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부모님께서는 공부에 대해 특별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집에 수십 권짜리 과학 백과사전 세트를 마련해 두셨던 기억이 납니다. 심심할 때마다 그 백과사전을 들춰보며 읽다 보니 흥미로운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고, 점차 과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그때 읽었던 원자, 생물, 우주와 관련된 내용들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죠. 초등학생 때까지는 미래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보다는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가끔 과학책을 읽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자,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학과 과학 과목이 특히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물리가 가장 재미있어서 처음에는 물리학과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과 주변 분들로부터 순수 물리학보다 공학 전공이 더 나을 거라는 조언을 듣고, 마음을 바꿔 기계공학과로 진학했습니다.
진로 리스트 만들고 하나씩 지워나가
기계공학과에 와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은 분야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현실적인 분야도 있고, 한편으로는 매우 이론적인 부분도 있어 여러 가지 수업을 들으며 기계공학에 매료됐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로’라는 로켓 동아리에 가입해서 실제 로켓을 만들고 발사해 본 경험입니다. 대회에서 발사 버튼을 눌렀을 때 로켓이 날아가던 기억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저런 경험을 해보며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 커서 대학교 1, 2학년 때는 학업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향후 진로를 정해보자는 마음으로 군대에 먼저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은 것을 정해보자’ 생각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진로 방향을 리스트로 만들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지우다 보니 ‘대학원에 가서 연구를 해보자’란 결론이 나왔습니다.
일단 대학원에 가겠다고 정한 이후에는 큰 고민 없이 진로를 밟아갔습니다. 연구실도 ‘재밌어 보이는 연구를 하는 곳에 가보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결정했죠. 그 당시 신임 교수로 오신 김도년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님과 면담했는데, 교수님께서 DNA로 구조체를 만들고 이를 컴퓨터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신기하고 재밌어 보였고, 코딩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김 교수님 연구실로 가게 됐습니다.
1992년, 필자가 네 살 때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찍은 사진. 열심히 벚꽃을 만지려는 모습을 부모님이 카메라에 담았다.
신세계를 탐험하는 연구자의 길
대학원에 와보니 연구는 공부와 정말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책에 적힌 지식을 잘 이해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찾아서 시도해보는 과정 자체가 처음에는 참 어려웠습니다. 마치 신세계 탐험가가 된 기분이랄까요. 그래도 고난이 있더라도 새로운 곳을 개척하는 성취감과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재미 덕분에 점차 연구 생활을 즐기게 됐습니다.
대학원 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엔, ‘이제는 취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유행이 시작됨과 함께 아이가 태어났고, 작성 중이던 논문도 마무리해야 했기에 조금 더 연구실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큰 기대 없이 지원했던 ‘국가지원 장기연구과제’에 선정되며 또다시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당분간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재미있는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이제는 연구자의 길을 계속 가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이 밀려오더군요.
대학원에 입학할 때만 해도 평생 연구자로 살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고, 아이도 있는 상황에서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밟는 것은 쉽지 않은 길이라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니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던 중 아주대 교수로 부임하게 됐고, 이제는 연구뿐만 아니라 교육과 봉사라는 더 큰 책임을 맡게 됐습니다.
대학 시절 로켓 동아리 ‘하나로’에서 활동하며 전국 학생로켓대회를 위해 설계한 로켓의 도면(왼쪽)과 부품을 모두 조립해서 완성한 로켓의 도색 전 모습(가운데). 맨 오른쪽은 2014년 대학 졸업식 날 찍은 사진이다.
기계공학에 뿌리를 둔 생명과학 연구의 매력
대학원 과정부터 지금까지 기계공학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한 DNA 구조체의 해석과 설계 연구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DNA는 유전 물질이기도 하지만, 나노미터 수준의 분자라서 이를 이용하면 아주 작은 인공 구조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의만 분의 1 수준인 작은 구조물을 정밀하게 설계하고, 원하는 기능을 갖도록 만드는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DNA와 기계공학이 무슨 관련이 있을지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전산 모델을 개발하거나 시뮬레이션 기반의 해석을 DNA 구조체에 적용하는 연구입니다. 연구의 뿌리가 기계공학에 있죠. 지금까지는 DNA 구조체에 초점을 맞춰 왔다면, 앞으로는 생명활동 모사나 나노 시스템으로도 분야를 확장하고자 합니다. 2024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단백질 구조 예측 분야처럼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연구도 흥미롭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어떤 연구 주제든 탐구하다 보면 학문의 경계가 많이 모호해지고, 다양한 이론과 새로운 결과가 뒤섞여 머리가 혼란스러워질 때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유연한 태도로 참신한 이론과 생각을 받아들이며 사고의 폭을 넓히는 점이 연구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죠.
또한, 이제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연구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숲속을 헤매며 길을 만드는 과정이라면, 교육은 그 만들어진 길을 학생들에게 걸어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에게 가끔 참신한 질문을 받으면, 새로운 관점이 떠올라 즐겁습니다.
2017년 미국 유타주에서 열린 나노과학 분야 학회에서 DNA 구조체의 기계적 특성에 관해 발표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
흥미로운 일이라면 일단 해볼 것
교수로 처음 부임하고 한 학기를 마무리하던 차에 과학동아 과동키즈 기고 제안을 받고 지난 기억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떤 일이든 즐겁지 않으면 꾸준하게는 물론 잘 해내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구든 일상이든 항상 재미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크게 두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연구 측면에서는 지금까지 DNA 구조체 연구를 즐겁게 해왔던 만큼, 앞으로는 RNA, 단백질 등 다양한 바이오 물질을 활용한 연구로 확장해 나가며 바이오-나노 융합 연구에 도전할 계획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향후 개척한 연구 내용을 다듬어서 책으로 정리해 보려는 목표도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대부분의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마음의 울타리로 제한하지 말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점은 흥미가 있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일단 해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시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며 실제로 해보면 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저는 ‘도전’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벌써 마음에 벽을 만들거든요. 무언가 마음에서 동한다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만의 과학동아 활용법
과학동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나요?
고등학생 때 로켓 기술에 관한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한국의 로켓 기술 수준이 낮았던 터라, 러시아와 미국 등 로켓 선진국의 로켓을 주로 소개했죠. 그 기사를 통해 첨단 기술에 대한 동경과 함께 공학에 대한 깊은 흥미를 느꼈습니다.
과학동아를실제로어떻게활용하고있나요?
고등학생 시절, 서점에서 과학동아를 발견하고 최신 연구와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후 꾸준히 잡지를 구독하며 다양한 과학과 공학 이슈들을 접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공학자가 된 지금의 제게 과학동아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서점의 과학 코너를 지날 때면 다른 연구 분야의 새로운 내용을 살펴보곤 합니다.
과학동아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어릴 적 연구자분들이 과학동아에 쓴 글을 보며 ‘이게 연구하는 삶이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제가 소개될 줄은 몰랐네요. 다음엔 여러분이 주인공이 될 차례입니다. 즐겁게 읽으시며 미래의 방향을 고민해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