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방학식을 마치고 집에 오면 방학 숙제 중 과학과 관련 있는 부분부터 찾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많지 않은데도 그때의 신나는 기분만큼은 또렷하다. 중학교에 입학하며 이런 관심은 점점 더 자랐다. 특히 중학교 2학년 때, 과학 선생님이 담임이셨던 덕분에 청소나 면담 시간에 과학실을 오가며 과학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커졌다. 과학동아를 제대로 만난 곳도 이 과학실이다.
자발적 과학의 시작, 과학동아
과학동아는 교과서가 아니므로 자발적으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어도 죄책감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한국에선 100점과 1등을 목표로 삼고 이루지 못하면 자책하는 학생들이 많다. 자신만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인내하는 과정과 자세는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지식을 배울 때의 스트레스와, 평가가 나쁠 때의 스트레스는 다르다. 후자의 스트레스는 불필요하다.
과학동아를 읽을 때는 지식을 넓히는 행복만 있고, 점수에 연연하는 스트레스가 전혀 없었다. 덕분에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고, 스스로 재밌게 하는 공부를 선호하게 됐다. 비록 과학동아를 집에 빌려가지는 못하고 과학실에서 틈날 때마다 읽었지만, 다양한 상식과 흥미를 채우며 매달 금광을 찾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당시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학교에 매달 찾아오는 과학동아는 너무도 소중했다.
본격적인 수능 대비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시작했다. 그 전엔 흥미 위주로 흔히 ‘국영수’라 불리는 주요 과목과 과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수능에 맞춘 문제풀이에 집중하자, 지식이 계속 깊어져야 하는 과학보다 고교 수준에서 학습 범위가 비교적 명확한 수학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대학도 수학 전공이 가능한 연세대 이과대학에 진학했다.

공부의 추진력을 찾아가는 과정
하지만 대학 1학년 때 미적분학 강의를 들으며 수학에 대한 선호는 다시 바뀌었다. 1이 0보다 크다는 명제를 증명하는 법을 배우거나 외우며 의문이 들었다. 지금은 수학의 철학적 성격을 이해하지만, 당시엔 이런 철학적 고민이 나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물리 전공을 택했다.
물리로 전공을 정한 후에도 공부를 방해하는 사정은 여럿 있었다. 고등학교까지의 수업과 교육 과정은 수십 년간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 학생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발전했다. 하지만 대학 과정의 물리학은 학생 스스로 조리해서 먹어야 하는 날것의 지식들만 주어진다. 학생을 위해 준비된 지식을 수월하게 배우는 게 익숙한 고등학생이, 대학에서 방황하는 큰 이유가 이것이다. 대학생에게 주어진 이런 자유를 감당하지 못해서 1년 정도 학업엔 손을 놓고 학사경고도 2번 받았다.
학사경고는 3번 받으면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어서, 어떻게든 공부는 해나갔다. 그럼에도 한번 놓친 동기를 되찾아 공부의 추진력을 얻기는 매우 어려웠다. 공부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좌절도 했다. 그렇게 적당한 학점을 받아가며 2학년을 마치고 남들처럼 군에 입대했다.
강원도 최전방의 화학부대에 배치됐고 시간의 소중함은 그곳에서 깨달았다. 2년을 복무하며 휴가가 30일 정도였는데, 그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이 귀한 시간을 대학에서 몇 년이나 허비했다고 생각하니, 전역하면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체력과 정신력을 충전해 복학했건만 물리학과 3학년 과목들은 만만치 않았다. 스터디로 예습도 했는데 개강 첫 주를 보내고 아무것도 이해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금요일 마지막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에서 밤을 새며 1~2학년의 수학, 물리학을 다시 공부했다. 계산해보면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하루 밤샘 벼락치기 공부로 1년 진도의 25%를 습득할 수 있으니, 4일을 밤샘해면 1년 진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밤샘 공부를 하고도 복학 후 첫 쪽지 시험에서는 꼴찌를 했다. 1~2학년 수학, 물리학을 모르는 3학년의 당연한 결과였다.
매일 도서관에서 막차를 타고 집에 가서 새벽 2~3시까지 공부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수능을 준비할 때보다 잠을 줄이며 공부만 했다. 고교 수학보다 대학 물리학이 훨씬 어려우니 시간도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중간고사에선 성적이 꽤 올랐는데 어려운 내용은 여전히 많았다.
기말고사 땐 자는 시간을 더 줄이고 자다 못 일어날까봐 불을 켜고 맨바닥에서 잤다. 결국 복학 후의 전공 수업에서 대부분 A+를 받았고, 성적 상위 1%가 자격인 최우등상을 총장님께 직접 받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지금 연구하는 분야인 양자역학 수업만 A0이었다. 복학 후 첫 쪽지 시험에서 꼴찌를 한 그 수업이다. 재밌게 배웠기에 만족스러웠다.

2 KIST 양자기술연구단 소자팀의 동료들과 함께한 필자(뒷줄 맨 오른쪽). KIST 양자기술연구단은 현재 양자 컴퓨팅과 통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3 광대역 밴드갭 반도체 소재와 광전자 장치 분야의 석학인 정한 예일대 전기·컴퓨터공학과 교수와 함께. 한 교수는 필자의 예일대 박사 학위 논문의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삶의 가치도 배운 연구자의 길
급한 불을 끈 다음 학기엔 한결 여유가 생겼다. 잠도 6시간 넘게 자고 금요일엔 동기들과 ‘치맥’도 즐겼다. 공부 관성이 생기니, 기말고사를 마친 날에 집에서 공부 말고 뭘 할지 몰라서 왠지 어색했던 적도 있다.
질주하듯 학부를 마치자 물리학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는 착각과, 더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대학원에 진학해서야 또다시 전혀 다른 세계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흩어진 힌트만으로 혼자 재료부터 찾고 결과까지 만들어가야 하는 대학원 공부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라는 방향만 주어진 미션과 유사했다.
실제 코끼리 대신, 코끼리 ‘그림’을 냉장고에 넣는 방식으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공부를 하겠다는 목표로, 미국 예일대 전자과의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한국에서 공부, 연구, 조교에 행정 업무까지 하던 내게 이 박사 과정은 새벽까지 연구만 할 수 있는 천국이었다. 한국에서 갈고 닦은 추진력으로, 연구에 몰두하는 미국의 환경에 진입하니 연구의 재미도 제대로 느끼게 됐다.
물론 주말에는 한국이나 외국에서 온 친구들과 파티도 하며 관계를 넓혔다. 역량 있는 친구들과 교류하는 것도 예일대에서 주어진 중요한 기회였다. 여전히 교류하는 연구실 동료들은 현재 저명한 대학, 연구소의 교수나 연구원으로 활약 중이다. 당시 한 친구에게 들었던 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Work hard, play hard.” 연구할 땐 연구하고, 놀 땐 논다는 이 말을 지금도 아주 좋아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일만 하는 삶이 아닌, 열심히 일하고 또 그렇게 노는 삶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 양자기술 연구자로서의 자긍심
박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표준과학연구소(NIST)의 박사 후 연구원으로 1년 3개월 가량 근무했다. 이 기간은 다소 짧은 편인데, 국가 보안 시설이어서 박사 후 연구원은 근무 시간 외의 추가 연구가 불가능했던 것이 이유 중 하나다. 업무와 일상의 균형은 좋았지만, 손님의 처지란 느낌이 더 컸다. NIST는 미국 시민권자만 정규직으로 채용하는데, 규정상 한국 국적은 포기해야 했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있는 터라 그런 이유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귀국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양자정보연구단(현 양자기술연구단)에 들어와 빛을 활용한 양자 컴퓨팅, 통신 및 감지(sensing) 분야를 연구 중이다. 7년 전 연구를 시작할 땐 한국에 관련 기술이 전무했는데, KIST의 젊고 유능한 동료들과 협업하며 한국 최고의 기술력을 갖추고 세계 선도 그룹과 경쟁하는 연구단으로 성장했다.
한국의 양자 기술을 견인하는 연구자로서 사명감에 어깨가 무거울 때도 있지만, 그만큼 의미가 큰 일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계속 정진하려 한다. 이번에 과학동아에 기고한 이유는 지금까지의 내 경험이 중고교생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은 물론이고, 점점 느려지는 나 자신에게 다시금 연구의 가속도를 붙이려는 의지도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도 과학동아의 생생한 과학 이슈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길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에너지를 채우길 바란다.
나만의 과학동아 활용법
Q.과학동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나요
옛날에 아주 재밌게 읽은 블랙홀 기사가 있습니다. 중력에 대한 개념도 모호했던 어린 나이에 별의 중력이 아주 커지면 신성, 초신성, 백색왜성 혹은 블랙홀이 된다는 기사를 보고 우주, 물리에 대한 환상과 동경심이 생겼죠. 블랙홀이 웜홀을 통해 화이트홀에 연결될 수 있고, 화이트홀을 통해 다른 우주로 갈 수 있다는 가설까지 이어져서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Q.과학동아를 실제로 어떻게 활용하고 있나요?
연구에 지칠 때 과학동아를 읽곤 합니다. 과학을 재밌게 여겼던 어린 시절의 생각도 나고, 힘든 연구를 하는 현실은 어려워도 과학은 재밌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공계 진로를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특히 좋은 잡지라고 생각합니다.
Q.과학동아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자신감이 부족해질 때가 자주 있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렇지만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놓지 않고 실제로 해나가면, 모두를 제치고 가장 앞에서 달리는 순간을 만날 것입니다. 목표를 높이고 자신의 꿈을 꾸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