학적으로는 폴리페놀계의 감보지산이 주성분이다. 독성이 있어서 7g 정도가 치사량이다.

신윤복은 원근법을 몰랐을까?

신윤복은 비틀어 보기의 달인이었다. ‘월야밀회’(月夜密會)는 야심한 밤에 남녀가 몰래 만나는 장면을 한 여인이 훔쳐보는 광경을 묘사했다. 남자는 군복을 입고 손에 장창을 들고 있으니 군관으로 짐작되고, 옆 담에 붙어 숨어서 엿보는 여인은 옷차림으로 보건대 군관의 부인쯤 된다.

그런데 신윤복은 이 여인의 발을 양 옆으로 쫙 벌려 담에 평행하게 붙여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게다가 ‘월야밀회’에는 시선이 두 개다. 하나는 그림 오른쪽 위에서 몰래 훔쳐보는 여인의 시선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림 오른쪽 아래 담 안에서 화가가 숨어서 보는 시선이다. 서양화에서도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폴 세잔에 이르러서야 겨우 나타나기 시작하는 다시점을 신윤복은 반세기나 더 일찍 이 그림에서 실험했다.

‘이부탐춘’(이婦貪春)에서도 그의 대담한 시선이 돋보인다. 두 여인이 나뭇가지에 앉아 마당의 개 두 마리가 짝짓기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왼쪽 담을 유심히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담의 앞쪽보다 멀리 있는 뒤쪽이 더 크게 묘사됐다. 이는 역원근법으로 사실과는 명백한 모순이지만 한국화에서는 흔히 사용되는 기법이다. 신윤복이 원근법을 몰랐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내면세계를 극대화하기 위해 작가가 숨겨놓은 장치인 셈이다.

흰 도포를 입은 양반이 붉은색 옷을 입은 별감을 내세워 야밤에 수청을 들 기생을 데리고 가는 ‘야금모행’(夜禁冒行)에서도 이런 역원근법이 잘 나타난다. 그림 오른쪽에 등을 든 동자가 앞서고 있는데, 그 키가 비현실적으로 작다. 이는 동자의 신분이나 중요도가 양반과 기생에 비해 미천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큰 붓 하나로 세밀한 선까지

영화 ‘미인도’에는 신윤복(김민선 분)이 청동 붓을 선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저잣거리 씨름판에서 한판 씨름이 벌어지고 씨름판이 내려다보이는 누각에 김홍도(김영호 분)가 앉아 그 풍경을 그리는데, 그런 김홍도를 만나러 왔다가 신윤복이 붓을 선물 받는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도 신윤복(문근영 분)이 방바닥에 한지를 펼쳐놓고 붓을 들고 ‘미인도’를 그리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이 붓에도 한국화만의 비밀이 있다. 서양화 중 유화에는 점도가 높은 유화 물감을 떠서 칠하기 좋도록 납작한 붓을 사용하고 수채화에는 점도가 낮은 물감을 잘 머금는 둥근 붓을 사용한다. 한국화에서 사용하는 붓은 수채화의 둥근 붓과 비슷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강하고 탄력 있는 털을 중심에 심은 것. 한국화에서는 필력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화에서는 큰 붓 하나로 큰 모양과 작은 무늬까지 모두 그린다. 칠하는 부분의 크기에 따라 붓 크기를 바꿔가며 사용하는 서양화와는 대조적이다. 영화에서도 큰 붓 하나로 한복의 가는 동정 사이를 칠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전창림 교수 >;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국립대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홍익대 교수로 있다. 고분자화학과 미술재료의 화학적 연구에 관심이 많다. ‘알고 쓰는 미술재료’(1996), ‘생활은 화학이다’(2000), ‘색의 비밀’(2003), ‘미술관에 간 화학자’(2007년) 등을 저술했다.

문근영·김민선 얼굴, 남장여자에 어울리나

소설 ‘바람의 화원’은 신윤복이 사실은 남장여자였다는 흥미로운 설정에서 출발한다. 신윤복이 어린 시절 비극적인 사건으로 남장여자로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비밀을 캐기 위해 도화서 화원이 된다는 것.

이 때문에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영화 ‘미인도’에서 각각 신윤복 역할을 맡은 여배우 문근영과 김민선은 머리에 상투를 틀고 도포를 입은 남자로 분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얼굴은 실제로 얼마나 남성적일까.

한남대 조용진 교수(얼굴연구소장)는 “문근영과 김민선은 지극히 여성적인 얼굴”이라고 말했다. 해부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얼굴을 구분하는 기준에 비춰볼 때 둘의 얼굴 골격이 전형적인 여성에 가깝다는 것.

가령 일반적으로 남성은 미간(양 눈썹 사이)이 볼록한 데 반해 여성은 미간이 낮다. 또 소위 콧대로 불리는 코허리가 가늘고 약하다. 문근영과 김민선은 이런 두 가지 특성을 모두 지녔다. 입이 작고(문근영) 입술이 도톰한(김민선) 점도 이들의 여성적인 면모를 돋보이게 한다.

지난해 인기를 끈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남장여자로 분한 여배우 윤은혜 역시 해부학적으로는 전형적인 여성 얼굴이다. 조 교수는 “행동이나 말투, 표정, 의상이 배우의 남성성을 부각시켰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미인은 신윤복의 ‘미인도’ 얼굴과 흡사한 것으로 조사됐다. 2006년 조 교수는 청소년과 일반인 200여 명에게 20대 여대생 50명의 얼굴을 보여주고 전통적인 미인을 고르게 했다. 그리고 이 중 가장 많이 선택된 5명의 얼굴을 합성했다.

그 결과 동그스름한 달걀형에 눈썹은 가늘고 흐리며, 눈·코·입은 작고, 입술은 도톰한 얼굴이 나타났다. 반면 현대적인 미인은 갸름한 얼굴형에 크고 동그란 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현경 기자 uneasy75@donga.com

2008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전창림 홍익대 화학시스템공학과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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