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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이슈] 과학은 가끔 혼돈의 카오스 위를 굴러야 한다, 트라젝토이드

▲기초과학연구원(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에서 개발한 트라젝토이드의 모습. 트라젝토이드는 주어진 곡선 위를 따라 구르도록 설계된 물체다.
 

노랑, 파랑, 보라알록달록한 물체들이 삐뚤빼뚤한 경로를 따라 굴러갑니다. 어린이 장난감처럼 보이는 이 물체의 이름은 ‘트라젝토이드(Trajectoid)’. 한 손에 펜을 들고 아무렇게나 선을 그려도, 그 선 위를 따라 구르는 트라젝토이드를 만들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8월 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됐습니다. 네이처는 빗면을 따라 구르는 트라젝토이드의 모습을 잡지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실었죠. 논문을 읽어보니 ‘누가 한 연구인지 얼굴을
꼭 보고 싶다’란 생각이 절로 드는 유쾌한 연구였습니다.

 

“평면 위에 무작위 곡선 T를 그리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이렇게 곡선 T를 여러 번 반복해 그리면 주기적 궤도(trajectory)가 무한정 이어진다. 그리고 평면을 살짝 기울여 보자. 여기서 질문. 방금 그린 곡선 T의 무한궤도 위를 미끄러지지도, 제자리에서 돌지도 않고 쭉 따라 굴러가는 물체 ‘트라젝토이드(Trajectoid)’를 만들 수 있을까.” 국제학술지 ‘네이처’ 8월 9일자에 발표된 논문 ‘목표 경로를 따라 구르는 고체 트라젝토이드’의 첫 번째 문단입니다. doi: 10.1038/s41586-023-06306-y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물체가 구르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대부분 바퀴나 축구공 같은 원통형 또는 구형 물체죠. 이런 물체가 구르는 경로는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원통형 물체는 일직선 경로로 구르고, 구형 물체는 뭐, 마음대로 굴러가죠. 조금 더 이상한 경로로 구르는 물체도 있습니다. ‘스피어리콘’이라고 불리는 물체는 원뿔 두 개를 이리저리 잘라 붙인 모양인데요, 지그재그로 구르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렇게 물체가 구르는 현상을 분석할 때 우리는 보통 물체를 먼저 떠올리고, 그 다음 그 물체가 구르는 경로를 알아내는 접근법을 택합니다. 그런데 트라젝토이드의 접근법은 그 반대입니다. 경로를 먼저 떠올리고, 그 경로를 따라 구르는 물체를 찾는 식이죠. 연구를 이끈 쯔비 트루스티 기초과학연구원(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 그룹장은 논문에서 “무작위 곡선을 따라 구르는 트라젝토이드를 만들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다”고 했습니다. 이어 “이런 발견을 실험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컴퓨터 모델링을 통해 만든 트라젝토이드를 3차원(3D) 프린터로 제작한 다음, 실제 트라젝토이드가 구르는 경로를 추적했다”고 했죠.

 

방법은 무척 간단합니다. 무작위 곡선 경로를 스티커를 떼듯 평면에서 뗀 다음 구 위에 두르듯 붙이는 겁니다. 그다음 경로가 지나가는 부분을 사과 깎듯 도려내면 끝. 컴퓨터 모델링을 통해 3D로 구현한 이 도형을 3D 프린터로 인쇄한 뒤 실제로 굴려보면 검증까지 깔끔하게 끝납니다. 연구팀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대상으로 이 과정을 반복해 가며 자신들이 고안한 방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를 탐색했습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그런 경우는 아직 못 찾았다”입니다.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

 

연구자들이 속한 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의 목표는 (IBS 홈페이지에 의하면) “연성물질의 이해 및 응용을 통해 생체공학, 합성고분자, 액정 등 다양한 산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연성물질은 부드러운 물질이란 뜻이죠. 설명만 보면 재료공학자나 생물학자가 가득할 것 같은 연구단입니다. 그런데 논문에는 트라젝토이드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내용이 가득했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의문 1. 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에서 왜 수학 논문을 냈는가?

 

해답을 찾기 위해 9월 5일 3시, 울산의 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으로 향했습니다. 트라젝토이드 논문 저자들을 만나기 전, 황지희 선임행정원의 안내를 받아 연구단을 쭉 돌아봤죠. 실험실 풍경은 기자가 본 어느 실험실보다도 더 ‘혼돈’에 가까웠습니다. 이쪽에서는 연구자가 파이펫을 들고 화학물질을 옮기고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는 전선, 니퍼, 몽키 스패너 등 기계공학 실험실에서 볼 만한 장비가 어지러이 늘어서 있었거든요. 이곳이 대체 무슨 연구를 하는 실험실인지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 어려웠습니다.

 

트루스티 그룹장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혼돈은 더욱 커졌습니다. 한쪽 벽에는 1950년대 제작된 세포의 세밀화 포스터가 걸려 있었습니다. 반대쪽 벽에 붙은 화이트보드에는 영문 모를 도형과 함께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The essence of mathematics lies in its freedom)”는 독일의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의 말이 적혀 있고요. 트루스티 그룹장은 그 혼돈 한가운데에서 기자를 맞이하며 자신을 이론물리학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초록색 종이로 접은 공룡 한 마리가 그의 앞에 놓인 테이블에 서서 기자를 바라보고 있었죠.

 

자리에 앉자마자 “이곳 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은 언뜻 화학이나 재료공학을 연구하는 곳처럼 보이는데, 수학 분야의 연구가 나와 놀랐다”고 말을 건넸습니다. 트루스티 그룹장은 멋쩍게 웃으며 “사실이긴 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번 연구 논문은 수학적인 내용을 다뤘죠. 연성물질이라는 분야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연구단의 근본적인 연구 주제는 바로 ‘물체에 대한 기초적인 궁금증’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학제 간 연구를 지향합니다. 모든 물체는 구르잖아요? 구르는 물체에 대한 연구는 아주 근본적이기 때문에 물리, 재료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죠. 잠재력이 무척 강한 연구 주제입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답이었습니다. 특히나 “수학의 본질은 그 자유로움에 있다”는 칸토어의 말을 떠올리면 더욱 이해되죠. 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은 물체에 대한 궁금증을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풀어내는 곳입니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도구가 그들에겐 바로 수학이었습니다. 논문에 수학을 활용한 설명이 가득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완전 쓸모없는 문제라는 게 마음에 들었어요”

 

트루스티 그룹장은 이어 “사실 100퍼센트 장담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냥 즐거워서 연구한 게 맞다”고 했습니다. 아, 어쩐지. 논문을 읽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주제도 흥미롭고, 해결 방법도 재미있는데, 이 연구를 한 동기가 뭔지 찾을 수 없었거든요. 의문 2. 이 연구, 대체 왜 한 건가?

 

그간 접했던 논문에는 대부분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암을 치료하기 위해’ 등 그 연구가 필요한 이유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트라젝토이드 논문에는 “우리 연구는 근본적인 호기심에 크게 동기 부여됐다”는 설명이 전부였습니다. 설마하니 이게 정말 연구동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기자가 잠시 당황한 사이, 사무실 문을 열고 이번 연구의 제1저자인 야로슬라브 소보레브 연구원이 들어왔습니다. 연구를 진행하고 논문을 쓴 장본인이죠. 그는 실험 물리학자입니다. 소보레브 연구원에게 “연구를 시작한 동기가 뭐냐”고 다시 물어봤습니다. 그는 트루스티 그룹장과 똑같이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전 단장이었던 스티브 그래닉이 한 세미나 자리에서 이 문제를 처음 제시했습니다. 그는 주어진 무작위 경로를 따라 굴러가는 물체를 만드는 문제는 절대 풀 수 없다고 확언했죠. 짜증이 났습니다. 문제를 풀어 보기도 전에 어떻게 확신하겠어요! 그래서 연구를 시작한 겁니다. 사실 처음엔 장난이었어요. 3일 만에 첫 실험을 성공한 뒤 결과를 정리해서 그래닉 전 단장에게 e메일로 보내줬죠. ‘하하! 이겼다!’면서요.”

 

그리고 반 년 뒤, 트루스티 그룹장이 이 장난 같은 연구를 발견하게 된 겁니다. 소보레브 연구원은 “트루스티 그룹장은 평소에 굉장히 진지한 사람이라, 이 사람이 트라젝토이드 연구를 보고 이렇게까지 신나 할 줄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 트라젝토이드 연구는 중독적인 게임처럼 다가왔습니다. 트루스티 그룹장은 “처음 이 연구에 대해 듣고 나서 여기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면서 “장난감 가게에서 산 퍼즐에 중독되듯이, 굴러가는 물체와 그 경로가 머릿속에 계속 그려지니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습니다. 소보레브 연구원은 “나는 어제도 누워있다가 트라젝토이드를 생각했다”면서 “간단하고 쓸모없다는 부분이 중독 포인트”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 공감하기 어렵다고요? 머릿속에 경로 하나를 그려보세요. 아무렇게나요. 그리고 상상해 봅시다. 그 경로를 따라 무한히 굴러가는 물체를데굴데굴데굴.

 

“주류가 해결 못할 문제를 풀 아웃사이더 연구”

 

한창 트라젝토이드의 중독성에 대해 말하던 두 사람이 문득 기자의 존재를 기억한 듯 말을 멈췄습니다. “그나저나 이 이야기를 기사로 쓰면 연구단 문 닫는 거 아니에요? 돈 낭비한다고?” 소보레브 연구원이 진담 반 섞인 농담을 건넸죠. 글쎄요, 기자가 만나본 과학자들과 이들은 전혀 다른 접근법을 갖고 있긴 합니다. 표준모형 검증,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정복 등. 그간 우리가 ‘중요한 연구’라고 평해온 연구들은 대부분 연구 목표를 먼저 찾고 그다음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런데 트라젝토이드 연구는 다르죠. 쉬운 질문에 대한 어려운 해결책을 먼저 찾고, 그 해결책을 적용할 곳을 찾는 식입니다. 세 번째 궁금증입니다. 의문 3. 트라젝토이드 연구, 어디에 쓸 수 있나?

 

트라젝토이드 연구뿐 아니라, 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의 연구 방향 자체가 그렇습니다. 트루스티 그룹장은 “우리는 아주 쉬운 질문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는 연구를 한다”면서 “심각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때로는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고민할 때가 아닌, 전혀 다른 문제에 대한 해답에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레이저를 이용해 원자나 분자 등 아주 작은 물체를 집어 올리는 ‘광학 족집게’의 예를 들어볼까요. 광학 족집게 연구는 20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재는 양자 컴퓨팅, 바이러스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죠. 하지만 이 연구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 연구를 쓸모없는 연구라고 평했습니다. 좋은 학술지에 싣지도 못했던 비주류 연구였습니다. 또 라디오파를 만드는 장치를 처음으로 만든 독일의 물리학자 하인리히 헤르츠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발견에 대해 “전혀 쓸모없는 장난감 같은 것”이라고 한 적도 있죠.

 

“과학자들이 하는 연구의 80%는 우리 같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명확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연구하죠. 우리는 연구 분야도, 결과도 명확하지 않은 연구를 합니다. 우리가 하는 20%의 연구는 80%의 연구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위한 백업인 셈입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노벨상을 받은 연구가 대부분 그렇지 않나요? 어디에 쓸지 알지 못하고 그저 시작한 연구가 나중에 빛을 발한 경우가 많죠.”

 

소보레브 연구원은 이렇게 말하면서 3D 프린터로 만든 트라젝토이드 하나를 테이블 위에서 굴렸습니다. 그는 “우리가 트라젝토이드를 연구하며 만든 알고리즘도 언젠가 쓸모를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트라젝토이드 연구의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2주기 트라젝토이드 법칙’입니다. 앞서 무작위 곡선 경로를 마치 스티커를 떼듯 평면에서 떼낸 다음 그걸 구 위에 두르듯 붙이는 방식으로 트라젝토이드를 만든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방법으로 무작위 곡선 경로를 한번 딱 구르는 트라젝토이드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무작위 곡선 경로를 무한정 이어 붙인 무한궤도 위를 구르는 트라젝토이드는 조금 어렵습니다. 트라젝토이드가 한번 구르고 난 다음에 다시 처음 평면에 놓였던 모습 그대로 돌아와야 하거든요. 그래야 다시 무작위 곡선 경로를 그리며 구르죠. 그런데 무작위 곡선 경로에 따라 한번 구르고 난 다음, 다시 처음 평면에 놓였던 모습 그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던 겁니다.

 

연구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주기 트라젝토이드 법칙을 개발했습니다. 트라젝토이드가 한바퀴 돌면 무작위 곡선 경로를 두 번 지나게 되는 방식이죠. 이게 뭐가 특별하냐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보레브 연구원은 “트라젝토이드를 한바퀴 굴려 처음 위치로 돌아오게 하는 방식은 지면에 닿는 지점도 처음 위치와 동일해야 하고, 지면에 닿을 때 트라젝토이드 중심축의 각도도 처음 위치와 동일하게 맞춰야 하기 때문에 어려웠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반 바퀴를 굴린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쉬워집니다. 트라젝토이드의 중심축의 각도를 고려할 필요가 없어지고, 그냥 지면에 닿는 지점만 생각하면 됩니다. 3차원 공간을 고려해야 했던 문제가 순식간에 2차원 평면으로 차원이 낮아지는 겁니다. 트루스티 그룹장은 “이 접근법은 트라젝토이드 연구를 통해 발견됐지만, 나아가 양자 컴퓨터에서 큐비트의 움직임, 편광현상 등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빛의 진동 방향을 바꿔주는 광학소자를 ‘파장판’이라고 부릅니다. 빛이 파장판을 따라 지나갈 때면 파장판의 편광 벡터가 회전하게 됩니다. 트라젝토이드가 무작위 경로를 따라 구르듯이요. 파장판의 편광 벡터가 회전함에 따라 빛의 진동방향이 결정되는데, 이 현상을 수학적으로 ‘푸앵카레 구’라는 구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빛은 이 위를 지나가는 무작위 경로로 표현되고요. 트루스티 그룹장은 “2주기 트라젝토이드 법칙을 이용해 빛이 푸앵카레 구 위를 지나가는 무작위 경로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외에도 활용방향은 무궁무진합니다. 무작위 경로를 구르는 현상이라면 뭐든 트라젝토이드의 원리를 적용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세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에 물을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취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소브레브 연구원이 트라젝토이드 연구를 다룬 유튜브 영상을 보내줬습니다. 트라젝토이드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좋아요 수가 8만 4000개, 댓글만 1000개가 넘습니다. 서울행 KTX에서 댓글을 하나하나 읽어봤습니다. “내 이름을 따라 구르는 트라젝토이드도 만들 수 있을까?”란 댓글부터 “트라젝토이드를 이용한 로봇도 만들 수 있겠다”란 댓글까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제 독자 여러분께 여쭤보려 합니다. 의문 4. 당신은 트라젝토이드로 뭘 하고 싶은가?

2023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울산=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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