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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이버 공간에서 탄생한 무령왕릉

6세기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

1971년에 실시된 무령왕릉 발굴은 백제 문화의 복원 그 자체라고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의 기념비적 발굴이었지만, 단 하루만에 완결된 발굴이라는 오명을 함께 안고 있기도 하다. 30년이 지난 지금, 백제 문화의 디지털 복원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 무령왕릉을 바로 눈앞에서 느껴보자.

 

무령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진묘수’라 불리는 돌짐승이 있다. 사진은 디지털로 복원한 진묘수의 모습.


1971년 7월 5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는 하루지만, 충남 공주에서는 대대적인 사건이 발생한 의미 있는 날이었다. 이때 참으로 우연히 백제 무령왕릉이 발견됐다. 1천4백여년 전 백제 왕국을 이끌었던 강력한 왕 중 한사람이었던 무령왕을 잠재웠던 무령왕릉. 한국 고고학 발굴사의 최대 성과였으며,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백제 문화의 찬란한 영광이 되살아난 기념비적 발굴 작품이었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무령왕릉 근처에는 ‘송산리 6호분’이라 불리는 고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 6호분 주위에 자꾸만 물이 차올라 지하수를 차단하기 위한 배수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작업을 위해 배수구를 파던 어느날, 바닥을 보니 땅이 아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은 그것이 일반적인 흙이 아닌, 바위가 부서진 현상임을 알았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못이겨 그곳을 좀더 깊이 파들어가기 시작했다. 점점 더 파들어가자 검은 벽돌이 나타났고, 결국 아치 모양의 벽돌 구조가 드러났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이게 왕릉의 입구임을 깨달았다. 발굴은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 알고 치밀하게 발굴해 들어간 이집트 투탄카멘 왕릉과는 달리, 너무나 우연히 진행된 것이었다.


정교하고 화려한 백제 문화의 보고

결국 사흘이 더 지체된 7월 8일, 드디어 발굴이 시작됐다. 묘실의 입구를 막아 놓은 벽돌더미를 헐어내고 구멍으로 왕릉의 내부를 들여다본 발굴단은 흥분과 놀라움에 환호성을 질렀다. 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웬 괴물같이 생긴 짐승 한마리가 버티고 자신들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바로 ‘진묘수’라 불리는 돌짐승이었다. 고대로부터 왕릉 입구에는 외부 도굴꾼이나 침입자로부터 왕릉을 지키기 위해 돌로 만든 괴물을 설치했다. 무령왕릉도 외부 침입으로부터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입구에 돌로 만든 괴물인 진묘수를 세워놓은 것이다. 진묘수는 그렇게 1천4백75년 동안 말없이 홀로 무령왕릉을 지켜왔다.

발굴된 무령왕릉의 구조는 길이 4.2m, 넓이 2.7m, 높이 2.9m로 밝혀졌으며, 형식은 기존의 무덤 형식과 전혀 다른 전축분이었다. 전축분이란 정교하게 구운 벽돌 수천개로 만든 무덤을 말하는데, 무령왕릉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진 검은 벽돌이 아주 놀랄 만큼 정교하게 쌓여 있었다. 그토록 장구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왕릉 문에 쌓여있던 수십장의 벽돌을 걷고 왕릉 안을 들여다봤다. 내부는 실같은 나무 뿌리들이 거미줄처럼 바닥까지 엉켜 잘 보이지 않았으며, 안개 같은 기운이 깔려 있었다. 1천4백75년 전 왕릉 안에 담겨있던 공기가 20세기 세상으로 다시 뿜어져 나온 셈이었다.

왕의 시신은 금으로 된 꽃무늬 왕관을 쓰고 금장식이 붙은 나무 베개를 베고 있었다. 귀에는 귀고리, 목에는 목걸이를 했고, 허리에는 금장식으로 된 허리띠를 차고, 발에는 금으로 된 신발을 신었다. 왼손에는 큰칼을 잡고 반듯이 누운 상태였으며, 시신은 썩어 뼈 한쪽도 남아있지 않았다.

왕비의 시신은 금으로 된 꽃무늬가 있는 왕비관을 쓰고 있었으며, 연꽃, 봉황 등을 그린 화려한 나무 베개를 베고 있었다. 역시 귀에 귀고리를, 목에 목걸이를 하고, 팔에 금팔찌를 끼었다. 허리에는 작은 칼을 차고 발에 금으로 된 신발을 신고 반듯이 누워있었다. 왕비관에서도 사람 뼈가 나오지 않았으나 다만 30대로 추정되는 여자의 어금니 이빨 하나만 나왔다.

왕릉 안에는 동쪽과 서쪽에 2개, 북쪽에 모두 1개의 등잔 구멍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백자 등잔이 놓여 있었다. 기름을 부어 불을 켰던 것으로 등잔의 기름 심지가 그대로 남았는데, 심지어 불에 그을린 자국까지 고스란히 있었다. 아마도 등잔에 불을 붙이고 내부를 환하게 한 후 무령왕릉의 입구를 막아버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윽고 무덤 내부에 산소가 다 없어질 때까지 등불은 며칠이고 계속 타올랐을 것이다. 무령왕이 다시 살아나 무덤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환하게 밝힌 것일까.
 

무령왕비의 시신과 유물을 바탕으로 재현한 디지털 무령왕비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무령왕비의 시신은 금으로 된 꽃무늬가 있는 왕비관(①)을 쓰고, 귀에는 귀걸이(②), 목에는 목걸이(③)를 하고 있었다. 발에는 금으로 된 신발(④)을 신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실제 유물은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최악의 발굴로 남아

무령왕릉은 발견 당시 ‘왕릉이 발견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너도나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서로 무덤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아우성이었고 사진기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먼저 내부를 촬영하는 특종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다. 마치 무령왕이 저 안에 살아있어 내가 그를 꼭 봐야겠다는 듯.

그래서 조사단에선 재빨리 긴급 회의를 열고 겨우 내부를 조명할 수 있는 기자재를 갖춘 방송기자를 먼저 들여보내는 선에서 양해가 이뤄졌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발굴조사가 이뤄지기 전에 발굴조사 요원보다 기자가 먼저 들어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연출됐다. 그 결과 무덤 내부의 복도 길에서 무령왕과 왕비의 관을 지키는 돌짐승의 머리에 꽂혀 있는 철제 장식이 부러지고 바닥에 흩어져 있던 청동숟가락 하나가 밟혀 부러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어쨌든 무령왕릉의 발견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전해지고 세상의 이목이 온통 공주로 쏠렸다. 더구나 TV 방송이 나간 후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굴 순서와 방법의 의논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한시바삐 내부 조사를 끝내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야간 작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단 하룻밤 사이에 발굴 조사를 모두 마쳤다.

이렇듯 무령왕릉 발굴은 한마디로 치욕적 발굴이었다. 한 전문가의 입에서 “도굴꾼이라도 이런 식으로 발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발굴 작업은 몰려든 인파 때문에 사고의 우려가 높아 야간에 10시간만에 끝냈다. 사실 이 정도 규모의 발굴이라면 짧아도 6개월은 걸리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10시간이라니? 심지어 큰 유물만 대충 발굴하고 나머지 유물은 삽으로 자루에 쓸어 담는 황당함까지 더해졌으니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유물들이 파손됐을까. 그래서 지금도 유물을 긁어 넣었던 마대자루를 툴툴 떨어내면 자루 안에서 왕릉 내부의 금반지가 ‘땡그랑’ 하고 떨어져 나온다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까지 전해진다. 돌이킬 수 없는 이런 무지로 인해 찬란한 우리 문화 하나가 다시 어둠 속으로 영영 묻혀버리게 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고고학 발굴사에 남을 수 있을 왕릉 발굴을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어처구니없이 졸속으로 끝내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우리나라 발굴사에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됐다.

공주시는 무령왕릉의 보존을 위해 왕릉문을 완전히 폐쇄했다. 약 1천4백75년 동안 충남 공주의 지하에서 고이 보존됐던 왕릉이 불과 발견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어둠 속으로 숨은 것이다. 이후 일반인들은 무령왕릉의 내부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1980년대까지 무령왕릉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왕릉 안을 들여다보고 한번씩 감탄하고 나올 수 있었던 낭만이 존재했건만, 지금은 왕릉 앞에 이르면 굳게 닫힌 자물쇠의 굳은 빗장만 보게 된다. 보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이제 다시는 무령왕릉 안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무령왕릉의 발견은 백제 문화의 높은 수준과 그 확실한 연대를 증명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6세기 동양 문화사에 찬연히 빛나는 백제 문화의 위치를 드높인 역사적인 문화유산인 무령왕릉. 그런 왕릉의 내부를 다시 체험해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디지털로 복원한 무령왕릉 내부의 전체적인 조감과 각기 다른 각도 에서 바라본 모습.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통해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했던 왕릉의 내부를 다시 체험 할 수 있다.



무령왕릉을 디지털로 만나다

디지털 복원은 이런 꿈을 가능하게 해준다. 게다가 왕릉의 발굴을 순식간에 해치운 바람에 출토된 유물의 위치가 왕릉의 어디쯤 있는지 정확하지 않은 사실까지 ‘교정’할 수 있다. 디지털 무령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디지털 복원 과정에서는 박물관의 철저한 고증과 전문가의 자문을 토대로 출토된 유물을 갖고 그 위치를 하나하나 다시 산정해야 한다. 국립공주박물관 진열장에 전시된 유물을 들고 나와 다시 무령왕릉 안으로 들어가 재배치할 수 없는 상황. 단 하나의 방법은 유물을 가상으로 왕릉 안에 배치해보는 것이었다.

디지털 무령왕릉 작업에서는 맨 먼저 6세기 당시 무령왕릉과 비슷한 중국 남부지방의 무덤들을 참조했다. 왜냐하면 무령왕릉과 비슷한 양식의 무덤이 당시 중국 남부에 수백개가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국립공주박물관 내에 있는 무령왕릉과 똑같은 1:1 모형을 통해 무령왕릉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왕릉 내부 복원 도면과 발굴조사 보고서에 나온 실측 일러스트, 그리고 당시 무덤 내부를 촬영했던 사진을 기초자료로 무령왕릉 전체의 모습을 컴퓨터그래픽스로 잡아냈다. 또한 무령왕릉 벽면에 있는 수천개의 벽돌은 컴퓨터그래픽스로 그리기보다 1:1 복원 모형에 붙어있는 실제 벽돌을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해 일일이 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왕릉 안에 배치된 숟가락, 돈꾸러미, 진묘수, 목관, 도자기, 술병, 술잔, 등잔, 다리미, 각종 금속장식품들도 실측 도면을 바탕으로 실제와 똑같이 컴퓨터로 그렸다. 실제로 2천점이 넘는 무령왕릉 출토 유물이 국립공주박물관에 그대로 소장돼 있었기 때문에 이 유물 자료가 컴퓨터 작업하는데 상당히 큰 도움이 됐다.

그밖에 디지털 무령왕릉의 완성을 위해 총 3차례의 자문을 받았다. 컴퓨터 작업 시작 전에 한번, 50% 정도 진척됐을 때 또 한번, 완성 후 전체적인 자문을 최종적으로 받은 후 재수정 요구가 들어온 부분을 하나하나 고쳐나갔다. 마지막으로 수정할 것이 없다는 국립공주박물관의 판정을 받고 마무리했다.


6세기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

이처럼 고증과 자문을 철저하게 실시한 이유는 완성된 디지털 무령왕릉이 공상과학영화로 전락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디지털 무령왕릉이 학문적인 고증을 거쳐 얼마나 무령왕릉의 원형에 가깝게 만들었는지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복원의 상황은 단순히 지금의 무령왕릉 내부 모습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6세기 당시 막 무령왕릉 입구를 막은 직후의 모습까지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벌써 30년이 지났건만 백제 역사 연구의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에 단순한 무령왕릉 연구가 아닌 ‘무령왕릉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연구 범위가 광범위하다. 이 무령왕릉학 연구의 일부분으로 디지털 복원이 무령왕릉학 연구에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디지털 무령왕릉은 실제 볼 수 없는 무령왕릉 내부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천4백75년 전 온갖 부장품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생생한 무령왕릉 안을 보여줄 수 있다는 두가지 장점이 있다. 이것은 디지털 복원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제 무령왕릉의 디지털 복원을 시작으로 우리의 다른 문화재의 디지털화도 시급하다. 우리는 단지 무령왕릉을 시작으로 디지털 복원의 첫단추를 끼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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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진행

    장미경 기자
  • 박소연 교수
  • 만화

    박찬영
  • 박찬호 주임
  • 진행

    박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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