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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국은 남극 대륙 중심부로 진출하기 위해 남극장보고과학기지를 세웠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24년 12월, 극지연구소 연구팀이 또 한 번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세계 최초로 해빙 아래 얼음층 속에서 생태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연구자를 만나 발견의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앞으로의 계획까지 들어봤다.
“구멍을 뚫자 무수히 많은 얼음 조각이 솟구쳐 올랐어요. 도저히 다이빙할 수 없을 정도였죠.”
2024년 12월 23일, 극지연구소에서 만난 김상희 생명과학연구본부 책임연구원은 처음 해빙 아래를 뚫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2015년 10월, 극지연구소 연구팀은 남극 저서생물 조사를 위해 동남극 장보고과학기지 인근에 있는 장보고만에서 지름이 1m가량 되는 얼음 구멍을 뚫었다. 다이빙을 해서 바닷속을 탐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바닷물이 드러날 것으로 생각했던 구멍에서 수많은 얼음 조각이 솟구쳐 오른 것이다. 종잇장 같이 얇은 얼음 절편 조각 수천, 수만 개가 켜켜이 쌓여 서로 단단히 맞물려 있어 매우 견고하면서도 동시에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남극 다이빙 경력이 700회 이상인 과학자들이 다이빙을 하려 해도 얼음 조각들이 마치 움직이는 액체처럼 몸을 층층이 감싸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김 책임연구원은 자료 조사를 통해 이 구조가 1905년에 처음 발견된 ‘아이스 플레이트 레이어(이하 얼음층)’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얼음층은 남극의 특정 지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극 전역에서 종종 비슷한 구조가 보고됐다. 또한 빙상, 빙붕, 해빙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얼음 지형에서 발견됐다. 해빙 두께가 약 3m 정도인데, 그 아래로 무려 10m 두께의 또 다른 형태의 얼음층이 존재하는 셈이다. 얼음층이 발견된지는 100년이 넘었지만, 이 구조에 관한 연구는 매우 드물었다. 김 책임연구원은 “계절적으로 얼음층이 생성되는 시기와 사라지는 시기가 있고, 얼음층이 모든 남극 얼음 아래 존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며 “처음에는 이런 구조가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굉장히 특이한 현상으로 여겼다”고 전했다.
2015년 극지연구소 연구팀은 남극 저서생물 조사를 위해 남극장보고과학기지 인근에 있는 장보고만에서 지름 1m의 얼음 구멍을 뚫었다.
영하의 얼음층이 생명의 보고?
얼음층을 더 깊이 조사할수록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얼음 조각들 사이에 서식하는 생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 책임연구원은 “2017년 얼음 조각 사이에서 남극은어의 알을 발견하면서 처음으로 이 얼음층에 생태계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겠다고 짐작했다”고 말했다. 남극은어의 알은 매우 작아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얼음 사이에서 반짝이는 것이 있어 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니 남극은어의 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연구팀은 본격적으로 해빙과 바닷물 사이 얼음층에 사는 생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해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소형 무척추동물, 남극은어, 남극빙어 같은 생물들을 발견했다.
또한 얼음층에 사는 1차 생산자(광합성 등을 통해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생물로, 생태계 에너지 흐름의 기초를 이룬다)들의 생물량을 정량적으로 조사한 결과, 이곳의 생물 농도는 주변 바닷속보다 3배에서 최대 10배까지 높았다. 이는 얼음층이 생물들에게 일종의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 책임연구원은 “온대 지역에서는 해조류가 바다 생물의 서식지 역할을 하지만, 남극에는 해조류가 없다. 대신 얼음 조각 사이 틈이 생물들의 집 역할을 했다”며 “특히 남극은어 같은 물고기들은 이 구조를 산란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남극은어는 남극해에 사는 주요 어종이다. 황제펭귄의 주요 먹이는 크릴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주로 남극은어 같은 물고기를 먹고, 남극은어가 크릴을 먹는다. 즉, 남극은어는 황제펭귄과 크릴 사이의 중간 포식자인 것이다. 김 책임연구원은 “남극 생물을 연구할 때 중간 포식자가 잘 보이지 않아 항상 궁금했는데 그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해빙에 구멍을 뚫자 구멍에서 수많은 얼음 조각이 솟구쳐 올랐다. 얇은 종잇장 같은 얼음 절편들이 수천, 수만 개 켜켜이 쌓여 있는 구조였다. 다이빙을 시도했지만, 얼음 조각들이 서로 단단히 맞물린 채 몸을 감싸 아래로 내려갈 수 없었다.
남극 생태계의 빠진 퍼즐 조각 채워질까
얼음층 속 생태계는 지금까지 생물학자들이 봐왔던 생태계와 전혀 다르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질문이 많아요. 얼음층은 영하 2℃보다 낮은 과냉각 상태입니다. 채집한 남극은어 알은 얼음과 접촉하자마자 얼어버리는데 과냉각 얼음층 내에서는 왜 얼지 않는지, 소형 생물들은 또 얼음 속에서 어떻게 얼지 않고 살아가는지, 이들의 생존 전략과 방어 물질들을 밝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연구 주제입니다.” 김 책임연구원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깊은 바다에서 살던 남극은어가 연어처럼 이 얼음층에 다시 돌아와 알을 낳고 치어로 자라는지도 의문이죠”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신비로운 얼음층은 남극 생태계의 빠진 퍼즐 조각을 맞춰줄 것으로 기대된다. 남극해에서 흡수하는 탄소량은 전 지구 탄소 흡수량의 약 40%를 차지한다. 면적은 지구의 20%에 불과하나 면적 대비 많은 양의 탄소를 흡수할 수 있는 이유는 낮은 온도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재밌는 사실은 북극도 온도가 매우 낮지만 남극해만큼 높은 탄소 흡수율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 책임연구원은 “남극 생물들이 엄청난 양의 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이라며 “이들은 지구 탄소 순환과 저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남극의 생물 다양성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다. 기후변화 예측 모델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현재 기후 모델은 인공위성으로 관찰한 바다 또는 육지의 색을 바탕으로 이산화탄소 흡수량을 추정하지만, 이 데이터는 해빙 아래의 정보를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성이 떨어진다. 김 책임연구원은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는 매년 보고서에서 남극해 생물 정보가 부족하다고 강조하며, 이를 채울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고 말했다.
해빙 아래 생태계를 관찰하는 연구는 남극 생태계에 대한 부족한 지식을 메울 수 있다. 실제로 연구팀은 해빙 아래 생태계를 직접 관찰하고 데이터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2년 동안 수집한 데이터만으로도 남극에 사는 여러 생물을 새롭게 발견했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종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어요. 이를 통해 전 세계 생물종의 2%에 불과하다는 남극 생물 종의 수치도 크게 향상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얼음층 생태계 연구
극지연구소
두꺼운 해빙 아래 존재하는 얼음층을 비파괴 방식으로 탐지하기 위해 전자기파 탐사와 헬기에 장착한 고해상도 레이더 촬영을 한다.
극지연구소
얼음층 속에서 소형 무척추동물, 남극은어, 남극빙어 같은 생물이 발견됐다. 얼음 시추, 다이빙, 수중드론, 자율 무인 잠수정, 플로그 앤 펌프 시스템 등을 이용해 얼음층 생물들을 관찰하고 채집한다.
극지연구소
얼음층 생물들은 광합성, 먹이활동 등으로 탄소를 흡수해 유기물을 심해에 저장하는 생물학적 펌프 역할을 한다. 전지구 탄소 흡수의 40%가 남극해에서 이뤄지는데 이 과정에 얼음층 생명체들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해양 생태계 연구의 중심지가 될 남극
얼음층 속 생물을 관찰하는 일은 기술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다. 연구 대상인 생물들이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얼음층 속에 사는 생물은 다이빙 중 발생하는 기포나 진동을 즉각적으로 감지한다. 마치 토끼가 호랑이 같은 포식자의 움직임을 느끼고 숨는 것처럼, 생물들이 한순간에 흩어져 버려 관찰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연구팀은 작은 구멍을 뚫은 뒤 수중 드론을 넣고 이를 천천히 움직이는 식으로 생태계 교란을 최소화하면서 생물을 관찰하고 있다. 또한 사진을 촬영한 뒤 이미지 분석 기술을 통해 생물의 종류와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온도, 화학 성분, 영양분 등 생물이 살아가는 환경의 세부 데이터를 수집하며 서식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2019년 연구팀은 얼음층에서 채집한 남극은어 알을 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알에서부터 성체가 되기까지 남극은어의 생애를 이해할 수 있는 성과로, 남극 생태계 연구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김 책임연구원은 “생애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화한 치어의 생태를 추적해야 하는데, 3개월에 불과한 짧은 탐사 기간 때문에 치어들을 장보고과학기지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그대로 두면 치어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높아 다시 처음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남극 생태계 연구는 이미 10년 전에 시작됐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봉쇄조치를 비롯한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또한 남극으로 파견되는 인원도 제한적이어서 연구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해빙 아래 생태계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 책임연구원은 “해빙 아래 생태계를 비롯해 남극 전체 생태계를 연구해야 할 필요성은 매우 명확하다”며 “남극은 한랭성 생물들이 모이는 마지막 서식지로서 미래에는 해양 생태계 연구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위기로 인해 청어와 대구 같은 어종은 이미 동해안을 떠나 북쪽으로 이동했다. 더 나아가 대왕고래 같은 대형 생물들조차 서식지를 남극으로 옮겼다. 이처럼 생물들은 점차 극지방으로 이동하고 있다. 남극이 한랭성 생물들이 모이는 마지막 서식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하는 이유다.
1 그물망을 이용해 얼음층에 서식하는 생물을 채집하고 있는 모습.
2 극지연구소 연구팀이 얼음층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현미경으로 관찰해보니 남극은어의 알이었다. 남극은어는 황제펭귄의 주 먹이원인데 얼음층이 남극은어의 산란장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극 생물 연구 주도할 기회 잡아야”
남극 연구의 선도 국가인 뉴질랜드는 최근 한국에 공동 연구를 제안하며 손을 내밀었다. 뉴질랜드 연구팀은 해빙 아래 생태계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플로그 앤 펌프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플로그 앤 펌프 시스템은 원형 통으로 해빙에 구멍을 뚫은 뒤 열려 있던 마개를 닫아 얼음층 속 생물을 채집할 수 있는 장비다.
하지만 뉴질랜드와 함께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예산과 연구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김 책임연구원은 “뉴질랜드는 이미 예산을 확보하고 2025, 2026년에 연구를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면서 “우리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 우리가 발견한 새로운 얼음 생태계의 국제적인 연구 흐름에서 완전히 뒤처질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생물 연구가 단순히 생물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비용이 적게 들 것이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른 분야보다 예산 확보가 더 어렵죠.” 김 책임연구원은 아쉬워하며 말했다.
극지 생물학 조사는 기본적으로 해빙을 뚫는 드릴과 같은 탐사 장비와 인프라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또한, 단순히 생물을 관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매년 생물들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데이터를 축적해야 한다. 때문에 연구를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이 상당하다.
김 책임연구원은 “얼음층 생태계가 장보고과학기지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어 이 지역이 얼음 생태계 관측지로 급부상할 수 있는 적기”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남극 연구는 대부분 선진국들이 주도해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선도적으로 이끄는 분야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물 연구 분야는 다릅니다. 우리나라가 강점을 가지고 있어요. 이를 통해 남극 연구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김상희 극지연구소 생명과학연구본부 책임연구원(사진)은 “장보고 기지 주변의 생물 분포를 파악해 지도를 제작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고, 이후에는 특이 생물의 특성과 역할을 연구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용어 설명
해빙 : 해수가 얼어 형성된 얼음.
저서생물 : 바다, 강, 호수 또는 하천 등의 바닥에 서식하는 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