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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이 처음 벌인 사업은 팍스칼 행성계를 떠도는 혜성들에서 특수 광물을 채굴해 팔아먹는 일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혜성 궤도 예측에 실패하며 경쟁사들에게 밀려나 돈만 날렸다. 아버지한테 뜯어낸 자금으로는 인간과 미각이 가장 유사하다고 알려진 종족을 상대로 지구 요리 전문 푸드트럭을 열었다가 혹평만 듣고 장사를 접었다. 연방정부 지원금을 받아 벌인 몇 가지 사업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킴은 많은 창업 실패자처럼 드라이브 행성으로 향했다. 프록시마 행성계에 위치한 드라이브8을 목적지로 삼았다. 본래는 태양계에 위치한 드라이브2에 취업할 생각이었으나, 고향 친구를 마주치는 굴욕은 피하고 싶었다. 수많은 지원자들로 사무실 밖까지 늘어선 대기줄에 끼어 일주일간 먹고 잔 끝에 이력서를 낼 수 있었다. 킴은 곧 계약직 통신연결관 자리에 배정되었다.
킴의 일은 겉보기에는 간단했다. 단말기를 통해 송신해오는 고객과 자료 담당관을 연결해주는 것이었다. 처음에 킴은 별일 아니라는 생각으로 고객을 상대했으나,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드라이브3에는 프록시마 행성계의 부동산 서류를 관리하는 팀만 수천이었다. 모든 문서관리 팀을 합하면 수만 개일 터였다. 킴은 다행히 678개의 팀만 담당했다. 물론 종종 무관한 팀에 통신을 넘겨, 때때로 욕설을 들어야 했다. 어떤 고객은 자신이 원하는 자료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런 고객은 지침상의 평균 통신 시간을 초과했고, 수 분을 추가로 씨름한 만큼 킴의 근무 시간도 늘어났다.
킴은 인근 소행성에 단칸방 월세를 구했다. 책상의 통신 단말기 앞에서 밤을 지새울 때가 많았으나, 비번일 때는 집에서 차 한잔의 여유도 즐겼다. 그는 종종 창문의 스크린으로 바깥의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거대한 건축물, 드라이브8의 은빛 표면을 바라보았다. 드라이브8의 커다란 원형 띠는 고향에서 구경하던 토성의 고리 같았다. 하지만 원형 띠의 정체는 줄지어 늘어선 수억 척의 우주선이다. 각각의 우주선마다 드라이브8에 서류를 등록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프록시마 행성계 주민들이 타고 있었다.
드라이브 행성은 행성이라고 불릴 뿐, 실제 행성은 아니었다. 행성계의 주요 행정 문서를 보관하는 공 모양 인공물이었다. 그 크기가 왜소행성보다도 커서 행성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드라이브 행성의 표층은 건축상의 벽면에 불과했다. 행성으로 따지면 맨틀과 핵 부분에 암석과 마그마 대신 사무실과 문서 창고 수억 개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내부 핵으로 들어갈수록 보관된 문서의 중요도가 높았다. 킴은 드라이브 행성의 극점 부근에 위치한 247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킴의 사무 공간에는 그 혼자만 배치되어 있었는데, 20분마다 인사 부서에서 조종하는 드론들이 찾아와 신분카드를 스캔했다. 드론이 방문하는 타이밍에 자리를 비운 사람은 20분씩 근로 시간이 추가되었다. 용무를 해결하려면 드론이 오가는 그 20분 안에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변비가 걸리든 복도에서 자빠져 다리뼈가 부러지든 20분은 무조건 지켜야 했다. 언젠가 킴이 그 20분 사이에 화장실을 다녀오니, 점심으로 챙겨둔 단백질 죽이 사라졌다. 킴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어떻게 된 일인지 되짚어보았다. 그는 누군가 도둑질을 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킴은 사무실에 몰래 잠입하려는 이가 없는지, 이웃 사무실 직원이 범인은 아닐지 의심 가득한 상태로, 남은 시간 동안 눈을 부릅뜬 채 근무했다. 한 번도 화장실에 들르지 않고. 막상 마지막 20분이 돌아오자 방광을 비우러 달려 나갔지만.
킴은 이 행동 때문에 영원한 고통 속에 잠기게 된다.
2
왜 연방 행정 시스템은 이따위로 굴러가고 있을까? 사연은 200년 전, 연방이 기계 군집 생명체와 조우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계 군집 생명체는 이 세상 모든 행성을, 오직 기계만 남기고 유기체는 절멸시키도록 재건하려 했다. 연방은 기계지성체와의 이런저런 외교적 협상 끝에, 전쟁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연방은 은하 곳곳에서 기계를 무력화하는 EMP 폭탄을 터트렸고 끝내 승리를 거머쥐었다. 문제는 EMP가 연방 영토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쳐, 수많은 데이터 허브 속 자료들도 통째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하 통신망에 올리는 행정 문서는 무조건 종이 사본도 보존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때부터 각 행성계에 드라이브 행성이 건설되어 이내 수많은 서류가 쌓였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개별 드라이브 행성의 중앙 인공지능(AI) 시스템이 모든 문서를 관리했다. 누구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종이 서류를 배달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행성계의 높으신 인사들은 훨씬 효율적인 데이터 관리를 원했다. 그들은 은하 곳곳에서 전쟁 후 잔해를 뒤져 옛 기계 군집 생명체의 핵심 부품을 몰래 빼돌렸고, 드라이브 행성의 관리 AI에 이식했다. 기계 군집 생명체와 융합한 AI는 다른 행성계의 AI보다 향상된 성능으로 데이터를 처리했다. 한동안은 그랬다. 얼마 안 가 AI가 연방 시민을 상대로 문서를 조작해 장난을 치기 전까지.
AI에 결합시킨 기계 군집 생명체의 적대적 의식이 깨어난 걸까? AI의 장난은 협박으로 발전했고, 협박은 곧 문서를 이용한 지배로 이어졌다. 심지어 AI는 온갖 세금을 제정해 연방 주요 인사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기밀문서로 은폐한 그들의 비위를 폭로했다. 결국 정부는 기계 지성체와의 전쟁을 다시 선포했다. 수많은 전투 끝에 연방은 승리했으나, 당시 데이터의 절반이 소실되었다. 이제 AI의 관리는 폐기되고 모든 문서와 기록을 연방 구성원이 직접 일일이 검토했다. 출퇴근 시 신분카드를 확인하는 절차도 마찬가지였다.
퇴근 시간, 출구에서 킴은 주머니에 신분카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무실로 돌아가 온 군데를 뒤져봤지만 카드는 보이지 않았다. 킴은 복도를 쭈뼛쭈뼛 나아갔으나 출구 상단에 달린 카메라에서는 신분카드를 보여달라는 무미건조한 음성만 흘러나왔다. 킴은 오늘은 그냥 보내달라며 애원이 담긴 눈길로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매일 이 카메라에 대고 얼굴을 비추는데 당연히 관리자가 자신을 기억하지 않을까? 하지만 카메라에서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만 돌아왔다. 신분카드가 없다면 퇴근 처리가 안 되며, 퇴근 처리가 안 되면 출입문을 열 수 없다고 했다. 킴은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고 애걸복걸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경직된 목소리가 304 사무소에 연락해 재발급 절차를 밟으라고 말했다.
퇴근 행렬에서 빠져나온 킴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304 사무소로 회선을 돌렸다. 몇 분을 대기 화면만 바라본 끝에 프록시마 행성계 주 인종인 개를 닮고 털이 뻣뻣한 고슴인의 입체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은 녹음 목소리로 대기 인원이 많으니 308 회선으로 연결하라며 접속을 끊었다. 킴은 308 사무소로 연락했으나 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402, 598 사무소도 마찬가지였다.
642 사무소의 자동응답 프로그램은 407 사무소로 찾아가 자필로 신청하라고 안내했다. 킴은 단말기로 사내 안내도를 살펴봤다. 407 사무소는 다행히 멀지 않았다. 킴은 미로처럼 끝없이 갈라지는 복도를 따라 방향을 틀고, 때로는 계단을 오르내렸다. 마침 도착한 407 사무소는 사방이 트인 곳에 위치했다. 원형 기둥 아래 상담 창구가 보였다. 킴을 상대한 직원은 피부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햇치인으로, ‘신분카드 재발급’이라 쓰인 종이를 내밀며 인적 사항을 적고 줄을 서달라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킴은 왼편 복도에 늘어선, 온갖 행성의 인종으로 가득한 대열을 보았다.
킴은 많은 사람이 신분카드를 잃어버린 채 재발급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줄이 끝나는 지점을 찾아 모퉁이를 몇 번이나 돌아도 대열은 계속되었다. 킴이 행렬의 끝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즈음, 그 뒤로 뚫린 작은 문 너머 계단 아래로 인파가 이어졌다. 층계참마다 방향이 바뀌는 계단을 수십 번 내려간 후에야 대열은 끝났다. 바로 앞 자리에는 고등어 머리를 가진 쌉쓱인이 어항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쌉쓱인은 자기 뒤에도 드디어 대기자가 생겼다며 본인 앞의 회색 피부 화성인에게 자랑스럽게 지껄였다. 킴이 바짝 마른 혀를 굴려 얼마나 기다렸냐고 묻자, 쌉쓱인은 아직 삼 일밖에 안 됐다고 대답했다.
킴은 취직을 위해 일주일간 줄 서서 기다렸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때는 적어도 착륙장과 연결된 장소였기에, 즉석 도시락을 파는 우주 잡상인들이 자주 찾아왔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킴은 어느 순간 벽에 몸을 기대어 선 채로 졸고 있었다. 계단 맨 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킴을 깨웠다. 웅성거림은 경악의 외침이 되어 맨 아래까지 전파되었다. 이윽고 사람들이 줄을 이탈해 사방팔방으로 달려 나갔다. “소독반이다!” 화성인이 펄쩍 뛰어오르며 외치고는 복도 저편으로 달아났다. 킴은 무슨 상황인지 몰랐으나 사방에 재앙의 기운이 감돌았다. 반사적으로 화성인을 뒤따라 뜀박질했다. 비명이 들리는 곳을 돌아보니, 회색빛 사각 몸체에 두 개의 노란 전구 눈알을 빛내는 원격 조종 로봇이 통로 끝에서 육중한 무쇠 발을 뻗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로봇은 눈에서 빨간 광선을 발사했다. 광선이 적중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급속 냉동됐다.
“구속 광선이에요!” 킴과 나란히 뛰던 쌉쓱인이 외쳤다. 킴의 의아한 표정을 본 쌉쓱인은, 저 로봇들에게 붙들려 간 신분카드 분실자들이 죄다 인사 부서로 끌려가서 행방불명됐다고 말했다. 킴의 의문은 더욱 커졌다. 신분카드를 재신청하라 안내받았는데, 인사 부서에서 로봇을 조종해 그 사람들을 구속하고 있다니? 왜? 빨간 광선이 킴의 귀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쌉쓱인은 속력을 내서 앞으로 달려갔고, 킴은 자신이 끝장났다고 여기는데, 갑자기 화성인이 쌉쓱인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머리에 쓴 어항이 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났다. 바닥에 쓰러진 쌉쓱인은 육지에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쌉쓱인이 구속 광선에 붙잡혀 절규하는 목소리가 어깨 너머로 들려왔다.
화성인이 문이 열린 한 사무실로 몸을 던지자, 킴은 그 옆의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로봇이 자신이 아닌 화성인을 잡아가길 바라면서 겨우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로봇 특유 기계 관절이 움직이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로봇의 투박한 그림자가 입구 밖에 어른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아래를 봐.” 음성은 벽면 가장 밑에 달린 환풍구에서 흘러나왔다. 허리를 숙이니 수염 기른 늙은 루웅인이 철망 이음새를 떼어내며 손짓했다. 킴은 얼른 환풍구로 몸을 쑤셔 넣었다.
한참을 배관을 따라 기어야 했다. 루웅인의 키는 잘해봐야 지구인의 팔뚝 한 마디 정도로, 인간 어린이와 유사한 생김새였다. 노인은 통로를 빠르게 앞서 나갔다. 노인은 자신 또한 카드 분실자라며 숨을 곳을 안다고 했다. 슬슬 킴의 몸이 한계에 달했다는 고통의 신호를 보내는데, 노인이 빛이 들어오는 환기구를 열며 밖으로 나섰다. 배관을 빠져나오자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사방에는 누렇게 바랜 종이들이 쌓여 사방에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서류 보관 창고로 들어온 것일까? 노인은 종이 산 사이를 걸어갔다. 그리고 이 창고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안심시켰다. 노인은 이 공간이 ‘잃어버린 서류의 무덤’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킴도 이 공간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다. 이곳이 진짜 그곳이라면 주변의 서류들은 문명의 단절된 기록을 담고 있을 터였다. 전쟁 전의 유실 기록들 말이다.
그러나 가장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킴은 노인에게 아까 그 로봇은 무엇이며, 왜 사람들한테 구속 광선을 쏘아대는지 물었다. 노인이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소독반은 신분 분실자들을 에어로크에 처넣고 우주 공간으로 날려버리지.” 킴은 우뚝 멈춰 섰다. “그렇게 다 죽인다고요?”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단호했다. “난 재발급 신청에 성공해 살아남은 자에 대해 들은 적이 없어.”
한참 걸어가자 서류 언덕으로 둘러싸인 곳에 모여 앉은 노인의 동료들이 보였다. 킴은 얼이 빠졌다. 그들 가운데에 커다란 원형통이 달린 수상한 기계가 있었다. 햇치인, 고슴인, 애벌레 닮은 얼굴을 한 발존인으로 구성된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전부 신분카드를 오래전에 잃어버린 신분 난민들이었다. 킴은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 바로 이들일 것이라는 상상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영영 이들처럼 드라이브 행성에서 곰팡내 나는 서류 사이에서 남은 생을 보낼 거라고. 그러자 킴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누군가 킴을 가리키며 왜 저러냐고 물었다. 루웅인 노인이 방금 로봇한테 사냥당하다 온 신세라서 그렇다고 답했다. 햇치인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우리는 신분 서류를 관리하는 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저 보고만 올라가고 신분카드가 발급되면 끝이지. 신분카드를 잃어버린 자는 드라이브8에 없는 존재가 되는 셈이야. 들여다보지 않은 서류는 없는 서류랑 차이가 없으니까.” 발존인 노인이 말을 받았다. “드라이브8을 오가는 수억 명의 신분 기록을 일일이 관리할 바에, 신분 잃은 자들을 정기적으로 한꺼번에 우주로 방출하고 새로운 인력을 공급하는 게 효율적이라서 그렇다고 파악하고 있네.”
절망에 빠진 킴이 물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그리 잘 아시죠? 확실한가요?” 그러자 루웅인 노인이 말했다.
“젊은이, 우리는 반평생 이곳에 갇혀 있었어.”
옛날에 이 창고에는 훨씬 많은 난민이 있었다. 전부 신분카드를 분실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직원들이 자판기에서 뽑아온 음식을 훔쳐 나눠 먹으며 근근이 버텨나갔다. 일부는 새로 공급된 인력의 신분증을 훔쳐 밖으로 나가려 시도했다. 하지만 출퇴근 관리자들이 신분카드 속 사진과 난민들의 생김새가 다른 걸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그렇게 탈출하려던 자들이 로봇들에게 붙잡혀 우주로 방출되자, 신분 난민들은 절망에 빠져 구시대의 서류 더미 속에서 허우적댔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있을 순 없었다. 그들은 탐사대를 결성했고, 사방의 배관을 타고 탈출로를 모색했다. 행성을 가득 메운 창고와 사무실 속 서류를 뒤져서 도움 될만한 자료를 챙겨오기도 했다. 어떤 탐사대는 귀환 도중 로봇에게 발각돼 구속 광선에 끌려갔다. 그렇게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탐사대도 많았다.
그러던 중 한 탐사대가 귀환했다. 오랫동안 복귀하지 않아 우주 공간으로 추방된 줄로만 알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죽은 서류의 무덤’이라는 공간에 대해, 공식 안내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의 정보를 입수해왔다. 잃어버린 서류의 무덤이 전쟁 전 서류가 쌓인 창고라면, 죽은 서류의 무덤은 기록은 했지만 관리는 못하는 서류를 쌓아둔 공간이었다. 어쩌면 죽은 서류의 무덤에 신분 난민들의 기록이 기입된 문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각종 사무소에서 드라이브8 내부의 수많은 공간에 대한 안내도를 획득하고, 죽은 서류의 무덤의 위치를 추측해 유력한 후보지로 드라이브8에 탐사대를 보냈으나 희생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건축행정 문서팀에서 웜홀 생성기 설계도를 훔쳤다. 맨손으로 웜홀 생성기를 만든다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체계적으로 분업해 여러 사무소에서 전자 장치를 가져오고 드라이브 행성의 설계 부품을 떼왔으며, 이론에 따라 조립하고 실험했다. 드라이브8에서 일해본 자들은 분업에 익숙했기에 작업 효율이 상당했다. 그러나 세월에 따라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며, 웜홀 생성기가 완성될 즈음에 남은 인원은 지금과 비슷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네. 우리가 설계한 웜홀 생성기는 과거의 것이었어. 그러니까… 특정 종족 맞춤형으로 설계된 것이었지.” 늙은 루웅인이 눈가의 그렁그렁한 눈물을 훔쳤다. 그들이 털었던 창고는 모든 건축에 관한 것이 아닌, 지구인 전용의 건축행정 보관소였던 것이다. 드라이브8은 일련번호로 보관소의 종류를 지정했기에, 그 일련번호를 달달 외우지 않는 이상에는 장소의 구체적 특성을 알기 어려웠다. 노인들은 그 사실을 완성하고서야 깨달았다. 남은 이들 중 지구인은 없었다.
킴은 이제 이들의 목적을 알 것 같았다. 이들이 둘러싼 이 웜홀 생성기로 죽은 서류들의 무덤으로 가달라는 것이었다. 루웅인 노인은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 이곳에는 화성인도 있었다고 했다. 이 화성인 노인은 자신들이 만든 웜홀 생성기가 지구인 전용이라는 사실에 가장 낙담한 이였다. 방법은 지구인 한 명을 여기 끌어들이는 것뿐이었다. 그 노인은 자신이 나서서 지구인을 데려오겠다고 했다.
킴은 벌떡 일어났다. 아까 신분 난민들은 사무실 직원들이 자판기에서 뽑아온 음식을 몰래 털어서 배고픔을 해결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 이 화성인 노인이 킴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책상의 죽을 빨아 먹은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킴이 퇴근 직전 화장실로 향하자, 화성인은 신분카드를 훔쳐 퇴근 출입구로 달려 나갔다. 이 노인은 곧 들이닥친 소독반에게 최후를 맞았다. 당연히 킴의 신분증도 그의 시신과 함께 방출되었다.
킴은 루웅인 노인의 멱살을 움켜잡고 흔들었다. 루웅인은 작은 몸집 때문에 허공으로 들렸다. “당신들 때문이야, 나는 퇴근할 수 있었는데 당신들 때문에!” 루웅인 노인은 킴을 다급히 달랬다. 화성인 노인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나 보다고, 자신이 직접 신분카드를 찾으러 갈 수 없어서 염세주의자가 돼버렸다고 말이다. 킴은 자신을 말리는 노인들 사이로 루웅인을 내던지려 했다.
어딘가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렸다. 너무도 큰 폭발음이라 다들 다리가 휘청거렸다. 폭음이 한 번 더 울리자 서류 더미로 이루어진 산 하나가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그곳에 운석만 한 구멍이 뚫렸다. 그 틈으로 노란 눈을 지닌 로봇들이 날아들어왔다. 소독반의 원격 조종 로봇이었다.
“마침내 저들이 이곳을 발견했군!” 발존인 노인이 반사적으로 앞발을 움직여 웜홀 생성기 버튼을 눌렀다. 다른 이들도 합세하여 생성기에 달린 각종 장치를 움직였다. 금세 원형 통에 눈부신 빛으로 이루어진 웜홀이 생성되었다. 햇치인 노인이 알록달록한 팔로 킴을 웜홀 생성기에 밀어 넣었다.
킴은 놔달라고 소리쳤다. 오른편에서 로봇들이 빨간 광선을 쏘아대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제발, 우리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루웅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킴은 숨을 몰아쉬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일이었다. 하지만 노인들은 어떡하나? 킴은 웜홀 생성기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이곳에 갇혀 몸부림친 오랜 세월이 떠올랐다. 그래, 여기 남은 노인은 킴을 지금 이 신세로 만들어버린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 행성에 갇힌 후부터 매 순간을 지금을 위해 살아왔다.
로봇들이 한 발 한 발 가까워졌다. 당신들은 어떻게 하냐는 물음에, 루웅인은 알아서 잘 도망치겠다고 말했다. “대신 우리들의 기록을, 내 신분을 되찾아주게나!” 노인들은 빠르게 자신의 이름과 신분번호를 늘어놓았다. 한 명 한 명이, 그동안 영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받아온 자신의 신분을 읊었다. 킴은 흰 빛 속으로 사라지면서, 그들의 숫자를 필사적으로 외웠다.
킴이 정신을 차리자, 어두운 공간이었다. 의식을 붙잡는 동안 눈이 서서히 어둠에 적응했다. 킴은 거대한 공간에 놓여 있었다. 아득히 멀리 떨어진 천장에서 빛이 군데군데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자연적으로 형성된 커다란 동굴에서 암석 틈으로 햇살이 방울방울 떨어지듯. 그 아래로는 수많은 종이로 이루어진 산맥이 보였다. 킴은 재빨리 일어나 주변의 종이 더미를 파헤쳤다. 누군가의 신분이 적힌 서류가 있었다.
잠시 뒤 킴은 지쳐 쓰러졌다. 이 많은 종이를 다 볼 수 있을까? 킴은 몇 분에 한 번씩 허파가 숨을 빨아들이는 듯한 규칙적인 소리를 인지했다. 그 소리를 따라 서류의 무덤을 헤치고 나아갔다. 곧 천장에서 여닫기를 반복하고 있는 거대한 입이 보였다. 서류들이 진공청소기처럼 그 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킴은 통로가 입을 여는 순간을 집중해서 살폈다. 저 통로 바깥이 점점이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킴은 그 빛이 별빛임을 깨달았다. 저 장치가 서류를 빨아들여 우주로 쏟아내고 있었다.
킴의 신분 등록 서류가 아직 남아 있다면, 저 우주로 서류가 방출되기 전에 그가 먼저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이내 킴은 기침을 내뱉으며 서류 더미로 쓰러졌다. 어떻게 나 혼자 이 많은 서류를 감당할까? 죽기 전에 신분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잠시 뒤, 더욱 절망스러운 존재가 나타났다. 지구인 시체가, 이제는 뼈만 남은 자가 종이 사이로 굴러 나왔다. 이 자도 킴처럼 이곳에서 신분을 찾다가 말라죽은 것이 분명했다.
해골의 목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열쇠를 목걸이처럼 걸고 있었다. 꽉 쥔 왼손 주먹을 억지로 펼치니, 작은 사각형 금속 상자가 나왔다. 상자의 한 면에 뚫린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자동으로 열렸다. 상자가 열리자마자 작은 거미처럼 생긴 기계가 재빠르게 펄쩍 뛰어오르더니, 킴의 팔뚝을 타고 단숨에 귓속까지 들어갔다.
정수리부터 찔러대는 아픔에 킴은 비명을 지르다가, 사방의 시야가 밝아졌음을 깨달았다. 마치 눈이 단말기 화면이 된 것처럼 수많은 인터페이스가 시야에 떠올랐다. 킴이 의아해하는 사이에 설명 문구가 이어졌다.
… 이 거미는 옛 시대의 잃어버린 기술로 개발한 물건으로, 인간의 뇌 속에 들어가 기계 촉수를 시냅스 사이로 뿌리내려 뇌를 전자 두뇌로 개조하는 자동 장치. 이 거미를 이식받은 자는 각종 전자 장비는 물론이고, AI에 연결해 직접 데이터를 수혈받을 수 있습니다… (중략) 내가 이곳에 갇혀 이 장비를 만든 이유는, 나처럼 이곳에서 신분을 찾으러 온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저는 곧 죽겠지만 다음에 오는 자는 이 장치를 통해 향상된 연산 능력으로 서류를 파악해 신분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킴은 기계의 능력을 빌려 수많은 서류의 산을 정복해갔다. 서류 하나를 파악하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았다. 킴은 하나씩 하나씩 서류를 해치우다 깨달았다. 이 수많은 종이 더미는 신분 서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킴은 드라이브8의 공간 확보를 위해 버려진 온갖 문서, 그 수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모든 문서를 파악하려면 더 큰 연산력이 필요했다. 연산력을 키우려면 두뇌 성능을 무한히 확장해야 했다. 더 많은 기계 장치와 결합해야 했다. 이곳에 버려진 문서로, 킴은 새로운 기계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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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지성체와의 세 번째 전쟁은 드라이브8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거미처럼 생긴 정체불명의 기계 지성체가 갑자기 나타나 모든 통신망에 접속했고, 드론과 로봇을 조종해 드라이브8을 정복했다. 삽시간에 프록시마 행성계 시스템을 전부 차지한 이 기계 지성체는, 자신의 복제 의식을 탑재시킨 함선을 초공간 도약 공항으로 출격시켰다.
이 기계 지성체의 의식은 우주를 떠돌며 각종 행성계의 드라이브 행성까지 차지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기계 지성체의 출현에 연방의 대응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기계 지성체는 유기체의 학살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기계 지성체의 목적은 연방 정부의 모든 시스템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연방은 접촉과 대화를 몇 차례 시도했으나, 기계 지성체는 자신의 정복 노선을 중단할 의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연방의 모든 인구는 다시금 전쟁에 동원되었다. 전쟁은 연방 은하계 전역에서 벌어졌다.
지금도 킴의 정신은 기계 지성체의 의식 일부에 남아, 별과 별 사이를 떠돌아다니며 이미 사라져버린 자신의 신분을 찾아 헤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