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지난해 9월 세계 최초로 4기가비트 데이터저장(NAND)형 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성공했다. 이 메모리 16개를 탑재하면 엄지손가락만한 8기가바이트(바이트=8비트) 메모리카드를 만들 수 있다. MP3 음악파일 2천곡 또는 영화 8시간 분량이 여기에 들어간다. 플래시 메모리카드는 디지털 카메라, USB메모리, 캠코더, 녹음기, MP3플레이어, 휴대폰에 들어가 수요가 매년 거의 50%씩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가 개발한 2기가, 4기가비트 플래시 메모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nm급 선폭 기술을 사용해 만든 기념비적인 반도체다. 4기가 플래시 메모리는 머리카락 1천4백분의 1 굵기인 70nm(nm=10억분의 1m) 선폭기술로 제조됐다. 마이크론 등 대부분의 반도체 회사는 아직도 ‘마의 장벽’인 0.1μm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
0.1μm 즉 1백nm 이하의 회로나 부품으로 제품을 만드는 첨단기술을 흔히 ‘나노테크놀로지’ 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노테크놀로지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요즘 삼성전자 임직원들은 세계 각국으로 출장을 자주 다닌다. 하지만 노트북컴퓨터 없이 USB메모리만 들고 출장길에 오를 때가 많다. 플래시 메모리로 만든 USB메모리에는 컴퓨터 운영체제인 윈도우즈를 비롯해 평소 사용하는 프로그램과 파일이 통째로 들어가 있다. 해외 어딜 가서나 컴퓨터에 메모리를 끼우기만 하면 자신의 컴퓨터가 되는 것이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는 무겁고 큰데다 충격에 약하고 부팅하는데 오래 걸리지만, 플래시 메모리는 작고 충격에도 강하다. 게다가 플래시 메모리는 전기를 끊어도 기억이 유지되는 ‘비휘발성 메모리’ 이다. 따라서 컴퓨터를 켠 뒤 부팅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속도도 하드디스크보다 빠르다.
플래시 메모리의 값이 싸지면서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몇시간씩 녹화를 할 수 있는 캠코더 내장 휴대폰이 그것이다. 모바일 제품의 등장과 디지털 컨버전스 경향에 따라 플래시 메모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지난해 전세계 플래시 메모리 시장 규모는 1백10억 달러로, D램(1백70억 달러)에 거의 근접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 볼 때 2006년에는 플래시 메모리가 2백70억 달러에 이르면서 시장 규모가 D램을 추월할 것으로 전문기관은 바라보고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플래시 메모리의 기술 발전 속도가 D램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만드는 D램의 기억용량은 2년에 2배씩 늘어나고 있지만, 플래시 메모리는 1년에 2배씩 늘어난다. 플래시 메모리는 트랜지스터의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삼성전자는 1999년 256메가비트 플래시 메모리 개발 이후 2000년 5백12메가, 2001년 1기가, 2002년 2기가, 2003년 4기가를 개발했다. 또 올 하반기에는 8기가 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5년 연속해서 집적도를 2배씩 늘리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의 신화’ 를 창조한 삼성전자가 전자공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무어의 법칙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인텔의 설립자인 고든 무어는 1965년 “반도체의 트랜지스터 개수 즉 기억용량이 18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고 예언했다. 이것이 ‘무어의 법칙’ 이다. 무어의 법칙은 예언대로 들어맞았다. 예를 들어 1978년에 나온 인텔의 8086 프로세서는 2만9천개의 트랜지스터를 갖고 있으나 2000년에 등장한 펜티엄4 프로세서는 4천2백만개의 트랜지스터를 갖고 있다. 거의 2천배나 늘어났다.
반면 ‘황의 법칙’ 은 메모리의 집적도가 1년에 2배씩 증가한다고 주장한다. 이 법칙은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사장인 황창규(51) 박사의 이름을 따서 미국 반도체 전문가들이 붙였다.
황창규 박사.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황 박사는 연구원 시절인 1994년 256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입사 11년만인 2001년 삼성전자의 메모리 부문 사장이 됐다. 황 사장은 급속한 디지털 컨버전스(융합,복합)에 따라 카메라, 캠코더, 휴대폰, MP3플레이어, 디지털TV 등 저장매체를 요구하는 모바일 기기 등의 수요가 확산되면서 플래시 메모리를 중심으로 메모리 신성장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그가 2002년 미국에서 발표한 ‘메모리 신성장론’ 이다. 당시 황사장은 1년에 2배의 속도로 플래시 메모리의 용량이 늘어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미 메모리 개발 전략을 PC용 D램에서 플래시 메모리로 급선회한 삼성전자는 5년 연속 플래시 메모리의 기억용량을 2배로 늘렸고 지난해에는 낸드 플래시 메모리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섰다. ‘황의 법칙’ 이 맞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최근에는 디지털 컨버전스가 진행되면서 소니 파나소닉 마쓰시타 휴렛팩커드 노키아 등 세계적인 IT기업들이 속속 삼성전자의 ‘반도체 우산’ 속으로 집결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 것은 30년 전. 이미 D램 매출이 세계 1위로 올라선지 12년이 됐고, 삼성전자의 자산가치는 1백조원에 달해 ‘넘지 못할 산’ 이라던 소니와 노키아의 시가 총액을 넘어섰다. 메모리 부문에서 세계 1위의 자리를 확고히 굳힌 삼성전자는 우수인력을 퓨전메모리, P램, F램 같은 차세대 메모리와 시스템LSI 같은 비메모리 분야에 집중시키고 인텔에 도전하고 있다.
아직 비메모리 분야에서 프로세서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인텔의 아성을 무너트리지 못했지만, 삼성전자는 CDMA 휴대폰, TFT-LCD 같은 분야에서 세계 1위의 경쟁력을 갖고 있어 실속은 인텔보다 낫다. 올해 1/4분기 세계적 기업들의 영업이익을 보면 삼성전자는 4조원(27억불)에 달한 데 반해 인텔은 17억 달러에 그쳤다. 게다가 올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삼성전자의 시설 투자 규모가 43억 달러에 이르러 인텔(38억 달러)을 앞설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세계를 제패하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파워는 어디에서 올까. 삼성전자 황창규 사장은 “삼성의 힘은 우수 인재 확보,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경영, 기술표준화의 주도권 확보에서 온다”고 말한다. 5만5천여명의 삼성전자 임직원 가운데 현재 2천명이 박사급이며, 박사 중 상당수는 CEO를 비롯한 임원들이 삼고초려 끝에 해외에서 모셔온 인물이다. 삼성은 “천재 한사람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건희 회장의 방침 아래 핵심인력을 확보하거나 육성하는 데 아낌없이 투자한다. 황창규 사장도 해외 출장 중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우수 두뇌를 만나 스카웃하는 일이다.
엄청난 시설투자가 필요한 반도체 산업에서는 미래 예측이 기업의 사활과 직결된다. 일본이 반도체 투자를 줄일 때 삼성전자는 선택과 집중이란 전략 아래 다른 분야의 투자를 극도로 줄이면서도 반도체 부문에 과감히 투자, 세계시장을 차지했다. 그러면서도 삼성전자는 늘 위험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준비 경영’ 을 한다.
전자산업에서는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표준화를 선도하는 기업이 매우 유리하다. 삼성전자가 개발한 DDR램 기술은 반도체국제표준협회(JEDEC)에서 국제 표준으로 채택됐으며, 삼성전자의 연구원이 협회 분과 의장 등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반도체에 집적된 트랜지스터의 크기는 얼마나 더 작아질 수 있을까? 삼성전자는 플래시 메모리의 경우 선폭이 2010년에는 55nm까지 작아질 수 있고 이때가 되면 지금보다 20배의 기억밀도를 지닌 메모리가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어떨까? 인텔의 파올로 가르기니 기술전략연구소장은 “트랜지스터의 크기가 2018년이면 선폭이 16nm까지 줄어들어 한계에 부딪칠 것”이라고 본다.
트랜지스터는 아주 작은 스위치다. 트랜지스터 하나에는 전자가 나오는 소스 전자가 흘러들어가는 드레인이 있고, 두개의 사이에서 전자의 흐름을 조절해주는 게이트가 있다. 전자가 소스에서 드레인으로 흐르면 컴퓨터는 이것을 1로, 전자가 흐르지 않으면 0으로 인식한다. 이런 스위치 동작이 반도체에 집적된 수억개의 트랜지스터에서 반복되면서 컴퓨터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게이트의 길이가 5nm 크기 이하로 작아지면 터널링 현상이 일어난다. 게이트에 전압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소스와 드레인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전자가 스스로 건너 뛰어버리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탄소나노튜브나 실리콘 나노와이어가 등장하고 있다. 탄소나노튜브는 지름이 원자 크기인 1-2nm에 불과해 터널링 현상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반도체 교과서를 바꾼 삼성의 신화는 과연 계속될 수 있을지 관심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