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과동키즈] 내 소설의 날개를 펼치기에 SF는 최적의 공간이었죠

2013~2014년

대구 청구고

 

2015~2022년

연세대 행정학과

 

2022년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 수상

2023년 세계 최대 규모 환상문학 단체 IAFA에 ‘한국의 떠오르는 작가’로 초청

2023년 제10회 SF 어워드 본심 진출

2023년 제81회 세계SF대회(월드콘) 초청

 

“작가님, 소설은 어쩌다 쓰시게 됐어요?” 과거 북토크 당시, 독자의 이 질문 한 방에 2시간의 질문 공방전에서 패배했다. 남들에겐 권투 선수의 잽처럼 아주 평범한 질문으로 보이겠지만, 나에겐 엄청난 어퍼컷이었다.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러게요. 모르겠네요.” 굳어있던 분위기는 녹아내렸다. 내 대답에 사람들은 웃었다. 그로기 상태의 복서처럼 눈을 부릅뜨고 ‘제가 원하는 글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아서요.’라는 미국의 작가 토니 모리슨의 말을 토대로 설명을 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SF인가요? 문과생인 걸로 아는데.” 녹다운.

 

이 자리를 빌어 그때 내가 답하지 못했던 이유를 말해보겠다. 아마 그 독자는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거장들처럼 그럴듯한 대답을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딱히 거창한 이유가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과거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됐다.

 

우주 너머를 꿈꾸게 해준 과학동아

 

얼마나 과거로 가야 할까? 증조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장돌뱅이(혹은 창고에서 찾은 거대 삼지창으로 볼 때 독립운동가였을지도 모를) 생활을 청산하고 함경도에서 대구로 와 자식들을 얻고는 돌아가셨고, 없는 살림에 전쟁까지 나서 학도병이 된 큰할아버지가 낙동강 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자.

 

아버지는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다.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머리는 좋은 편이었다. 중학교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들의 꿈보다 몇 개월 뒤 먹을 호박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상업고에 진학한 아버지는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가족들을 위해서였다. 그의 희생으로 밥은 굶지 않는 집이 됐고, 어머니를 만나 형과 내가 태어났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대신 무식할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다. 아버지는 당신께서 못 다한 공부를 내가 하길 바라신 듯 거실을 책들로 채웠다. 어머니는 경주 도서관의 책을 거의 전부 대출하셔서, 우리 형제를 거실에 앉히시고 책을 읽어주셨다. 집엔 항상 책이 있었고, 틈만 나면 집어 읽었다.

 

그렇게 읽은 책 중에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 같은 해외 SF들과 한국의 과학동아가 있었다. 과학 전문 잡지로 과학동아는 독보적이다. 과학동아에서 달 착륙, 보이저호 탐사 같은 갖가지 우주 관련 소식들을 접했다. 과학동아를 본 날이면, 밤마다 우주 너머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상상했다. 과학을 알아갈 때마다 세상의 비밀들을 엿보는 듯했다. 그래서 중학교 때까지 장래 희망이 과학자였다. 자율형 사립고에 좋은 성적으로 진학해, 교내 프로그램으로 경북대에서 평소 관심 있던 심리학 강의도 들었다. 꿈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듯 했다.

답이 없는 삶에서 찾은 위안, 소설

 

고난이 닥쳤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고등학교를 다니기 힘들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자퇴를 선언했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일반고로 전학을 갔다. 그래도 집안 사정이 나아지진 않았다.

 

그때 담임 선생님이 전교 1등은 분기마다 내는 육성회비 면제는 물론, 장학금도 준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후로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했다. 졸업까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3학년 마지막 학기엔 전 과목 1등을 했다. 대학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 4년 연속 장학금에, 행정고시 1차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마음 한켠이 공허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누군가로부터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란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한동안 ‘진정한 나’를 찾아 방황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내게 이른 지독한 역사에 화도 났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 그럴수록 세상을 알고 싶어졌다. 닥치는 대로 종교, 과학 등의 책을 읽고, 교수님들도 찾아다녔다. 그렇게 얻은 답은 역설적이게도 “누구도 삶에 관한 명확한 답을 알지 못한다.”란 것이었다.

 

시간은 흘러 입대했고 전역도 다가왔다. 부대 내에 도서관이 있었는데 말년에 여기 숨어서 업무 전화들을 피하다, 심심한 나머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무렵은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을 시작한 상태였다. 인생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기분이 쌓인 와중에, 박경리 작가의 ‘토지’,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등 대하소설들을 읽으며 소설에 재미를 붙였다.

 

한국 SF 소설들도 그때 처음 접했다. 김보영 작가의 ‘7인의 집행관’을 선두로, 배명훈, 장강명, 김초엽 작가 등의 SF 소설을 읽었다. 한국이 배경이거나, 한국적 요소들이 섞인 이야기에 금방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문열 작가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서, 어쩌면 이야기에서 내 답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바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매일 글을 썼다. 남들보다 출근을 일찍 하거나 퇴근을 늦게 하며 짬짬이 글을 썼다. 그렇게 원고가 하나둘 모였다. 쓰면 쓸수록 완성돼가는 각각의 세계들이 매력적이었다. 내가 쓴 글에 내가 위안을 받기도 했다. 응어리진 것을 토해내는 느낌이었다.

 

포기와 미련의 갈림길에서 얻은 깨달음

 

원고들을 공모전에 제출했지만 아쉽게도(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지만) 다 떨어졌다. 전역을 앞둔 시점에 원고를 그냥 두기엔 아까워서 여러 출판사에 투고했고, 한 출판사와 연락이 닿아 책을 냈다. 첫 책인 ‘주인 없는 방’은 베스트셀러에도 한 번 오르며 여러 면에서 성과를 보이는 듯했다. 진정 내 직업을 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첫 책의 성과는 짧았고, 다음 책의 출간 과정에서도 끔찍한 일들이 있었다. 내 글이 세상에 필요한지 오랫동안 고민이 이어졌다.

 

2018~2021년에 이런 고민 속에서 글을 쓰고 또 쓰며 기회를 엿봤다. 글에 관해 여러 선생님도 찾아가보고, 소설을 위해 직접 종교 단체에 잠입 취재까지 했다. 그러나 그렇게 쓴 원고는 공모전 본심 혹은 최종심에서 아깝게 떨어졌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소설집 ‘낀’을 출간했으나, 앞선 책들처럼 묻히고 말았다.

 

컵라면 하나를 이틀에 나눠 먹으며 쓴 작품마저 실패한 상황이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억울함 반 절박함 반으로 수십 권의 책을 등에 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일일이 서점에 방문해 책을 건네며 한번만 읽어 달라 권했다. 그렇게 제주도부터 서울까지 돌아다녔지만 반응은 미미했다.

 

포기하려 했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미련은 남았다. 정말 마지막으로  ‘절대 공모전에 당선될 수 없을 듯한’ 소설을 썼다. 그간 읽은 과학, 철학, 사회, 역사 등 책에서 얻은 지식을 모조리 활용했다. 다양한 과학적, 철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SF는 내 소설의 날개를 펼칠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을 써서 응모하고 취업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업종 특성상 조기 출근과 야근이 이어졌지만 글쓰기는 멈추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사표를 던지고 싶던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의 대상 소식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포효하며 모든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상 이후 시작된 작가로서의 삶이 탄탄대로는 아니다. 매일 같이 글을 쓰고, 퇴고를 한다. 대부분은 세상에 나오지 못할 작품이다. 이 길엔 먹고 사는 문제나 인간 관계처럼 매우 당연한 어려움이 섞여있다. 이 지난한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달음은 얻었다.

 

“절대 포기하지 말자. 버티는 자가 결실을 맛본다.”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인 동시에, 글을 처음 쓴 6년 전과 지금의 내게 하고픈 말이다. 부디 모두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23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김준녕 소설가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