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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기사][과동피플] "여러분이 풀고 싶은 문제를 향해 나아가세요"

    비마이크

     

     

    지금까지 나는 좋아하는 학문이 이끄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인생의 큰 방향을 미리 설계, 실행한 경험보다는 학문 속에서 길을 찾은 경험이 더 많다. 수학이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좋았고, 물리가 현실의 질서를 보여주는 점이 매력적이었고, 디자인이 기술과 사람을 연결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그렇게 좋아하는 방향으로 가니 자연히 ‘내가 풀고 싶은 내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역사회, 사람들, 연결, 커뮤니티. 지금의 연구는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씩 깊이 파고드는 과정이다.''

     

    KAIST를 휴학한 2년 동안 해외 교환학생, 아르바이트, 연구실 인턴 등을 경험하면서, 필자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속의 디자인을 몸에 익혔다. 무작정 네덜란드의 가구 디자인 스튜디오의 인턴십에 지원해 활동하기도 했다.

     

    정답 너머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수학

     

    처음 좋아한 학문은 수학이다. 수학을 학교의 교과가 아닌 ‘학문’으로 받아들이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게 된 건 세 분의 여자 선생님 덕이다. 


    평범했던 초등학교 3학년, 종합학원 선생님을 만나 ‘수학’이란 세계를 접했다. 이 선생님은 늘 해답보다 탐구, 과정을 강조하셨다. 그 덕분에 스스로 답을 유도해 보는 방식을 익혔다. 이때는 수학을 잘했다기보다 종일 단 한 문제를 잡고 여러 방식으로 접근하는 과정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께서 선물해 주신 책 ‘수학귀신’은 계산이 아닌 ‘증명’의 수학으로 이끌었다. 이때부터 수학이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됐다. 이 시절엔 만화 그리기도 무척 좋아했다. 쉬는 시간마다 만화를 그렸는데, 선생님이 “은지는 수학도 좋아하고 그림도 잘 그리니 산업디자이너가 되면 좋겠다”는 말씀도 하셨다. 산업디자인을 모를 때 해주신 말씀인데도 학창 시절 내내 마음에 남았다.


    중학교에서도 수학 교과의 담임 선생님을 만나 특별반 활동을 하며 ‘죄수의 딜레마’ 같은 게임 이론 문제를 접했다. 수학적 사고가 사람의 선택과 관계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놀랍고 매력적이었다. 이런 우연들이 쌓여 졸업 즈음엔 ‘나는 수학을 좋아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TJB

    1 2023년, 지역 창업 생태계의 활성화를 위해 충청권역 소상공인 멘토로 참여한 필자.  2 지역에 사는 주민들 개개인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라고 보는 필자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지역사회를 혁신하는 디자인 경험을 나누고 있다. 3 지역 창업 생태계를 위한 사회적 디자인에 관해 방송 인터뷰 중인 필자.


    생각의 토대를 단단히 다진 시간들

     

    과학고 지원은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시골에서 나고 자라 선행학습 없이 과학고에 입학한 1학년 초반의 충격은 컸다. 미적분도 모르는 채로 물리Ⅰ을 따라가야 했고, 첫 성적은 40명 중 38등이었다. 그때 “나는 어제의 나와 경쟁한다”라는 문장을 다이어리에 적었다. 


    학교 기숙사의 야간 점호가 끝나면 ‘나만의 공부’를 했다. 조용한 자습실에서 원리들을 뜯어보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스스로 사고력과 논리를 다진 ‘삽질’의 과정에서,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기초가 놓였다.


    물리가 특히 재밌었다. 수식으로 표현한 원리가 실험 결과와 일치할 때마다 짜릿했다. 이때부터 내가 어떤 ‘문제’를 좋아하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너무 거시적이거나 미시적인 세계가 아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적 크기’에서 작동하는 원리에 마음이 끌렸다.


    학술 활동은 물론 밴드와 영상 촬영도 동아리로 했고, 밤이면 기숙사 옥상에서 지구과학 책 뒷장의 성도를 펼쳐놓고 하늘을 관찰하곤 했다. 적당한 딴짓이 더해져야 공부도 집중이 잘됐다. 이 시절에 배운 것들이, 스스로 해석하고 탐색하며 타인의 속도에 흔들리지 않고 내 리듬을 찾는 방법이 됐다. 이것이 연구자로서 나의 최소 단위이다.

     

    ‘모두가 디자인하는 시대’를 쓴 에치오 만치니 이탈리아 밀라노공대 교수를 만난 필자. 이 책은 필자가 추구하는 디자인에 대한 확신을 준 큰 전환점이다.

     

    KAIST를 졸업할 수 없었던 순간

     

    과학고를 조기 졸업한 후에는 자연스레 KAIST에 진학했다. 1학년을 마치며 큰 고민 없이 ‘산업디자인학과’ 전공을 택했다. 문득 어릴 때 선생님이 말씀하신 ‘산업디자이너’가 떠올라서였다. 그런데 강의와 스튜디오 수업에서 만난 디자인은 예상과 달랐다. 친구들이 제출한 결과물의 완성도에 압도됐고, 디자인이 천부적 재능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전공의 친구들이 수없이 수정하고 수많은 습작을 작업한 흔적을 봤다. 빛나는 결과물은 이런 과정들이 쌓인 산이란 걸 깨달았다. 그 후 전시회에서도 완성작보다 습작을 더 오래 보는 습관이 생겼다. 과정 속에서 찾는 작은 변화들이 내게 더 큰 영감을 주고 있다. 


    하지만 학부 4학년이 돼서야 내가 그동안 놓친 핵심을 마주했다. 나는 산업디자이너로서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 다루고 싶은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대학원 면접장에서 이를 깨닫고 후회했다. 학교란 울타리 안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결과물을 만든 학생이었을 뿐이다. “이대로는 졸업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결국 2년간 휴학하고 해외 교환 학생과 인턴십, 카페 아르바이트, 연구실 인턴 등을 경험했다. 디자인은 반드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때 몸에 익혔다. 그리고 다시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던 중에 에치오 만치니 이탈리아 밀라노공대 교수의 ‘모두가 디자인하는 시대’란 책을 읽었다. 디자인은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고방식’이란 통찰이 깊은 울림을 줬다. 

     

    더 나은 세상의 규칙을 찾아가는 디자인

     

    현재는 ‘지역사회와 사회적 임팩트를 위한 디자인’을 연구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은 이미 있는 수요, 역량, 자원을 엮어 새로운 연결을 만드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모든 사람이 각자 일상의 디자이너로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관계를 만드는지에 주목해 왔다. 특히 ‘동네가게’를 그런 선택, 관계가 일어나고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구체적 장소로 보고, 가게 운영자가 이 장소 속의 관계를 어떻게 ‘디자인’하는지 연구했다.


    이 연구가 실제로 작동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KAIST 인근에서 동네서점도 운영했다. 캠퍼스 속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이는 환경을 직접 설계하고 싶었다. 자신이 쓴 SF 소설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처럼, 사람들이 각자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중심으로 모이고 표현하는 서점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 책과 취향을 매개로, 학생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예상 밖의 대화와 관계가 만들어졌다.


    이 경험은 동네가게 사장님들과 함께한 ‘동네 해커톤’으로 이어졌다. 주인과 단골이 함께 가게의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을 찾는 실험이었다. 거래 관계가 고민, 실험하는 관계로 전환되자 가게와 손님 간에 새로운 층위의 관계가 생겼다. 지역을 혁신하는 디자인은 새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미 가진 창의성을 존중하고 그것이 스스로 드러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일임을 이 과정에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결국 중요한 건 정답이 아닌, ‘나를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다. 돌아보면 내 모든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연구가 가능했다. 이공계 진학이나 진로를 고민하는 독자 여러분도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열고, 낯선 경험에도 한 번쯤 발을 들이며, 여러분만의 속도로 걸어가길 바란다. 여러분이 쌓은 시간과 관심이 이어져 “아, 나는 이런 문제를 풀고 싶은 사람이구나”, 말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지금 여러분 눈앞의 배움과 흥미들을 놓치지 말고 그 순간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과동 피플에게 묻는다 

     

    당신의 호기심은 보통 어떤 순간에 시작되나요?
    보통의 순간, 보통 사람들의 창의성, 끈기, 집요함을 발견할 때. 사람들의 이야기와 도전은 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과학동아에서 가장 호기심을 자극한 기사는 무엇이었나요?
    2025년 11월호 ‘브레인롯’ 특집을 흥미롭게 읽었다. 소셜미디어 서비스의 ‘뇌 점유 경쟁’이란 표현이 인상 깊었다. 디자인 분야에서도 이와 유사한 ‘UX(사용자 경험) 다크 패턴’이란 개념이 있다. 기업이 원하는 대로 사용자의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자가 눈치채기 어려운 방식으로 UX를 설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숏품에 중독되고 브레인롯 현상이 생기는 것은 개인의 의지나 습관의 문제일까, 그런 행동을 유도한 환경의 문제일까. 이 질문을 다시 한번 곱씹게 해준 기사다.

     

    지금 과학동아를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우리가 무심코 집어 드는 책, 눈길을 끄는 단어나 이미지에는 이미 우리의 호기심이 담겨 있다. 과학동아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 안에 있는 어떤 ‘질문’이 깨어난다는 신호이다. 지금의 작은 관심이 언젠가 인생의 중요한 단서를 만들어줄 것이다. 자신의 호기심을 믿고 계속 탐구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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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글 및 사진

      우은지 KAIST 산업경영연구소 연수연구원
    • 에디터

      라헌
    • 디자인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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