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플랑크연구소의 별칭은 ‘노벨상 사관학교’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39명의 수상자를 배출했고, 최근 4년 동안에만 6명이나 노벨상을 받았다.
이런 최고 수준의 기초과학 연구소에 한국인 과학자가 처음 단장으로 선임됐다는 소식은 정초부터 한국 과학기술계를 뜨겁게 달궜다. 오는 6월 공식 임기를 시작하는 차미영 KAIST 전산학부 교수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그가 5년 동안 이끈 기초과학연구원(IBS) 데이터 사이언스 그룹의 ‘워룸(war room)’에서 이뤄졌다.
‘자율성’ 존중하는 연구단 꾸리고파
Q.‘워룸’이라니, 회의실 이름이 무시무시합니다
연구할 땐 끝장을 보자는 의미예요. 여기 전자칠판에 잔뜩 적힌 글씨들이 치열한 전쟁의 흔적들이죠. 우리 연구실에는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였어요. 주말에도 빨리 (연구실에 출근할 수 있는) 월요일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요. 출퇴근 시간이나 연구 공간 제약은 하나도 없지만 다들 자율성을 갖고 본인의 연구를 하고 있어요. 가짜뉴스, 인공지능(AI)의 편향, 식량부족 등 각자 다양한 사회문제를 AI로 분석해요. 독일에서도 이 분들과 함께 연구를 이어나갈 계획입니다.
Q.막스플랑크연구소도 연구 자율성을 굉장히 중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심사를 통해 선정된 연구과제는 모든 권한을 연구자에게 주고, 간섭하지 않는 ‘하르나크 원칙’이 적용된다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무한한 자유 뒤에는 큰 책임이 따릅니다. 5년 동안 제약 없이 예산을 썼으면 5년 뒤엔 그에 걸맞는 훌륭한 성과가 나와야 해요. 저는 솔직히 KAIST와 IBS에서도 유사한 연구 자율성을 보장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가짜뉴스에 주목하지 않을 때 관련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최근에 위성영상 빅데이터를 AI로 분석하기 시작한 것도 그 덕분이었습니다.
Q.단장에 선임될 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나요?
전혀요. 저라면 하버드대나 옥스퍼드대 교수 같은 안정적인(?) 사람을 골랐을 것 같아요(웃음). 실은 막스플랑크 보안 및 정보보호 연구소에서 개최하는 심포지엄에 발표를 해달라고 해서 갔더니 그게 사전 인터뷰였어요. 후보자들을 모두 불러서 평상시 모습이 어떤지, 관심사와 비전이 무엇인지 지켜본 거죠. 저는 그날 발표에서 IBS와 카이스트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제가 어떤 마음으로 그곳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지 얘기했어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분야와의 융합을 즐긴다고요. 나중에 들어보니 도전, 융합, 성장 같은 것들이 모두 단장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라고 하더라고요.

생성AI 시대에 더욱 중요한 데이터 과학
차 교수는 6월부터 막스플랑크 보안 및 정보보호 연구소의 ‘인류를 위한 데이터 과학’ 연구그룹을 이끄는 단장직을 수행한다. 그가 운용할 수 있는 연구비는 연간 20억 원. 컴퓨팅 서버에 접속하면 세계 어디서든 노트북으로도 연구할 수 있는 데이터 사이언스 분야에서 돈 걱정 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다.
Q.독일에 가면 어떤 연구를 하실 계획인가요
사회안전망을 위협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요. 가짜뉴스를 퍼뜨리거나, 탈세를 저지르거나, 댓글을 조작하는 등의 이상 현상들을 딥러닝과 AI 기술로 잡아내는 거죠. 일반 뉴스가 퍼지는 패턴과 가짜뉴스가 퍼지는 패턴의 차이를 학습한 AI를 만들면, 새로운 뉴스가 퍼질 때 데이터의 미묘한 패턴 차이를 통해 이것이 가짜뉴스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 빅데이터를 AI로 분석해 기후변화나 식량부족과 같은 범지구적인 문제를 분석하는 데에도 관심이 많아요.
Q.한국과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큰 선거가 치러지면서 가짜뉴스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 같아요
맞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투표 불참을 독려하는 가짜 음성이 퍼지거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에 항복을 선언하는 가짜 영상이 퍼지는 것처럼요. 요즘은 ‘인지전(Cognitive Warfare)’이라고 사람 마음을 공격하는 심리전쟁을 해요. 가짜뉴스와 같은 가짜 데이터를 사용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조정하죠. 뉴스의 댓글도 AI가 얼마든지 바꿔버릴 수 있어요. 국내 정치의 뉴스글에도 이미 중국발, 북한발 댓글이 달리고 있는 실정이에요. 분노 또는 불안을 느끼는 대중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AI가 학습해서 댓글의 메시지 분위기를 조작할 수도 있어요.
Q. 생성AI 시대에 데이터 과학이 더 중요해지겠군요
미래 세대는 사람보다 AI와 대화하는 일이 훨씬 많을 거예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AI 언어모델과 접하겠죠. 이렇게 장기간 노출되면 AI가 우리의 사상,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요. AI에 단 1%라도 편향이 없도록 측정하는 것이 저희 같은 데이터 과학자의 역할이죠. 생성AI 데이터는 물론이고, SNS, 인공위성 데이터 등 다양한 빅데이터를 종합해 사회 전체를 모니터링하는, 확장된 의미의 보안 연구를 하려고 합니다.
‘What if’ 긍정적 상상이 성과로 이어져
차 교수가 막스플랑크연구소 단장에 선임됐을 당시, 그의 성장 배경은 큰 주목을 받았다. 강원과학고를 수료하고 KAIST에서 학부, 석사, 박사를 마친 순수 국내파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학원 시절 4년 중 2년은 해외 연구소에서 보냈다. 남들이 어려울 것 같다는 주제도 ‘재밌겠다’며 덤벼드는 그에게 해외 인턴십 제안이 쏟아졌다.
Q. 막스플랑크연구소에 가시며 ‘토종과학자’라는 수식어가 더욱 강조되는 것 같아요. 학창시절 생활을 안 여쭤볼 수가 없네요
이공계 공부를 좋아하고 잘했지만 그림이나 클래식 음악 같은 예술쪽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플루트를 배우고 있고요. 되돌아보면 당시의 과학고와 KAIST는 지금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어요. 여성이 지금보다 훨씬 적어서 롤모델에 대한 갈망이 컸죠. KAIST 공대 최초의 여성 정교수였던 문수복 교수님의 1호 박사로 지원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Q. KAIST 여성 동문들과 기부를 하셨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제가 MBTI상으로 파워 ‘제이(J)’거든요. 인생을 살면서 이루고 싶은 계획이 굉장히 많은데 기부도 그 중 하나였어요. 언젠간 기부금에 숫자 ‘0’ 하나를 더 붙이는 걸 목표 삼고 있었는데 우연히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어요. KAIST에 전 재산을 기부한 분도 계시는데 저는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Q. 이공계 진학을 희망하는 여학생, 젊은 여성 연구자들에겐 단장님이 롤모델이세요.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미래의 커리어를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물론 저도 테뉴어(정년 영구 보장)를 받기 전엔 걱정이 많았죠. 파워 제이(J)라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걱정할 시간에 차라리 기대를 더 해보자고 다짐해요. ‘만약에 가능하다면(What if)’이란 질문을 던지면서요. 그렇게 미래를 긍정적으로 상상하고 기대하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몇 가지는 현실이 되더라고요. 연구에서도 인생에서도요.
차미영 교수(아랫줄 왼쪽 세 번째)와 IBS 데이터 사이언스 그룹 연구원들. 일부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에 동행해 연구를 이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