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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기사] 연구실을 나와 뷰티숍으로 향한 과학자들, 홍합으로 탈모인을 구하라

    글 김미래 기자 + 디자인 이한철

    ‘돈 주고도 못 사는 상품’ ‘완판 행진’. TV 홈쇼핑이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 앞에 ‘과학자’라는 단어가 붙는다면 어떨까? 조금 낯설고 어색하게 들릴 수 있지만 화학과 교수가 만든 유명 탈모 방지 삼푸와 노화 방지 크림 등은 지금 이 순간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과학자가 만든 제품은 무엇이 다르고, 제품이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연구실 밖을 나선 과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DALL·E

     

    머리카락에 작용하는 폴리페놀의 과학


    출시와 동시에 완판, 누적 판매 100만 개를 돌파한 샴푸가 있다. 이름부터 과학적인 느낌을 주는 탈모 방지 샴푸 ‘그래비티’다. 한 통에 3만 8000원이라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효과를 본 소비자들의 ‘간증’이 SNS와 커뮤니티를 통해 퍼지며 입소문을 탔다. 


    “현재 수요를 공급이 못 따라가고 있습니다. 원재료인 폴리페놀을 제가 직접 만들거든요. 힘들지만 기분은 정말 좋습니다.” 3월 27일,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래비티 샴푸 개발자 이해신 KAIST 화학과 교수(폴리페놀 팩토리 대표)는 인터뷰 직전까지도 대전 KAIST 연구실에서 핵심 원료를 점검하고 왔다고 했다. 그는 호두 껍데기에서 얻은 타닌산을 샴푸의 주성분으로 삼았다.


    폴리페놀은 페놀 구조 여러 개가 연결된 물질로, 멜라닌(피부), 프로시아니딘(카카오), 카테킨(녹차)처럼 자연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렇게 각기 다른 폴리페놀은 그 구조와 환경에 따라 여러 기능을 한다. 이 교수는 그중에서도 단백질과 잘 결합하는 특성이 있는 타닌산에 주목했다. 그는 “타닌산은 접착할 수 있는 손(작용기)이 다섯 개 있는데, 그중 두 개가 머리카락의 주성분인 케라틴과 결합해 단단히 붙는다”며, “이 구조가 그래비티 샴푸가 탈모를 막는 핵심 기술”이라고 말했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주요 원인은 노화와 스트레스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발이 점점 가늘어지고 두피의 지지력이 약해지면서 머리카락이 모공에서 쉽게 빠져나간다. 그런데 타닌산이 모발을 감싸면 얇아진 모발이 코팅되면서 두꺼워지고 쉽게 빠지지 않는다. 또한 타닌산은 모공 주위도 고정해 머리카락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이 타닌산은 살리실산, 나이아신아마이드, 덱스판테놀 같은 성분과 결합해 모낭 세포 활성에 관여한다. 성분들이 일반 샴푸처럼 씻겨나가지 않고, 타닌산에 접착된 채로 천천히 방출되기 때문에 효과가 오래 지속된다. doi: 10.1002/admi.202400851

    폴리페놀 팩토리

    이해신 KAIST 화학과 교수가 개발한 탈모 방지 샴푸. 호두, 포도 등에서 얻을 수 있는 폴리페놀인 타닌산을 활용해 모발을 두껍게 코팅하는 것이 핵심 기술이다.

     

    폴리페놀 연구 22년, 샴푸로 방향 전환


    “학교에서 아마 우리 팀이 가장 해괴한 꼴로 다닐 거예요.” 이 교수는 폴리페놀 팩토리 팀이 교내에서 유난히 눈에 띈다며 웃었다. 제품 테스트를 위해 직접 실험체가 되기 때문이다. 실험 기간에는 머리카락을 반으로 나눠 한쪽은 자체 개발 샴푸, 다른 쪽은 일반 샴푸로 감고 교내를 활보하기도 한다.


    이 교수의 샴푸 연구는 홍합에서 시작됐다. KAIST 생물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바이오메디컬 엔지니어링 박사과정 중 홍합 접착 단백질을 연구했다. 파도 치는 절벽에도 강하게 달라붙어 있는 홍합의 접착 메커니즘을 밝힌 논문을 2007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고, 이 논문은 지금까지 1만 회 넘게 인용되며 생체 소재 분야의 대표 연구로 꼽힌다. doi: 10.1126/science.1147241


    이후 이 교수의 연구는 생체 소재 전반으로 확장됐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혈관 내벽에 약물을 붙이는 접착제를 연구하던 중, 홍합의 접착 성분인 폴리페놀(카테콜)이 단백질에 잘 붙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실제로 홍합의 접착 단백질에도 카테콜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단백질에 잘 붙는다면 머리카락에도 잘 붙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09년 KAIST로 돌아온 뒤 폴리페놀과 모발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던 그는, 2023년 뜻이 맞는 동료들과 독립 연구팀을 꾸려 샴푸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그렇게 탄생한 제품은 첫날부터 완판되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자정이 되자 전국에 흩어진 연구원들이 화상 회의를 열어 긴급히 판매 전략을 논의해야 할 정도였다. 그는 “너무 즐거웠어요. 우리가 만든 걸 사람들이 바로 써준다는 게 신기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 그에게도 쓰린 경험이 있었다. 2021년, 상용화에 도전했던 ‘모다모다’ 갈변 염색 샴푸 이야기다. 당시 이 교수는 폴리페놀이 공기와 만나 색이 변하는 ‘갈변 현상’을 이용해 새치 샴푸를 개발했고, 이 기술을 모다모다 측에 이전해 출시와 동시에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출시 후 약 2년 동안 기술 사용료 분쟁을 겪은 데다가 유해성 논란이 불거져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후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 샴푸가 안전하다는 공식 발표를 내놨지만 시장의 분위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이 교수는 “뼈아픈 실패를 통해 많이 배웠다”며 “제 기술이 시장에서 왜곡돼 사장되지 않도록 직접 도전해 보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 투자를 받아 파트너십을 구축했고, 20~30년 차 베테랑 직원들에게 상용화를 맡겨 발 빠르게 지금의 사업을 전개했다. 이 교수는 “그래비티 샴푸의 원재료 제작법은 지금도 저와 몇몇 연구팀 인원만 알고 있다”며 “올해는 인체에 무해한 폴리페놀 미용 글루, 강력한 기능을 가진 신개념 모발 제품 등 세상에 없던 제품들을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폴리페놀 팩토리

    탈모 방지 샴푸 ‘그래비티’를 사용하기 전(왼쪽)과 후(오른쪽) 비교. 
    사용 후는 두꺼워진 모발이 모공에  꽉 끼어있는 모습이다. 

     

    폴리페놀 팩토리

    폴리페놀 팩토리 연구팀. 아랫줄 오른쪽 인물이 회사를 이끄는 이해신 KAIST 화학과 교수다.

     

    그래핀 실패 후, 화장품으로 재도전


    김범수 충북대 화학공학과 교수도 연구실에서 제품 개발로 영역을 확장했다. 김 교수는 20년 넘게 세포 배양, 단백질 생산 등 바이오의약품 제조 기술을 연구해 온 생물화학공정 전문가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인용 지표 기반으로 그를 세계 상위 2% 과학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연구 방향을 바꿨다. 생물화학공정을 활용해 노화 방지 화장품 개발에 나선 것이다.


    그가 개발한 제품은 ‘NMN 안티에이징(항노화) 리포솜 크림’. NMN은 노화 조절과 세포 에너지 생성에 관여하는 NAD+의 전구물질로, 데이비드 싱클레어 하버드대 유전학과 교수가 노화 억제 물질로 주목한 바 있다. 


    NMN은 피부 세포를 자외선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고 멜라닌 생성을 억제하지만, 불안정하고 흡수율이 낮다는 단점이 있다. 김 교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NMN을 ‘리포솜’에 담아 안정화했다. 리포솜은 피부 세포와 유사한 구조로, NMN을 감싸 안정적으로 보호하며 피부 깊숙이 흡수되도록 돕는다. 실험 결과, 수용액 상태의 NMN은 180일 후 0.2%만 남았지만, 리포솜으로 감쌀 경우 89.4%가 유지됐다. 또 물리적 자극을 가하면 12시간 이내에 96.8%의 리포솜이 돼지 피부를 통과했다. doi: 10.1016/j.cej.2024.158703


    2024년 10월에 출시된 크림은 6개월 만에 1차 생산분이 완판됐다. 네이버 후기 평점은 5점 만점에 4.9점이다. 현재는 2차 생산에 돌입한 상태다. 20년 만의 외도(?)가 성공한 셈이다. 그에게 돌연 ‘화장품’이라는 소비재에 눈을 돌린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저는 공학 연구자로서 항상 상용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첫 도전은 그래핀 사업이었죠. 하지만 판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실패했습니다. 이 경험은 저에게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줬고 그렇게 떠올린 것이 화장품이었습니다.”
    김 교수는 2021년 12월 창업한 바이오케미랩에서 학생들과 함께 연구개발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투자 유치와 해외 진출을 추진하며, NMN 기반 항노화 화장품 분야에서 국내 최고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범수

    김범수 충북대 화학공학과 교수가 개발한 NMN 안티에이징 리포솜 크림. 노화 조절에 효과가 좋은 NMN의 흡수력을 높인 제품이다.

     

    김범수

    김 교수가 이끄는 바이오케미랩은 박사과정생을 중심으로 학부생, 석사과정생까지 함께 연구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소비자의 실시간 후기, 과학자를 바꾸다


    대부분의 신제품은 과학 연구에서 출발하지만, 정작 과학자는 연구실 안에만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 교수와 김 교수의 발자취는 이례적이다. 과학자가 미용 제품 개발에 직접 참여하고 마케팅 전면에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래비티 샴푸나 NMN 안티에이징 리포솜 크림의 광고 모델은 과학자다. 


    연구자에게도 이는 새로운 경험이다. 연구 결과가 바로 시장에 적용되고, 반응이 실시간으로 돌아오는 구조는 기존 연구 체계에서 보기 드물다. 반응은 연구자에게 강한 동기를 부여한다. 이 교수는 “샴푸 연구의 매력은 실패와 개선이 즉시 눈에 보인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빠른 피드백과 반복 개선, 그리고 제품으로의 반영 과정은 그 자체로 강력한 연구 동력이 된다. 김 교수도 연구자에서 창업가로 전환한 삶을 두고 “어렵지만 즐겁다”며 “이전엔 논문이 목표였다면, 지금은 소비자의 반응이 훨씬 더 큰 동기부여가 된다”고 말했다.


    이제 이들은 실험실 안의 과학자가 아니다. 일상을 바꾸는 과학기술의 전달자로 활동하며, 과학을 삶과 연결하는 또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김 교수는 “앞으로도 과학을 일상과 연결하는 연구를 계속해 나가고 싶다”며, 더 많은 사람들과 호흡하는 과학자로서의 행보를 이어갈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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