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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과동키즈] “언젠간 티타늄 캐리어를 만들고 말 거예요”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했으니 저는 성적은 좋은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이나 목표 같은 것은 없었죠. 좋아하는 게, 하고 싶은 게 뭔지도 크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막연히 기대했습니다. 때가 되면 어련히 뭐든 생기겠지 하고요.

 

 
KAIST 재학 중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열린 세계 소셜 벤처 대회(GSVC)에 참가한 필자의 모습. 대학생 시절 장래에 대한 목표가 막연했던 덕분에 더 과감하고 참신한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

 

막연한 덕에 더 과감했던 대학 생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죠. 제가 과학고 진학한 계기가 딱 그랬습니다. 하고 싶거나 되고 싶은 것이 딱히 없었는데 그렇게 과학도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미적분 기호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른 채 입학한 과학고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입학 직전에 치른 배치고사 성적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뒤에서 3등.

 

지치는 법을 잊은 치타처럼 치고 나가는 학교 진도는 따라가기조차 버거웠습니다. 그때까지 겪은 적 없던 극한 경쟁에 매일 아침을 맞기가 두려울 지경이었죠. 하지만 이런 가차 없는 담금질 속에서 조금씩 과학에 눈떴습니다. 그때 과학동아가 제 꿈을 선명하게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줬고요. 매달 다양한 과학 기사를 보며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기술의 경이를 깨달았고, 어쨌든 과학도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KAIST에 진학했습니다. 

 

KAIST는 2학년에 학과를 정하는데, 저는 생명화학공학과를 선택했습니다. 1학년 가을 학기에 C -를 받은 과목인 기초 프로그래밍이 계기였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수강한 모든 과목 중 유일한 C -였죠. 생명화학공학과는 KAIST에서 프로그래밍을 거의 배우지 않고도 졸업이 가능한, 유일한 공대 전공이었습니다.

 

학교 생활은 무척 즐거웠습니다. 제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죠. 사실 저는 대학교 입학 후에도 꽤 오래도록, 원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막연함에서 오는 결핍을 동력 삼아서,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들을 해봤습니다.

 

봉사 동아리에서 야간학교 부장으로 활동하며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경영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들은 학교란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도록 도와줬죠. 이 시선은 월트 디즈니 코리아에서의 인턴십과 여러 대외 활동을 경험하며 학교와 학과, 나이를 넘나드는 다양한 사람과의 교류로 더 넓어졌습니다.

 

 

1 2016년 크라우드 펀딩으로 출시한 트래블러스 하이의 첫 여행용 가방. 이 펀딩이 크게 성공하면서 필자는 여행을 위한 공학의 길로 나아갔다.

2 첫 여행용 가방을 위해 만든 시제품 가방. 실제 여행하는 과정에서 가방의 개선점을 찾는 과정은 공학과 맞닿아있다.  

3 필자가 시제품 가방을 구상한 스케치의 일부. 

 

학교와 회사의 공학이 마주본 시간

 

 

가장 중요한 전공 공부가 쉽진 않았지만 열성을 다했습니다. 제대하면서 ‘과탑’을 해보겠다고 결심했죠. 그 복학 학기는 샛별을 보며 도서관에 들어가서 지는 달빛과 함께 기숙사로 돌아간 나날이었습니다. 모르는 게 생길 때마다 관련 논문을 읽었는데, 학기말엔 그렇게 쌓인 논문이 허리춤을 넘어설 정도였어요. 성적은 아주 좋았는데, 아쉽게도 과탑은 못했습니다. 공부의 즐거움을 막연하나마 깨달았다는 것이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2년의 군 생활과 한 학기의 휴학을 포함한 6년 반의 학부를 마치고, 화학 회사의 연구원이 됐습니다. 꿈에 그리던 과학도의 길에 엔지니어로서 들어섰죠. 2년간 저는 ‘ASA’란 플라스틱을 연구했습니다. 모든 플라스틱은 재료의 조성과 첨가제의 비율, 성형 조건의 변화에 따라 물성도 천차만별입니다. 고객의 요구에 따라 최적의 배합과 올바른 성형 조건을 파악해 ASA 생산 과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론과 현실의 간극을 마주하며, 책에서 배운 지식을 적용해보거나 학교 밖의 지식과 경험으로 외연을 부지런히 확장했죠.

 

이렇게 엔지니어의 삶이 안정적으로 이어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꽤 뜬금없는 계기와 나름의 논리적인 이유로 현재의 경로에 접어들었습니다. 퇴사를 마음먹은 후로 고민이 아주 길었어요. 대학원과 이직, 창업의 세 갈래길을 한참 저울질한 끝에 창업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전공을 살린 창업은 역시나 만만찮았습니다. 화학공학과에선 석유화학, 정유처럼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는 장치 산업에 필요한 지식을 주로 배웁니다. 불과 2년 경력의 사회 초년생은 결코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분야죠.

 

더 좋은 여행을 위한 공학의 길로

 

 

밤새운 고민이 몇 날 며칠 이어졌습니다. 돈은 많이 들이지 않으면서 결과를 빨리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분명 힘든 길이 될 테니 당장 돈은 못 벌더라도 재미는 있었으면 했습니다. 아주 오랜 고민 끝에 저는 가방과 여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트래블러스 하이’란 여행용 가방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준비했고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실패하면 회사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었죠. 첫 상품인 가방이 매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다음 상품의 반응은 좀 더 좋았죠. 이렇게 여행과 가방을 위한 공학도가 됐습니다.

 

저는 매 순간 공학에서 배우고 경험한 것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모든 공학은 현실의 불편을 감지하는 데서 출발하죠. 여행을 갈 때마다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필요를 포착합니다. 그 불편을 해결할 기능들을 고안하고, 이를 조합해 제품을 기획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은 다양한 방법론과 장치로써 더 유용한 삶을 추구하는 공학의 목적과 직결됩니다.

 

공대에서 저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경험, 분석해서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을 익혔습니다. 오늘도 제가 겪어온 삶의 궤적 위에서 더 좋은 가방을 개발하고 더 많은 여행자와 함께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이제 저에게 여행과 가방은 가장 공학적인 주제입니다.

 

가방 장사꾼인 저에겐 꿈이 하나 있습니다. 언젠간 티타늄 소재의 캐리어를 만드는 것이죠. 티타늄은 얇은 판재로 가공하기가 쉽지 않아서 캐리어와는 상극인 재료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제 도전 의식을 자극합니다. 학교의 지식과 회사의 경험이 모두 필요할지 모릅니다. 이 길의 끝에서 저는 마침내 화학공학도로 회귀할 제 모습을 상상합니다. 이 꿈을 이룰 때까지 앞으로도 부지런히 달려 보겠습니다.

 

우린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부족한 능력과 주변 환경을 탓하며 나아가길 주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학의 길은 아주 많습니다. 이공계 진학을 꿈꾸는 학생 여러분을 수많은 여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쉬어가도 좋고, 좌절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죠. 이공학도를 꿈꾸는 여러분이 무한히 샘솟는 체력과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마음, 그리고 자신만의 티타늄 캐리어와 함께 과학의 여정으로 계속 나아가길 바랍니다.  

 

 
LG화학 테크센터의 신입사원 시절.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생산 현장에 적용할 뿐만 아니라, 생산 현장의 고유한 지식과 경험으로 시야를 넓힐 수 있었기에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나만의 과학동아 활용법
Q1.과학동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다면?

경북과학고에 입학해 처음 접한 과학동아에서 2004년 12월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지진과 쓰나미 기사를 보고, 이 재해의 위력을 자세히 배웠습니다. 2011년에 일본 도호쿠 대지진의 뉴스를 보자마자, 과학동아의 이 지진 기사가 떠올랐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인상적인 기사였습니다.

Q2.과학동아를 실제로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전원 기숙사 생활의 과학고에선 컴퓨터를 마음껏 사용할 수 없었고, 사회를 접하는 통로는 신문과 뉴스 정도였어요. 그래서 과학동아의 모든 기사를 정독했습니다. 과학계의 한 달 뉴스를 한 번에 본다고 생각하며 빠짐없이 읽었습니다. 덕분에 편중되지 않고 다양한 지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진로 결정에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Q3.과학동아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꿈이 없어 걱정하는 독자도 계시겠죠. 위에서 전한 제 이상과 응원에 조금 현실적인 대답을 덧붙입니다. 그럴수록 열심히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사회는 여러분의 성취만큼, 꿈을 이룰 기회도 줍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에 불가능은 없지만, 지름길 대신 굳이 돌아서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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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글 및 사진

    박인혁 {트래블러스 하이 대표)
  • 에디터

    라헌
  • 디자인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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