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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레이션 가동 Y/N]
*
휴대용 라디오는 우주선 모양이었다. 소희는 자신이 직접 커스텀한 거라고 우쭐거렸다. 라디오는 한 손에 쥘 수 있게 작았다. 이 정도면 들키지 않고 잘 숨길 수 있을 거다.
“정우주. 진짜 그걸로 돼? 애들 노래방에 있다는데 같이 가자.”
“알잖아. 늦게 들어가면 혼나.”
“그래도 생일인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주는 소희를 집에 초대했다. 집에 친구를 데리고 오는 건 금지. 부모님이 정한 규칙을 어긴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첫 일탈인 만큼 나름 계획을 세웠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늦게 들어오는 수요일로 날을 정하고, 냉장고에 있는 걸 먹으면 들킬까 봐 집에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도 사 갔다. 딴에 철저했던 계획은 엄마가 일찍 돌아와서 바사삭 부서졌다. 엄마는 우주의 방문을 열고 현관의 신발 누구 거냐고 화를 냈다. 못난 것. 규칙 하나 지킬지 모르는 한심한 것. 그렇게 평소처럼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는 소희에게 이왕 왔으니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 소희는 몸을 덜덜 떨며 억지로 밥을 먹고 골목에서 모두 토했다. 우주는 소희의 등을 두드려 주며 또다시 혼자가 되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날, 소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인사를 건넸다. 함께 가지 못할 걸 알면서도 놀러가자고 권했고, 아무렇지 않게 부모님 흉을 보기도 했다. 그 변함없는 성격이 많은 순간 우주를 구했다. 라디오를 주머니에 넣고 아파트로 들어가려는데 소희가 우주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랑 친한 친척 언니가 이번에 변호사 됐어. 무료상담 그런 것도 해 준대. 가정 폭력 같은 것도. 심리적인 학대도 증거만 잘 모으면 된다고 했어.”
“알아. 하지만 그런 거 나와는 관계 없잖아.”
우주의 대답에, 소희는 한숨을 쉬더니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우주에게 건넸다. 우주는 소희가 건넨 사탕을 주머니에 넣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다정한 소희. 다정해서 우주의 두려움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소희. 소희가 모른 척해 주었던 폭력은, 폭력이 아니어야만 했다. 우주의 부모는 한바탕 폭언을 내뱉은 후엔 늘 사랑한다고, 이건 모두 너를 위한 거라고 말했다. 우주는 그 말을 동아줄처럼 붙잡고 괜찮다고 주문을 걸었다. 만약 그 주문이 풀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두려움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상상했다. 자연재해를 불러오는 신이 있다고 상상하고, 끝없는 바다 너머 무엇이 있는지를 상상하고, 지구를 거북이가 떠받치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 상상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다. 일단 한 걸음, 두려움에서 멀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상상할 수 있기에 두려워하면서도 탐색하고, 탐험하고, 실험하고, 실패하고 또다시 도전했다. 그러지 못했다면 지금도 지구를 떠받치고 있느라 거북이 등딱지가 무너져 내렸을 거다.
‘괜찮아. 이젠 이게 있잖아. 더 잘 참을 수 있을 거야.’
우주는 엘리베이터에 타서 라디오를 만지작거렸다. 얼마 전, 과학 시간에 선생님이 우주의 소리를 듣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방송국이 전파를 송신하지 않는 주파수에 라디오 채널을 맞추면 치익 하는 노이즈가 들리는데, 그 노이즈에는 우주 배경 복사가 일부 섞여 들어가 있단 거였다. 우주 전역에 퍼진 전자기파 복사는 160.23GHz 정도인데, 우주 어디에서든 균일한 값을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주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누군가가 노이즈 너머에서 말을 거는 상상을 했다. 아빠나 엄마가 폭언을 퍼부을 때에 누군가가 오늘 하루 잘 지냈냐는 말을 건네주면 좀 더 잘 버틸 수 있을 듯했다. 소희가 만들어 준 라디오가 있으면 언제든 어디서든 우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런 거라면 진짜 우주에 가지 그래? 환청 같은 말이 들렸다. 흠칫 놀라 뒤돌아보니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왜인지 아이의 얼굴이 낯익었다. 혹시 네가 말을 걸었냐고 물어보려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동시에 아이의 형체가 스르륵 사라졌다. 등골이 오싹해져 엘리베이터에서 서둘러 내린 우주는 이내 우뚝 멈춰 섰다. 우주의 시선이 멈춘 아파트 복도 한쪽에 옷장이 놓여 있었다.
우주는 흘린 듯이 옷장의 문을 열었다. 옷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안에 들어가 쪼그려 앉아 문을 닫았다. 완전히 어두워졌다. 라디오를 꼭 잡고 이리저리 휠을 돌리니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나왔다. 무릎을 끌어안고 그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행성 B160에는 통칭 ‘캔디타워’인 전파 망원경이 있다. 우주에서 가장 큰 구경의 초대형 망원경은 먼 우주에서 오는 미약한 전파를 포착해, 신호를 소리로 변환하는 역할을 한다. 변환된 메시지는 각 부서에서 우주 연합의 각종 제도 정비를 위한 자료로 쓰인다. 나는 이 타워 한쪽에 위치한 ‘통합 행성 인구대책 연구반’에서 근무한다. 한때는 월급 루팡으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직원 대부분이 다크써클을 눈 아래 달고 블랙포션을 쭉쭉 빠는 업무과다 부서다.
“우주 씨. 우주 좀 구하러 가야겠다.”
야근을 몰고 온 빌런, 부임한 지 일 년 남짓 된 소장이 내 앞에 왔다. 소장은 부임하자마자 질풍과 같은 기세로 연합 정부의 ‘즉각 대처 필요 합의안’에 ‘미성년 긴급조치 보호’ 항목을 추가했다. 그때부터 부서는 바빠졌다. 우주에서 모여드는 메시지를 분석해 보호가 필요한 미성년을 구출해 보호하고, 행성의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사후 처리를 하는 것까지 몽땅 우리 부서의 일이 되었다. ‘정시 퇴근 안녕, 어서 오세요 야근’의 날들의 시작이었다.
그중에서도 최악이 ‘기억삭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출장을 가야 하니깐!
“기억 삭제 시행할 거야, 우주 씨가 동행해서 처리하고 와.”
“저 이전 출장 때 고지사항 다 못 외워서 버벅거리다가 가해자한테 얻어맞을 뻔했어요. 좀 더 맷집 좋은 행성 출신들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크로무르 행성이라던가.”
“자네, 그거 종족 차별 발언인 거 알지? 크로무르 행성 사람들이 덩치 크다고 다 싸움을 잘하는 게 아냐. 우리 팀의 소소만 해도 바퀴벌레도 못 잡잖아. 하여간 이 행성 사람들은 외모로 타 행성 사람들을 판단하는 버릇 좀 버려야 해. 우리 옥토퍼 행성 사람들을 처음 봤을 때 팔이 네 개니깐 조립을 잘하겠네, 어쩌고 하던 거 생각하면”
“아니, 그게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왜 사람을 종족 차별주의자로 몰아요?”
“그럼 뭔데? 포털이란 편리한 도구가 있어도 행성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다는 그런 이유는 아니지?”
바로 그거라고, 그거! 출장이 싫은 건 그 일이 유별나게 험해서가 아니다. 적응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20여 명의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보다야, 아이 하나를 데리고 포탈을 넘는 쪽이 편하다. 난 심지어 포털 멀미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출장이 싫은 건, 행성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다. 행성을 떠난 동안 전쟁이 날 거라고 믿는 음모론자는 아니다.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연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시로 안부 전화를 걸어야 하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싫다. 이성이 아닌 본능이, 행성을 떠나면 무언가 일어날 거라고 외친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이 무섭다고 한들 병원 진단서를 떼어오지 않는 한, 그 이유로 회사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다. 특히 괜한 말을 해서 머리만큼 좋은 언변을 앞세워 툭하면 빈정거리는 소장의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치밀어 오르는 말을 꿀꺽 삼켰다.
“알았습니다. 갈게요. 출장. 대상이 누구라고요?”
“아까 말했잖아. 자네와 이름이 똑같은 우주. 우주가 우주를 구해야지. 안 그래?”
썰렁한 농담에 웃지 않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소장이 자리를 떠나고, 대상자의 파일을 태블릿에 옮긴 후 사무실을 나갔다. 오늘 저녁 출장이니 당장 대상자를 만나야 했다. 복도를 지나 접견실로 향하며, 대상자의 프로필을 읽었다. 이름은 우주. 지구 출신에 16살. 이름도 나이도 똑같은 대상자라니 기분이 묘했다. 대상자의 거주 국가 정보를 클릭해 살펴보니, 그곳은 만 19세 이상부터 성인으로 취급하는 모양이었다. 행성 B160에서는 만 14세부터 성인이다.
“언어, 심리적 폭력에 장기간 노출되었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도피하려는 성향을 보임. 보자. 지구의 대한민국. 어이구. 제도가 엉망이네. 가정이 양육을 거의 전담하는데다 국가의 개입은 소극적이고, 공동체 양육 제도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고미성년자가 독립할 수 있는 경제적인 지원이나 제도도 미비하네. 하여간 이런 행성이 문제야. 이래 놓고 다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이런 곳으로 돌아가느니 이곳에 남는 게 좋을 텐데. 왜 굳이 지구에 돌아가겠다는 걸까.
“예측 프로그램에 의하면 그대로 도피 성향이 지속될 경우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 가능성은 34%로 고위험군으로 분류. 개입이 결정되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접견실 문을 열었다. 흰 셔츠를 입은 아이, 우주가 두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주는 눈과 입을 제외한 얼굴 전체에 붕대를 둘렀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동행하게 된 책임관입니다.”
밝게 인사를 건네니 우주가 눈을 뜨고 나를 봤다. 우주의 눈동자는 무척 깊은 검은색이었다. 나와 같다. 눈동자가 검은색인 행성인은 드물다. 친밀감이 약간 생겨났다. 지구로 가기 전에 간단한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우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우주 씨는 거주지인 대한민국 법상 성인이 되려면 앞으로 3년이 남았고, 기억 삭제는 성년 이후 효과를 발휘합니다. 행성은 기억 삭제 진행 이후에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동일사항에 대해 재개입이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재개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부모인 정현길과 박미진이 심한 폭력을 행사하면 당신이 사망할 확률은 66%입니다. 우주 씨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34%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해했습니다.”
대답은 너무 짧았고, 말투는 덤덤해서 우주가 그 의미를 정말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렇군요. 음지구는 연합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긴급 개입밖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긴급 개입이 기억 삭제만 있는 건 아닙니다. 우주 씨가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행성보호가 있는데요. 우주 씨가 속한 대한민국의 성인이 될 때까지 다른 행성에서 보호를 받다가, 성인이 된 후 돌아가는 겁니다. 이 경우 생존 확률이 절반 이상으로 올라갑니다. 이 부분도 설명 들으셨나요?”
“들었습니다. 저는 지구로 갈 겁니다.”
우주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내겐 이 이상 참견할 권리가 없었다. 스타일러스 펜 끝을 액정에 꾹 눌렀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 뭘 하고 있었나요?” 결국 슬그머니 질문의 방향을 틀었다.
“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을지도.”
“그럴 수 있어도, 여기까지 들리진 않을 텐데요.”
우주의 눈가가 웃는 듯 가늘어졌다.
“들릴 거예요. 160.23GHz로 닿을 테니까요.”
*
포털로 연결된 곳은 우주의 집 베란다였다. 포털을 나오자마자 꿉꿉한 음식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베란다 가득 쓰레기가 쌓여 발 디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우주가 능숙하게 발을 움직여 쓰레기를 한쪽으로 밀었다. 베란다 창 너머로 보이는 거실은 불이 꺼져서 어둑했다. 베란다 문을 꽉 움켜잡고 가만히 옆으로 밀었다.
“뭘 그렇게 조심해요?”
우주가 피식 웃더니 베란다 문을 거침없이 열고 거실로 들어갔다.
“남의 집에 들어가는 거라 좀.”
“우리 집인데.”
우주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서도 퀴퀴한 냄새가 났다. 어둠을 눈에 익히려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았다. 거실에 놓인 탁자 위에 컵라면과 소주병이 나뒹굴었고, 소파는 옷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소파의 맞은편, 장식장에 액자 서너 개가 줄지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젊은 남녀와 어린아이를 가운데에 두고 찍은 사진이었다. 아이는 아마도 우주일 것이다. 한 번도 붕대를 푼 우주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도 어린 우주의 얼굴이 왜인지 낯익었다. 남자는 이때, 아이의 어깨를 굉장히 세게 움켜쥐었다. 어깨가 빠질 듯 아팠지만 그래도 웃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카메라 앞에서 웃지 않으면왜지? 왜 내가 이런 걸 알고 있지? 액자를 내려놓았다.
“가출신고 그딴 걸 왜 낸 거야? 경찰이 찾아오고, 귀찮아졌잖아!”
“그럼 어쩌라고? 학교에서 계속 전화가 오는데!”
빠끔히 열린 안방 문 사이로 불빛과 목소리가 동시에 새어 나왔다. 우주가 안방 문 앞에 서서 조용히 내게 손짓을 했다. 우주와 함께 문틈으로 안을 엿보았다. 사진보다 나이가 든 남녀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제 곧 승진 심사야. 괜한 말 나와서 좋을 거 없다고 몇 번을 말해!”
남자가 여자의 뺨을 후려쳤고 말다툼은 난투극이 되었다. 나는 우주의 눈을 가리려 했지만, 우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거칠게 방문을 열었다. 우주는 뒤엉킨 남자와 여자에게 주저 없이 총을 쐈다. 총구가 뿜은 에너지 그물이 남녀를 뒤덮었다. 남녀는 갑자기 움직일 수 없게 되고서야 우리를 봤다. 여자의 몸 위에서 버둥거리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 그물을 걷어내려는 듯 두 팔을 마구 휘둘렀지만, 그럴수록 그물은 두 사람의 몸에 더욱 얽힐 뿐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포박이라도 당한 듯이 등을 맞대고서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다.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입을 열었다.
“행성 인구대책 부서에서 나왔습니다.”
“행성뭐?”
“정우주에게 폭력을 행사한 정현길과 박미진은 연합 아동 보호법 39조의 6항에 의해 10년 이하의 징역 및 15년 이하의 노동 감화형 대상입니다. 단, 어디까지나 긴급 개입으로서”
“무슨 헛소리야!”
남자의 고함이 내 말허리를 잘랐다.
“연합? 행성? 대체 그게 뭔데? 야, 정우주. 어디서 부모 상대로 장난질이야!”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에너지 그물의 포박을 이겨내고 내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기세 좋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것도 잠시,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을 거다. 체포 대상이 공격성을 보일 경우 에너지 그물은 완전 제압을 목표로 고압 전류를 흘려보낸다.
“여보? 여보! 왜 이래. 정신 차려!” 여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남자의 몸을 흔들었다.
“계속하겠습니다.”
어쨌든 나는 전달 사항을 다 읊어야 했다. 그게 여기 온 이유니까. 내가 다시 입을 열자, 여자는 남자의 몸을 흔들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우주야? 우주야. 엄마한테 왜 이래? 엄마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여자가 이름을 부르자, 오싹하게 어깨가 떨렸다. 어째서일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만 같았다. 내 몸속을 떠도는 주문.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저주. 우주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우주야. 엄마한테 왜 이래? 엄마가 너한테 뭘 했든, 그건 다 널 사랑해서 그런 거야. 너도 알잖아?”
“긴급 개입이기 때문에 선택지가 부여됩니다. 입건되거나 아이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쪽. 둘 중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이에 대한 기억이 삭제되면 아이는 본래부터 정현길과 박미진, 두 사람에게 속하지 않은 존재가 됩니다.”
“당연히 지우지! 지워, 당장 지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소리쳤다. 나와 맞잡은 우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같은 거, 내 인생에 있으나 마나야! 지우고말고. 당장 내 인생에서 꺼져!”
“사랑하신다면서요.”
우주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우주야. 우주 어디서든 동일한 값의 Hz에 닿을 수 있어. 어딘가에는 동일한 시간 축에서 갈라져 나간 수많은 세계가 존재하고, 만난 적 없는 쌍둥이처럼 무언가 다른 선택을 한 네가 살고 있을 거야. 그들 중 누군가는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부모와 있을지도 몰라. 누군가는 일찌감치 폭력적인 부모에게서 벗어나기를 선택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조금 더 참고 견디는 중일 수도 있지. 우리는, 너와 나는, 그들 전부를 구하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말이야.
“나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게 이 사람들에게 벌이 될까요?”
하지만 말이야. 그들은 너와 함께 어른이 되어 갈 거야. 그래. 그러니깐.
“오히려 기뻐할 것 같은데요.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거나, 입을 꿰매 버리는 것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자가 다급히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남자와, 입을 막은 채 눈치를 살피는 여자의 모습은 그저 초라했다.
“저한텐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삭제 요청합니다.”
기억 삭제 요청을 전송하고 에너지 그물을 거두었다. 그물이 벗겨지자 여자의 몸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깨어나면 남자도 여자도, 이 밤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요청이 승인되면, 우주가 성인이 되어 이 집을 떠난 순간부터 그들은 우주를 잊어버릴 것이다. 우주가 원한대로 그들은, 우주의 우주에서 사라질 것이다.
돌아갈 시간이다. 베란다에 서서 포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데, 우주가 내게로 다가와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사탕이었다.
“열다섯 살 크리스마스 날에 핫케이크를 구웠죠.”
그랬다. 핫케이크를 넉 장쯤 구워 쌓은 뒤, 생크림을 바르면 그럴싸한 케이크처럼 된다는 동영상을 봤다. 케이크를 만들어서 파티를 하자고 할 계획이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면, 케이크를 가운데에 놓고 다 같이 박수를 치면 화목한 집이 될 것만 같았다. 정성껏 핫케이크를 굽는데 무언가 날아와 뒤통수를 때렸다.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빈 페트병이 발아래 나뒹굴고 아버지가 내 등을 발로 걷어찼다. 결국 팬케이크는 두 장만 구웠고, 생크림은 바르지 못했다. 식탁에서 먹으면 또 욕을 들을까 봐, 방에 가지고 들어가서 꾸역꾸역 먹었다. 팬케이크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나는그 팬케이크를 먹지 않았어요.”
우주가 얼굴에 감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붕대가 흘러내리며 드러난 우주의 얼굴은 절반이 화상 흉터로 덮여 있었다. 그럼에도 그 얼굴은 분명히 나였다.
“너무 화가 나서 프라이팬을 집어서 접시에 놨던 팬케이크를 아버지에게 던졌죠. 처음 한 반항이었어요. 팬케이크가 아버지의 뒤통수에 맞고 떨어지는데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죠. 팬케이크가 까맣게 타들어가던 프라이팬을 나에게 던졌어요. 그때 이 화상을 입었죠. 고통에 머리가 어지러웠어요. 눈을 감았죠. 고통스러워 눈을 감고”
“우주의 누군가 나를 위로해 주는 상상을 했겠죠.”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들렸어요. 갑자기 주변 풍경이 막 흔들렸어요. 고장 난 모니터 화면처럼요. 흔들리는 틈으로 훅 떨어졌죠.”
옷장 안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 나도 그 틈을 봤다. 옷장 벽면에 생겨났던 소리의 균열 같은 그 안으로 손을 뻗었던, 잔몽 같은 기억.
“그러니까 너는”
“아주 많은 우리 중 한 명.”
옆에 선 우주가 사탕 봉지처럼 투명해져서 어둠에 섞여 들었다. 희미해지는 우주의 얼굴 위로 수많은, 나를 닮은 얼굴들이 겹쳐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말을 걸었던 아이도 어쩌면 나였을까. 얇은 비닐에 쌓인 동그란 사탕이 손바닥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아까 나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 꼭 기억해. 환청 같은 목소리와 우주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우주의 주파수를 찾아 다이빙했다.
다정한 노이즈가 들렸다.
*
“학생.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우주는 눈을 떴다. 경비원이 우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엉덩이가 차가웠다. 옷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주는 집 앞 복도에 웅크린 채였다. 우주는 경비원의 미심쩍은 눈초리에서 도망치듯, 황급히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주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새된 고함이 날아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우주가 거실에 올라서자 술병이 날아왔다. 우주의 귓가를 스친 술병은 현관문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병 깨지는 둔탁한 파열음이 났다. 우주는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를 켠 채 주머니에 넣고 거실 소파에 누운 엄마의 앞에 섰다. 엄마에게 술 냄새가 났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엄마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잖아. 사랑해서.”
“아니야.”
“뭐?”
주문이 풀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날 위해서가 아니야. 그런 거, 사랑이 아니야.”
엄마의 고함소리는 더 이상 우주에게 와닿지 않았다. 우주는 방에 들어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달콤함이 목 아래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눈을 감자 달콤하고 푹신한, 수많은 우주들이 손을 잡고 우주를 감싸 안았다. 이젠 우주는 상상할 수 있었다. 주문이 풀리면 어떻게 될 것인지.
주문이 풀리면 아이는 살아남아 어른이 될 것이다.
*
[개입 시뮬레이션 종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