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등고래 한 마리가 배 주변을 돕니다. 그러더니 인간이 내는 고래 소리에 ‘꾸엉’ 응답합니다. 배 위 과학자들의 목적은 혹등고래와 대화를 하는 겁니다. 외계 지적 생명체와 대화하기 위한 전 단계로, 먼저 혹등고래와 이야기를 나눠보겠다는 거죠. 과연 혹등고래와 진짜 ‘대화’를 나눴을까요?
‘인간, 당신을 지구 대표로 우주 파티에 초대한다.’ 어느 날 당신에게 이런 초대장이 왔다고 상상해 봅시다. 우주에 있는 모든 지적 생명체가 한자리에 모이는 파티라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하긴 이릅니다. 당신, 외계인과 어떻게 대화할 건가요?
지구가 아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온 지적 생명체와 만날 ‘그날’을 떠올리며 동물과의 대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연구 분야는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라고 불리죠. SETI 연구자들은 외계 생명체와의 대화를 위해, 먼저 지구에 사는 생명체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지구 동물과 대화할 수 있다면, 외계의 지적 생명체와도 비슷한 방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23년 11월 29일, 천문학자인 로렌스 도일 미국 SETI 연구소 연구원과 브렌다 맥코완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수의학과 교수 등이 이끈 공동연구팀은 세계 최초로 혹등고래와 20분 동안 대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피어제이’에 발표했습니다. doi: 10.7717/peerj.16349 혹등고래는 몸길이가 12~16m, 몸무게는 30t(톤)에 달하는 대형고래입니다. 지능이 뛰어나고 복잡한 노래를 부르는 등 언어가 있다고 알려져, 이전부터 생물학자들에게 큰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이번 연구는 혹등고래를 외계 지적 생명체로 가정해서 ‘대화’가 가능할지 시도한 결과입니다. 맥코완 교수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연구가) 혹등고래 언어로 인간과 혹등고래가 의사소통한 최초의 사례”라고 밝혔습니다.
혹등고래 트웨인,
인류와 대화한 첫 번째 고래될까
연구팀이 대화에 성공했다고 밝힌 혹등고래의 이름은 ‘트웨인’, 최소 38살로 추정되는 암컷 고래입니다. 연구팀은 본격적인 플레이백 실험(동물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반응을 관찰하는 실험)에 앞서, 2021년 8월 18일 미국 알래스카의 프레드릭 사운드 인근 섬 근처에서 9마리 혹등고래 무리의 ‘훕(whup) 울음소리’를 녹음했습니다. 훕 울음소리는 일반적으로 어미와 새끼가 서로를 찾거나, 먹이를 먹을 때 내는 소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 날인 8월 19일, 연구팀은 전날 위치에서 약 3해리(1해리는 1852m) 떨어진 곳에서 트웨인을 만났고, 트웨인에게 20분 동안 플레이백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서서히 다가오는 트웨인에게 연구팀은 38번의 훕 울음소리를 들려줬습니다. 연구팀은 트웨인 역시 이에 반응해 훕 울음소리로 36번 응답했다고 밝혔죠. 트웨인은 수면과 가까이 있으면서 일곱 번 수면 위로 올라와 포말을 뿜으며 반응하기도 했습니다. 연구팀은 특히 트웨인과 함께 나눈 ‘대화’의 상호작용 구성에 집중해, 상호작용에서 상대와 만나고, 반응하고, 그리고 헤어지는 패턴이 나타났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런 반응을 종합했을 때 연구팀은 이번 실험을 최초의 대화로 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일각에선 최초의 대화로 인정하기엔 이르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연구팀이 트웨인과 20분 동안 주고받은 울음소리가 무슨 내용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수진 해양동물생태보전연구소 대표는 1월 7일 과학동아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훕 울음소리는 혹등고래를 집중시키기에 좋은 소리”라며, “트웨인이 연구팀이 들려준 소리를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인간보다는 플레이백 소리 자체와 대화를 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잠시 우주 파티로 돌아와 봅시다. 파티에서 만난 한 외계 지적 생명체가 당신에게 드라마의 대사를 무작위로 재생합니다. “호박고구마, 호박고구마!” 당신은 대답하겠죠. “저..도 호..호박고구마 좋아해요(?)”
즉, 그저 단순히 반응을 끌어내는 것과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대화는 서로 다르다는 거죠. 장 대표는 “만약 소리 속에 상호 교환되는 정보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이를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렇다면 고래 연구자가 보는 이번 연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장 대표는 “연구에서 고래와의 플레이백 상황을 굉장히 상세하게 기록했고, 대화의 가능성을 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프의 법칙,
언어는 인간만의 것일까?
혹등고래 트웨인과 주고받은 훕 울음소리가 ‘대화’이기 위해선 혹등고래의 울음소리가 ‘언어’여야 합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대화를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이라고 정의합니다. ‘둘 이상의 실체 사이에서 하는 상호적인 언어 소통’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죠. 혹등고래의 울음소리는 정말로 ‘혹등언어’일까요?
일부 동물들을 대상으로 이들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와 구조적으로 얼마나 유사한지, ‘지프의 법칙’을 적용해 연구한 사례가 있습니다. 지프의 법칙이란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문헌학자인 조지 킹슬리 지프가 20세기에 제안한 언어의 법칙입니다. 자연어(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에서 특정 단어가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 빈도의 분포를 나타내죠. 지프의 법칙에 따르면 한 언어에서 가장 일반적인 단어는 두 번째로 흔한 단어 빈도의 두 배, 세 번째로 흔한 단어 빈도의 세 배에 이릅니다. 예를 들어 영어의 경우 정관사 the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그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인 of는 the의 절반, 세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and는 the의 3분의 1만큼만 등장하죠. 지프의 법칙은 의사소통 시스템의 패턴과 구조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언어학 분야에서 중요하게 쓰입니다.
만약 동물들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와 유사하다면, 인간 언어에서 나타나는 지프의 법칙이 동물 언어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이번 혹등고래와의 대화를 연구했던 도일 연구원과 맥코완 교수는 2009년 12월 23일 여러 동물의 발성에 지프의 법칙을 적용한 연구를 국제학술지 ‘액타 아스트로노티카’에 발표했습니다. doi: 10.1016/j.actaastro.2009.11.018
연구팀은 혹등고래뿐만 아니라 큰돌고래와 다람쥐원숭이가 내는 음성 신호까지 지프의 법칙으로 분석했습니다. 이들이 내는 음성에서 자주 나타나는 신호를 찾고, 이를 분류해서 지프의 법칙을 따르는지 살펴본 거죠. 이 동물들은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고, 주된 의사소통 수단으로 ‘소리’를 사용하는 동물들입니다.
논문에 따르면, 자주 등장하는 특정 음성 신호의 발생 빈도를 함수화한 결과는 반비례 함수였습니다. 해당 반비례 함수에 로그를 취하자, 직선 그래프를 얻을 수 있었죠. 이 그래프의 기울기를 ‘지프 기울기’라고 부릅니다. 지프 기울기를 비교하면 해당 음성 소통 체계가 얼마나 인간의 언어와 닮았는지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프 기울기 값은 ‘-1’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혹등고래, 큰돌고래, 다람쥐원숭이의 지프 기울기 값도 -1에 가까웠다는 점입니다. 특히, 큰돌고래와 다람쥐원숭이는 성체가 될수록 지프 기울기 값이 -1에 가까워졌습니다.
인간은 막 태어났을 때는 옹알이를 하고, 성장하면서 언어를 배웁니다. 지프의 법칙에 따른 그래프를 보면 유아기에는 지프 기울기 값이 -0.82이고, 성인이 되면서 -1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죠. 연구팀에 따르면 큰돌고래 역시 유아기를 거쳐 성체가 될수록 -1에 가까운 기울기(-0.95)를 갖습니다.
도일 연구원은 미국의 환경분야 공영 라디오 프로그램인 ‘리빙 온 어스’에서 “큰돌고래 역시 옹알이를 하며, 출생 이후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언어를 배운다”고 설명했습니다. 언어정보학의 측면에서, 돌고래가 언어를 사용한다고 본 겁니다.
AI를 활용한 소리 분석
동물과의 진짜 대화를 꿈꾸며
동물 소리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다면, 언젠가 ‘고래 번역기’라던가 ‘반려동물 번역기’ 같은 것들이 나올지 모릅니다. 이런 꿈을 갖고 동물 소리의 의미를 꾸준히 분석해 온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지구에서 뇌가 가장 큰 향고래(향유고래)와의 대화를 꿈꾸는 미국의 CETI(Cetacean Translation Initiative)입니다.
향고래는 모스 부호와 비슷한 ‘코다’라는 음성 신호를 사용합니다. 또한, 향고래는 고래 생물학자 셰인 게로의 연구를 통해 개체수 등 정보가 잘 알려져 있어, 좋은 연구 대상입니다.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 톰 머스틸이 쓴 책 ‘고래와 대화하는 법’에 따르면, 해양로봇 전문가, 고래 생물학자, 인공지능(AI) 전문가, 언어학자 등이 모인 CETI는 2026년까지 향고래와의 ‘양방향 소통’에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CETI 연구팀은 카리브해 도미니카섬에서 약 15마리의 향고래 무리 소리를 24시간 녹음했습니다. CETI 연구팀은 해당 데이터를 기후-통제 데이터센터에 보관하고 오픈소스로 공개할 예정입니다. 또한, AI를 활용해 코다의 구조를 분석하고 향고래 챗봇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AI 알고리즘으로 고래 외의 또 다른 동물들의 소리를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미국의 ‘지구종프로젝트(Earth Species Project)’는 컴퓨터과학자이자 엔지니어인 트위터(현 X) 창립 멤버 브릿 셀비텔과 파이어폭스 설계자 중 한 명인 아자 라스킨이 AI를 활용해 동물의 소통을 이해하겠다는 목적으로 설립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언어를 분석하는 데 사용된 AI 알고리즘인 ‘word2vec(워드 투 벡터)’와 ‘비지도신경망’ 등을 사용합니다. 워드 투 벡터는 연관성이 높은 단어끼리 배치해 언어 내 단어 간 패턴을 찾는 알고리즘이고, 비지도신경망은 전혀 모르는 두 개 언어가 주어졌을 때, 두 언어를 충분히 분석하기만 하면 두 언어를 번역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는 알고리즘입니다. 이를 통해 지구종프로젝트는 현재 까마귀, 벨루가, 얼룩말핀치새 등의 울음소리를 분석 중입니다.
인간이 아닌 종과 대화하기 위해 앞으로 남은 과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의미가 담긴 소리를 선별해야 합니다. 여러 소리가 섞여 있는 방대한 양의 소리 녹음 중 무엇이 신호이고 무엇이 잡음일까 해석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소리 데이터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쇠돌고래는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많이 사용합니다. 40Hz 수준의 저주파부터 200kHz(킬로헤르츠・1kHz는 1000Hz)에 달하는 고주파까지 넓은 범위의 주파수를 사용하죠.
장 대표는 “지금까지 모은 쇠돌고래류 소리들은 장비와 유지관리의 한계 때문에 모든 음역대가 손실없이 수집된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며 “온전한 데이터와 함께, 소리를 낼 때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정보들이 기록 돼야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장 대표는 “현재 AI의 발전 속도를 봤을 때 동물과의 대화 연구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피력했습니다. 물론 동물의 비언어적 의미에 대한 이해 없이 소리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일단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첫 발자국을 딛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바탕으로 동물을 이해하려 해왔죠. AI가 인간 인식의 한계나 편견을 좀 더 줄여줘, 동물 언어의 더 많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2401/pic__2024-01-31_at_11.26_.39_PM_.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