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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기사] ‘위고비’ 국내 출시로 살펴본 신약 재창출의 모든 것

     

    비만치료제로 널리 알려진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가 지난 10월 15일 국내에 출시됐다. 원래 당뇨병 치료제로 만들어졌던 위고비는 중간에 비만치료제로 방향을 틀어 출시되면서, 기존에 쓰이던 약품을 새로운 질병 치료에 활용하는 ‘신약 재창출(Drug repositioning)’의 한 사례로 언급되기도 했다. 전혀 다른 효능으로 낡은 약을 소생시키는 신약 재창출은 과연 제약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Novo Nordisk

    노보 노디스크의 비만치료제 ‘위고비(Wegovy)’. 2021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고 한국에는 2024년 10월 15일 출시됐다.

     

    고혈압 대신 탈모 치료? 뜬금포 효능의 재발견

     

    “사실 위고비를 ‘신약 재창출’의 적절한 예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1월 4일 오전, 서울대 의대에서 만난 이형기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분자의학및바이오제약학과 교수는 기자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놨다.

     

    “신약 재창출의 핵심은 개발 중이거나 이미 허가받은 의약품을 기존의 성능과는 전혀 관련 없는 다른 약으로 개발하는 것입니다. 우연, 즉 ‘세렌디피티’에 의해 기존 약에서 새 효능이 발견되는 경우죠.” 

     

    신약 재창출(Drug repositioning)은 약물 재창출이라고도 불린다. 대표적 사례는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가 있다. 비아그라의 원료인 실데나필은 원래 고혈압 치료제로 개발됐다. 몸속의 고리형 구아노신일인산(cGMP)이라는 물질은 혈관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실데나필은 cGMP를 분해하는 효소를 억제한다. 그 결과 혈관이 확장된 상태로 남게 된다.

     

    “실제로 임상 시험을 해보니 협심증이나 고혈압 치료제로는 성능이 별로였어요. 1세기 전에 만들어진 니트로글리세린이 협심증에 훨씬 효과적일 정도였죠. 그런데 임상 환자들 중에서 실데나필을 복용한 후 우연히 발기부전이 나은 사례가 관찰된 거예요.” 이후 1998년 발기부전 치료제로 모습을 바꿔 판매되기 시작한 비아그라는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화이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제약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57년 독일에서 출시된 수면제, 입덧 완화제 ‘탈리도마이드’도 대표적인 신약 재창출 사례다. 탈리도마이드는 약을 복용한 산모들에게서 사지가 짧은 아기들이 태어나는 부작용으로 커다란 악명을 뒤집어썼다. 세계적으로 1만 2000명가량의 영유아 피해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한센병과 다발성골수종 치료에 효과가 있음이 밝혀졌고 현재는 제한적으로 치료에 쓰인다.

     

    1979년 고혈압 치료제로 발매된 ‘미녹시딜’은 임상 시험 참가자들에게 부작용으로 다모증을 나타냈다. 미녹시딜을 바른 부위에 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혈관이 확장되면서 모근으로 산소 공급이 많아져서 그런 거라 추측해요.” 그 결과 1988년에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아 ‘로게인’이라는 이름의 탈모 치료제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당뇨병은 물론 비만, 심혈관계 질환까지 약효를 보이는 ‘기적의 약’ 위고비는 왜 신약 재창출이라고 볼 수 없을까. 개발 과정에서 당뇨병에서 비만으로 그 방향을 틀었는데도 말이다. 

     

    위고비는 인슐린 분비를 유발하는 호르몬 ‘GLP-1’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 물질인 ‘세마글루타이드’의 상품명이다. 이 질환들은 각자가 비슷한 대사 경로를 공유한다. 위고비가 효능이 있다고 밝혀진 새 질환들이 기존에 위고비가 치료하던 질환과 비슷한 작용기전을 가지고 있어 기본적으로는 같은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넓게 보면 신약 재창출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유효성 확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위고비의 작용기전: 유효성 확대

     

    GLP-1은 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뇌와 췌장에 작용한다. 위고비 같은 세마글루타이드(GLP-1 유사체)는 이 호르몬의 기능을 모사해 혈당을 낮추며 식욕을 떨어뜨린다. 그 과정에서 비슷한 기전으로 당뇨병과 비만 치료에 효능을 보인다.

     

    미녹시딜의 작용기전: 신약 재창출

     

     

    미녹시딜은 혈관을 확장하는 효능이 있어 고혈압 치료제로 개발됐다. 추후 혈관 확장으로 약을 바른 부위에 모근이 자라는 발모 효과가 확인되며 신약 재창출이 이뤄졌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다시금 조명되다

     

    신약 재창출이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시기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를 휩쓸었던 2020년 이후다. “당장의 코로나19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니, 신약을 개발하는 한편 기존 의약품 중 코로나19에 효과가 있는 치료제를 찾아보려는 움직임이 있었죠.”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제약사들이 기존 약에서 코로나19 치료제를 찾기 위한 신약 재창출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 실제로 승인된 약이 항바이러스제 ‘렘데시비르’였다. 원래 에볼라 출혈열 치료제로 개발됐던 약이 코로나19 치료 효능을 보여 FDA의 긴급사용승인을 받았고, 이후 2023년까지 다양한 환자에게 사용됐다.

     

    이와 함께 신약 재창출의 장점도 재평가됐다. 이 교수는 “신약 재창출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신약 개발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이라 설명했다. 신약 개발은 크게 기초 연구를 통한 ‘후보 물질 선정’, 동물 실험을 통한 효능과 안전성을 알아보는 ‘전임상 시험’,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세 번의 ‘임상 시험’에 이르는 세 단계로 이뤄진다. 신약 재창출은 이중 첫 두 단계인 후보 물질 선정과 전임상 시험 단계를 대폭 줄일 수 있다. “기존에 시판된 약이라면 이미 독성 연구가 완료됐기 때문에 개발에 드는 돈과 시간은 물론 위험성까지 줄어들죠. 물론 임상 시험은 새롭게 해야겠지만요.” 신약 재창출로 돌아온 약은 부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무척 적다는 뜻이다.

     

    문제는 신약 재창출이 장점이 많음에도 지금까지는 운과 우연 이상의 마땅한 방법을 찾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임상 시험에서 약품(비아그라)을 복용했을 때 기존에 알려진 약효(혈압 강하) 말고 상관관계가 있는 다른 인자(발기부전 치료)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겠지만, 이는 수많은 임상 데이터라는 건초밭에서 상관관계, 나아가 인과관계라는 바늘을 찾아야 하는 작업에 가까웠다. 그러니 운과 우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운과 우연을 신약 개발 방법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5년 사이 제약계에는 신약 재창출을 한층 빠르게 현실로 만드는 여러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데이터 건초더미를 빠르게 헤집어 인과관계라는 바늘을 찾아줄 ‘인공지능(AI)’이 주인공이다.

     

    이창욱

    11월 4일 만난 이형기 서울대 분자의학및바이오제약학과 교수는 “지금까지의 신약 재창출은 우연에 의해 기존 의약품을 완전히 새로운 효능으로 개발한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AI, 신약 재창출을 ‘예측’해낸다

     

    이 교수는 “현재 신약 재창출을 진행하는 데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는 ‘표현형 기반 접근법’이다. 실제 약을 복용한 환자들의 건강 정보를 분석해 그동안 놓쳐왔던 약의 효능을 찾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식 기반 접근법’이다. 질병과 연관된 유전자, 유전자 조절에 영향을 미치는 약물 등을 선으로 잇는 네트워크를 그려보고, 패턴을 찾아 비슷한 걸 묶어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징(signature) 기반 접근법’은 유전자부터 유전자에서 나온 전사체, 단백질까지 이르는 다양한 생물 정보를 기반으로 유사성을 판단해 어떤 약과 질병이 연결되는지 보는 방식이다. 셋 다 사람이 일일이 검수하기 힘든 빅데이터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패턴을 찾아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체에는 약 2만 1000개 정도의 단백질이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알파폴드가 나오면서 이들 대부분의 구조가 예측됐죠. 단백질의 구조를 알면 기존 약의 알려지지 않은 효능을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10월 30일 오전, 서울대에서 만난 이주용 서울대 약대 교수의 연구실은 약학 하면 으레 떠오르는 화학 실험실보다는 전산실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전문 분야가 AI를 기반으로 신약을 개발하는 계산화학이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 등장한 AI인 언어모델과 알파폴드가 신약 재창출 분야에도 활력을 가져다줬다”고 표현한다. “임상 데이터의 경우 이전에는 의사들의 수기 기록을 대학원생들이 다 분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언어모델이 이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죠.”

     

    그의 연구 방식은 특징 기반 접근법에 가깝다. 약물 분자는 대개 몸속의 표적 단백질의 특정한 부위에 결합해서 약효를 발휘한다. “기존 약물을 알파폴드가 구조를 예측한 2만 개가량의 인체 단백질에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붙여보는 거죠. 그러다 보면 예상 못 한 단백질과 약물이 붙을 수도 있겠죠?” 이렇게 약물이 기존의 단백질이 아닌 다른 단백질과 반응하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AI로 단백질 결합을 예측해 목표가 되는 단백질을 빠르게 찾아내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실제로 AI를 이용해 신약 재창출을 일궈낸 사례도 생겼다. 2020년 제약사 일라이 릴리의 벤카테시 크리쉬난 연구원이 이끈 연구팀은 AI 분석을 통해 면역조절 약품인 ‘바리시티닙’이 코로나19에 효력이 있다고 발표했다. doi: 10.15252/emmm.202012697 그 결과 바리시티닙은 FDA의 긴급사용승인을 받고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렘데시비르와 함께 코로나 치료에 쓰였다. 

     

    2024년 2월에는 생성형 AI를 사용해 알츠하이머병을 대상으로 신약 재창출 후보군을 가려내는 연구도 등장했다. doi: 10.1038/s41746-024-01038-3 그 결과 생성형 AI는 1920년대 개발된 당뇨병 치료제 ‘메트포르민’을 비롯한 잠재적 후보 물질을 알려줬다. 후보 물질에 관한 다각도의 검증이 뒤따라야겠지만,  AI를 활용하는 것이 신약 재창출에 도움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자료: Overcoming cancer therapeutic bottleneck by drug repurposing

    신약 개발 과정의 흐름. 완전히 새로운 약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 10~17년이 걸리는 반면, 신약 재창출은 앞선 과정을 생략할 수 있어 들이는 시간과 비용이 훨씬 줄어든다.

     

     

    ‘계륵’에서 ‘차세대 제약 파이프라인’으로

     

    취재하면서 만난 두 교수는 AI 분야의 발전으로 신약 재창출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지만, 새로운 신약 개발 방법이 되기엔 시간이 걸릴 것이라 전망했다. 우선은 연구가 더 필요하다. 이형기 교수는 “코로나 때도 전 세계 많은 기업, 정부, 학계에서 다양한 신약 재창출 시험을 실시했지만 최종 허가까지 간 건 렘데시비르뿐”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많은 제약 회사가 신약 재창출에 뛰어들었지만, 한 곳도 성공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제약 업계가 신약 재창출 연구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신약 재창출로 돈을 벌 방법이 마뜩잖기 때문이다. “기존 약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신약 재창출의 경우 물질 특허가 만료된 경우가 많습니다. 약 가격이 저렴하니 매출을 통해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가 어렵죠. 약학계에서 보기에 신약 재창출은 약간 계륵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형기 교수의 설명이다. 한국에서도 대기업 대신 제약 스타트업과 학계에서 신약 재창출 연구를 주도적으로 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재창출이 꾸준히 연구돼야 하는 분야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 첫 이유는 신약 재창출 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AI와 제반 기술이 기존의 신약 개발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주용 교수는 “신약 재창출은 신약 개발의 보완적 파이프라인이라는 느낌이 강하다”며 “신약 후보 물질을 만드는 데 쓰는 AI에 신약 재창출 연구의 경험이 들어갈 수 있다”고 밝혔다. “알파폴드와 언어모델로 기존에는 할 수 없는 규모와 속도를 낼 수 있게 됐기 때문에, 방법론만 확립되면 신약 재창출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형기 교수는 “앞으로 4~5년 주기로 신종 전염병이 나타날 수 있다는 추측이 있다”며, “신종 전염병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신약 재창출 연구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전 역병에서 배웠던 기술을 방안으로, 다음에 새로운 전염병이 닥쳐올 때 신약 재창출을 통해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면 세계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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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창욱
    • 디자인

      이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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