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흔히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진짜 업적은 양자역학의 뼈대가 되는 아이디어를 처음 찾아낸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격동의 20세기를 살며 양자역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젠베르크의 삶을 돌아본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1901. 12. 15. ~ 1976. 2. 1
독일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1925년 6월, 북해의 작은 섬 헬골란트에서 휴가 도중 역사적 발견을 했다. ‘양자역학’이라는 물리학의 기본 이론을 만든 것이다. 아이작 뉴턴의 사과나 찰스 다윈의 핀치처럼 ‘헬골란트의 빛’은 과학사에서 의미심장한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1940년대에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핵무기의 기본원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에서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물론 하이젠베르크는 핵무기 연구에 개입했음을 부정했다. 이후 그는 물리학 연구의 시대적 흐름에서 소외돼 연구를 그만두고 쓸쓸하게 노년을 보낸 것처럼 여겨진다. 이 이야기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의혹 1 양자역학을 처음 만들었다?
1890년대부터 물리학의 기존 이론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현상들이 속속 발견됐다. 대표적으로 1900년, 흑체복사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에너지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에너지의 값이 실수처럼 연속적인 값이 아니라 정수처럼 띄엄띄엄 떨어진 값만 가능하다는 가설을 도입했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양자화(量子化)’라 부른다.
덴마크의 닐스 보어는 1913년 이런 기본 아이디어를 모아 새로운 원자모형을 처음 제안했고, 독일의 아르놀트 조머펠트는 이를 일반화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보어-조머펠트 이론은 물리량이 양자화되는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 임시방편에 가까웠다. 1920년대, 보어-조머펠트 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여러 현상이 나타나면서 더 체계적이고 정교한 역학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조머펠트는 바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지도교수였다.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조머펠트 이론을 넘어서는 새 이론을 만들기 위해 애쓰게 된 것은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 덕분이다. 보른은 수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상대성이론을 비롯한 물리학의 여러 문제에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1924년 무렵 새로운 역학이론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하고 이를 ‘양자역학’이라 부른 사람이 바로 보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 박사학위를 마치자마자 괴팅겐대로 가서 보른의 조교가 됐다. 그리고 보른의 연구 프로그램 안에서 새로운 역학 이론을 모색하던 중, 1925년 헬골란트에서 양자역학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보른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혼자 자신의 아이디어를 논문으로 투고했다.
보른은 다방면에서 폭넓게 연구한 물리학자였다. 보른은 하이젠베르크가 이해하려는 문제와 문제를 풀 기본 틀을 마련했다. 또 하이젠베르크의 직관적 아이디어를 체계화하고 제대로 된 이론형식체계로 만들었다. 1925년 여름, 보른과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다른 독일 물리학자 파스쿠알 요르단은 하이젠베르크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양자역학을 위하여 II”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세 명이 써서 ‘삼인작’이라는 애칭으로 널리 읽혔다.
1932년 노벨 물리학상은 “양자역학을 만든 공로”로 하이젠베르크가 받았다. 보른은 노벨상 수상자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이젠베르크도 보른의 축하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괴팅겐에서의 공동연구에 대해 저 혼자 상을 받아 마음이 매우 안 좋았습니다. 모든 훌륭한 물리학자들이 선생님과 요르단의 기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하이젠베르크는 헬골란트에서 양자역학의 세계를 열어젖혔지만, 보른과 요르단의 기여가 없었다면 체계적인 이론으로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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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해에 있는 독일의 작은 섬, 헬골란트의 전경. 1925년 6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양자역학의 뼈대가 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2 1947년 11월, 영국 에딘버러에서 찍힌 막스 보른(왼쪽)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오른쪽).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의 직관적 아이디어를 체계화해 양자역학이 제대로 된 이론형식체계가 되도록 만들었다.
의혹 2 독일에서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9월 26일 베를린 육군병기국에 도착한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물리학자들과 더불어 원자력 에너지를 기술적으로 활용하는 문제를 연구하게 됐다. 그 비공식 이름은 ‘우라늄 클럽(Uranverein)’이었다.
우라늄 클럽은 전쟁이 발발한 그해 4월 만들어졌다. 핵분열 반응을 발견한 독일 화학자 오토 한이 주축이 된 1차 모임에서 주된 관심은 ‘우라늄 기계’ 즉 핵반응로를 건설하는 데 있었고, 겉으로는 핵반응로를 이용해 막대한 에너지를 얻는 것이 목표라고 내세웠다. 하이젠베르크는 2차 모임부터 참여하면서 실질적 책임자가 됐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48년, 전범재판과 관련한 진술서 초고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우라늄 클럽의 연구는 철저하게 핵반응로를 건설해 에너지를 얻으려는 연구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1939년 12월 6일 우라늄 클럽에 제출한 비밀보고서에는 “이제까지의 폭탄보다 몇십 배 강력한 폭탄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언급했다.
또 다른 단서는 1956년 원자폭탄 개발 과정을 밝힌 책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을 발표한 스위스의 저널리스트 로베르트 융크에게서 나왔다. 하이젠베르크는 융크에게 “우리는 핵폭탄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여러 기술적 장애물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바람에 다행히 핵무기 개발을 더 깊이 추진하지 않을 수 있었다”라는 내용의 네 쪽 짜리 편지를 보냈다. 이에 대해 전쟁 당시 하이젠베르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당사자 닐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편지를 강하게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자네의 지휘 아래 독일은 원자 무기를 개발할 모든 준비가 됐으며, 자네는 이에 대해 매우 상세히 알고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네.”
보어에 따르면, 하이젠베르크는 분명히 핵무기 개발에 깊이 연루됐고, 이후 전범재판 등의 상황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부정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과학연구 총책임을 맡고 있던 군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는 단기간 안에 성과를 낼 수 없는 핵무기 연구에 자원을 공급하려 하지 않았다. 또 핵무기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우수한 연구자 다수가 독일을 떠났고, 원자로에 쓰는 중수를 만드는 중수공장을 폭격당해 핵무기를 개발할 여건이 매우 열악했다. 결론적으로 하이젠베르크 자신도 독일에서 핵무기 개발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혹 3 전쟁 뒤 물리학 연구를 그만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물리학계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것에 비해 1950년대 이후에는 그가 물리학 연구를 많이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후에도 우주선과 통일장이론을 탐구하면서 연구자의 삶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초전도체의 성질을 탐구하는 논문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박사학위 논문 때부터 관심을 놓지 않았던 난류 연구로 현대적인 카오스 이론에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 심지어 플라즈마 물리와 핵융합 과정까지, 그가 참여한 물리학 연구의 분야는 방대했다.
무엇보다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 해석’이라는 용어를 처음 창조했다. 코펜하겐 해석은 1925년에서 1929년 사이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있던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주도해 만든, 양자역학의 계산 결과를 해석하는 방법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코펜하겐 해석이라 불리는 어떤 표준화된 해석이 따로 있지 않았다.
코펜하겐 해석은 실은 1952년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이 양자역학의 대안적 해석을 제안한 것에 대한 반발로 하이젠베르크가 마치 1920년대부터 양자역학의 표준적인 해석이 있었던 양 이름 붙인 말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55년과 1956년, 영국 스코틀랜드 성앤드류대에서 양자역학에 관한 강연을 진행했다. 그리고 여기서 코펜하겐 해석이란 용어를 처음 제안하고 이를 체계화했다. 당시 하이젠베르크가 제시한 해석은 보어의 양자역학 해석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전쟁 이후 하이젠베르크의 활동은 연구 이외에도 다방면으로 펼쳐졌다. 하이젠베르크는 뮌헨 물리학 및 천체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직과 독일연구재단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유네스코 서독 대표로도 활동했다. 또 스위스 제네바의 핵 및 입자물리학 연구협의회(CERN)의 서독 대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9년 출간된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 ‘부분과 전체’는 원자물리학과 관련된 대화를 통해 당시까지의 양자역학 역사를 회고하는 중요한 사료가 됐다.
하이젠베르크의 부인 엘리자베트 하이젠베르크는 하이젠베르크를 “그 무엇보다 즉흥적인 사람이며, 탁월한 과학자며, 매우 재능 있는 예술가이며,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925년 하이젠베르크가 만난 헬골란트의 빛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물리학 이론을 가져다줬다. 하이젠베르크의 삶은 전쟁과 정치로 얼룩졌지만, 물리학자로서의 그의 생애는 과학사에 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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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