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에 있는 오크리지국립연구소(ORNL)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황량하다. 주변은 온통 산과 호수뿐이고 대중교통은 당연히 없다. 심지어 연구소로 통하는 고속도로엔 ‘Secret city(비밀 도시)’라는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런 황당한 상황은 연구소 설립 배경을 보면 자연스레 이해가 된다. ORNL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플루토늄 생산과 분리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1943년에 설립됐다. 현재는 미국 에너지부 소속으로 재료, 중성자, 고성능 컴퓨팅, 핵 등 네 가지 국가보안 관련 과학기술 연구를 하고 있다.

특히 ORNL에는 미국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 ‘타이탄(Titan)’이 있다. 캠퍼스 동편에 지어진 특수 건물동 1층에 120평 규모로 건설돼 있는데, 캐비닛 200개가 늘어선 모습을 실제로 보면 장관이다.
국제 슈퍼컴퓨팅 학술대회는 해마다 두 번 씩 ‘상위500(top500)’ 슈퍼컴퓨터 순위를 발표한다. 타이탄은 2013년 중국 국방기술대학의 ‘텐허’에 아쉽게도 1등을 내줬다. 하지만 여전히 27페타플롭(petaflops)의 계산능력, 즉 초당 2경7000조 번의 수학 연산처리가 가능하다. ORNL 연구진은 타이탄의 계산 능력을 높이기 위해 그래픽처리 가속기(GPU)와 기존의 CPU를 혼합해서 컴퓨터노드를 구성했다. 간단한 계산은 GPU의 병렬 구조로 처리하고, 복잡한 알고리듬은 CPU로 수행하는 식이다.
타이탄은 ORNL 소속의 연구원이 아니더라도 제안서를 내 통과하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지구과학 분야의 환경 모델링이나, 가스 터빈 내부의 유체 시뮬레이션 등 슈퍼컴퓨터를 활용하는 연구가 늘면서 벌써 2016년 가동 스케줄이 꽉 차 있는 상태다.
오크리지 리더십 컴퓨팅 시설(OLCF)은 5년마다 새로운 슈퍼컴퓨터를 세상에 내놓는다. 현재도 IBM, 인텔 등과 함께 타이탄의 후속 슈퍼컴퓨터인 ‘서밋(Summit)’을 개발하고 있다. 서밋의 목표는 150∼300페타플롭이다. 2018년 최종 개발을 목표로 소프트웨어를 담당하는 ORNL 연구원과 하드웨어를 담당하는 기업 연구원들이 매달 직접 만나 긴밀하게 협업하고 있다.
가족 복지제도가 인상적
ORNL의 연구원은 총 4400여 명인데, 직군은 연구개발자(R&D), 엔지니어, 매니저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이들은 직군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고 생활방식도 차이가 크다(그럼에도 직군 별로 연봉의 차이는 크지 않다. 한국과 달라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 예로 엔지니어들은 출퇴근 시간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지만, 연구개발자는 일의 특성상 시간 활용이 자유롭다. 일주일에 40시간, 분기별로 520시간의 업무를 하는 최소한의 기준만 정해져 있다.
연구원 안에는 카페테리아가 있다. 샌드위치를 주문하면 직접 만들어주기도 하고, 중국요리나 칠면조요리와 같은 특식(?)을 팔 때도 있다. 물론 도심에는 더 다양한 레스토랑이 있지만 차를 타고 30분을 나가야 한다. 그래서일까. 대다수의 ORNL 연구원들은 각자 도시락을 싸와 먹는다. 이때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개인이 자신의 점심시간을 마음대로 정해 식사를 한다는 것. 시간을 자율적으로 사용해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밖에도 아이가 아프거나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 병가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복지 제도가 탄탄하게 마련돼 있다. 이 역시 연구 효율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