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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한 정육면체 조각들을 돌려가며 색을 맞추는 퍼즐, 바로 ‘큐브’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선 등장인물이 수학이나 과학 천재임을 드러내는 클리셰로 익숙하죠.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큐브를 맞추는 천재 해커, 어디서 본 적 있죠? 하지만 큐브를 좋아하는 사람 ‘큐버’들의 세계로 한 발짝 들어가 보면 ‘큐브=천재’란 공식 외에도 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2년에 한 번 개최되는 세계 큐버들의 월드컵, 세계 큐브 협회 월드 챔피언십 2023(Rubik’s WCA World Championship 2023)에 다녀온 이건희 과학동아 독자가 그 모양만큼이나 다채로운 큐브의 세계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피곤한 아침,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평소처럼 알람 시간을 5분 미룬 뒤 다시 자려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필자를 비롯한 전 세계의 큐버(큐브 애호가)들이 목 빠지게 기다려 온 2023년 8월 12일이다. 그렇다. 오늘은 세계 큐브 협회 월드 챔피언십 2023(Rubik’s WCA World Championship 2023이하 세계 큐브 챔피언십)이 드디어 열리는 날이다!
세계 큐브 챔피언십은 세계 큐브 협회(WCA)가 주최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큐브 대회다. 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데, 2021년 네덜란드 알메르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지난 대회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취소되고 말았다. 전 세계 큐버들은 대한민국 인천에서 개최된 이번 대회를 4년간 기다린 셈이다.
한국에 찾아온 세계 큐버들, 그 속에 서다
아침 8시, 대회장인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 도착했다. 필자는 세계 큐브 챔피언십이 개최되는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선수이자 스태프로 참가했다. 그 덕에 일반 참가자보다 먼저 대회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세계 큐브 챔피언십에 참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 했다. 더군다나 그게 아시아 두 번째로 한국에서 개최된 대회라니. 앞으로 펼쳐질 4일이 무척 기대됐다.
스태프는 담당 업무에 따라 러너, 스크램블러, 심판, 그리고 데이터 입력팀 등으로 나뉜다. 스태프의 역할은 선수가 대기석에 앉기 전부터 경기가 끝난 이후까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선수와 가장 많이 만나는 스태프는 러너다. 러너의 업무는 선수가 가지고 온 큐브를 수거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러너가 수거한 큐브를 스크램블러에게 전달하면 스크램블러가 정해진 규칙에 따라 큐브를 섞는다. 러너는 이렇게 섞인 큐브를 가리개로 가려서 다시 경기장으로 가지고 온다.
본격적인 경기의 시작도 러너가 알린다. 러너는 기록지에 있는 선수의 이름을 부른 다음 선수, 큐브와 함께 경기장으로 향한다. 경기장부터는 심판의 영역이다. 선수가 준비되면 큐브 가리개를 열어준다. 그리고 선수가 큐브를 맞추는 데 걸리는 시간을 기록지에 수기로 적는다.
수기로 적은 기록지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 바로 데이터 입력실, 필자가 대회 내내 일한 곳이다. 필자의 역할은 기록지에 적혀있는 선수들의 기록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이다. 데이터 입력팀 스태프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대회장을 둘러봤다. 각국에서 온 큐버들의 테이블에는 그 나라의 국기가 펼쳐져 있었다. 세계대회라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이 숫자는 어떻게 읽죠?” “1이요!” “전 7인 것 같은데”
한참 기록지와 싸움하던 중, 필자의 첫 경기 시간이 다가왔다. 첫 번째 종목은 ‘클락’이다. 큐브라고 하면 대부분 각 면이 작은 정사각형 9개로 이뤄진 정육면체를 떠올린다. 이 큐브의 이름은 ‘3×3×3 큐브’. 대표적인 큐브다. 하지만 큐브의 세계에서 다루는 퍼즐에는 9개의 작은 시계로 이뤄진 클락, 피라미드 모양의 피라밍크스, 정십이면체 모양의 메가밍크스 등 다양한 퍼즐이 있다.
클락을 포함한 대부분의 큐브 종목은 기록을 5번 재고 그 중 가장 잘 나온 기록과 가장 못 나온 기록을 뺀 나머지 세 번의 기록으로 평균을 낸다. 이 평균을 가지고 순위 경쟁을 하는 것이 큐브 경기의 큰 틀. 클락 경기의 순위는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다음 경기도 많으니 실망을 거두고 다시 데이터실로 돌아왔다.
기록지에 적혀있는 다채로운(?) 악필을 판별하다 보니 또 필자의 경기 시간이 찾아왔다. 이번에 맞출 큐브는 스퀘어-1이라는 큐브로 정육면체 모양이지만 섞으면 모양이 마구잡이로 변하는 특징이 있다(위 사진). 떨리는 마음으로 대기석에 앉았다. 곧 러너가 필자의 이름을 불렀다. 러너를 따라 무대로 나가는 내내 긴장감이 엄습했다. 책상에 앉자, 큐브 가리개에 가려진 필자의 큐브가 앞에 놓였다.
필자가 준비됐다는 신호를 보내자, 심판이 큐브 가리개를 열었다. 떨리지만 집중해야 한다. 15초 안에 이 큐브를 어떻게 맞출지 파악해야 한다. 15시간 같은 15초가 지나고, 큐브를 맞추기 시작했다. ‘탁!’ 큐브를 다 맞추고 손을 내렸다. 16.433초, 필자의 최고기록이다! 집에서도 나오기 쉽지 않은 개인 최고기록을 공인대회에서 세우다니, 운이 좋았다. 영상을 찍지 않아서 아쉬울 정도였다. 좋은 성과를 거둔 덕일까, 이어진 점심식사가 유독 더 맛있게 느껴졌다.
큐브, 퍼즐을 넘어선 문화가 되다
사흘 내내 테이터 입력실에서 스태프로 일하다 시간이 되면 선수로서 경기에 참가하는 바쁜 시간을 보냈다. 피라밍크스, 2×2×2 큐브, 3×3×3 큐브, 3×3×3 큐브 눈 가리고 맞추기 종목 등 다양한 종목에 참가했다. 틈틈이 대회장을 구경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였다. 다양한 큐브 제작 업체의 홍보 부스가 열려, 볼거리도 다채로웠다.
특히 알록달록한 큐브 조각 대신 LED 조명이 켜지며 회전면이 툭 튀어나와 있는 eX-Mars 로봇 큐브 부스가 눈길을 끌었다. eX-Mars 로봇 큐브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큐브라 더 뜻깊다. 부스 옆에서는 로봇 큐브 여러 개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었다. 정말 신기했다.
큐브 여러 개를 이용해 그린 그림도 눈에 띄었다. 큐브를 도안에 따라 맞춰 여러 개 이어 붙이면 중세 시대 모자이크화 같은 그림이 완성된다. 필자도 과학동아 로고 모양, 기초과학연구원(IBS) 로고 모양 등의 다양한 큐브 그림을 만든 적이 있다. 큐브 전문 판매점 ‘큐브 난나’ 부스에서는 900개 이상의 큐브로 만든 큰 고양이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옆 ‘루빅스 큐브’ 부스에는 더 엄청난 큐브 그림이 준비돼 있었다. 루빅스에서 제공한 도안과 큐브로 대회 참가자들이 한 땀 한 땀 만든 거대한 거북선 그림이다. 참가자들의 정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셋째날 저녁에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큐브 세개를 차례로 맞추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큐브 국가대항전 ‘루빅스 네이션스 컵’이 있었다. 각국 참가자들의 우렁찬 응원이 기억에 남았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전 세계에서 모인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호주의 유명 큐브 선수인 펠릭스 젬덱스를 만나 인터뷰한 경험이 뜻깊다. 젬덱스 선수는 한국계 미국인인 맥스 박 선수와의 선의의 경쟁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피드 큐브의 천재들’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그가 가진 루빅스 큐브 기록은 평균 5.53초, 현재 세계 5위다.
어떻게 해서 큐브 실력을 높일 수 있었냐는 질문에 젬덱스 선수는 “그냥 엄청 많이 연습했다”고 단순한 답을 내놓았다. “큐브가 정말 재미있어요. 열심히 했을 때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온다는 점도, 실력을 조금씩 키워 더 빠르게 맞출 수 있게 되는 것도 좋죠. 이번 세계 큐브 챔피언십을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대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세계를 여행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한국에 와서 정말 신나요!”
전 세계에서 온 1400여 명의 큐버들이 17개 종목에서 경쟁하는 큐버들의 축제, 세계 큐브 챔피언십의 하이라이트는 3×3×3 큐브 결승이다. 맥스 박 선수와 중국의 왕이행 선수가 우승을 두고 겨뤘다. 결과는 준결승에서 1~3위권에도 들지 못했던 맥스 박 선수의 승리. 0.01초 차이로 왕이행 선수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시상식을 끝으로 나흘 간의 대회는 마무리됐다. 필자에게 잊을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다. 큐브 실력을 겨루기 위해 참가한 대회지만, 성적 그 이상의 결실을 얻었다. 대기석에서 이야기하다 친해진 프랑스 큐버, 과학동아에 기고할 거라며 말을 걸자 “구글에 과학동아를 꼭 검색해 보겠다”고 약속한 인도 큐버.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이 기고문이 실린 과학동아 10월호가 나오면 인도 친구에게도 한 부 보내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