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은 천재 과학자들에게만 수여한다는ㅋ아인슈타인 메달이 지난 6월 한국 들어왔다는 소식에, 기자는 대전에 있는 한국천문연구원(천문연) 한국형 전파망원경 간섭계(KVN) 관측실로 한 달음에 달려갔다.
메달이 한국에 오게 된 이유를 취재하기 위해(사실 그보다는 아인슈타인 메달 실물을 직접 보고싶어)서다.
“이거 만져봐도 되죠?” 직경이 8cm가량 돼 보이는 구릿빛 메달은 묵직했다. 메달 앞면에는 아인슈타인의 옆모습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2020년, EHT의 공로를 인정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협회가 수여한다”고 적혀 있었다. 손봉원 천문연 전파천문본부 책임연구원은 “생각보다 무겁지 않느냐”며 “혹시 메달을 (한국에 들여오다가) 잃어버릴까봐 비행기에 들고 탔다”며 웃었다.
손 책임연구원이 소속된 천문연 전파천문본부를 비롯해 전 세계 80여 개 기관, 300명이 넘는 연구자들이 협력한 사건지평선망원경(EHT) 연구협력단은 2019년 최초의 블랙홀 사진과 영상을 공개한 공로로 2020년 아인슈타인 메달을 수상했다. 손 책임연구원은 6월 26일부터 30일까지 대만 타이중에서 열린 EHT 연구협력단 여름 회의에 참석했다가 독일 연구팀이 보관하고 있던 아인슈타인 메달을 한국으로 가져왔다.
아인슈타인이 예견한 블랙홀, 최초의 관측
아인슈타인 협회는 2019년 12월 14일, EHT 프로젝트를 이끄는 셰퍼드 돌먼 미국 하버드-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학센터 선임연구원과, 하이노 팔케 네덜란드 래드버드대 천문물리학과 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 2020년 아인슈타인 메달 수상자로 EHT 연구협력단이 선정됐음을 알린 것이다. 아인슈타인 협회 과학 이사회 소속 필립 제쳐 스위스 취리히대 물리학과 교수의 명의로 발송된 메일엔 “거대 타원 은하 중심에 있는 초거대 블랙홀의 첫 번째 이미지를 얻은 공로로 메달을 수여한다”고 적혀 있었다. 제쳐 교수는 “특히 보통 메달은 한 명의 연구자에게 수여되지만, 업적이 특별한 만큼 예외적으로 연구협력단 전체에 상을 수여한다”고 덧붙였다.
EHT 프로젝트는 2019년 4월 10일, 블랙홀을 관측한 전파 데이터를 최초로 시각화했다. 덕분에 인류가 블랙홀 상상도가 아닌 직접 관측한 블랙홀 사진과 영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구로부터 5500만 광년 떨어진 처녀자리 A은하의 중심부에 있는 태양 질량보다 65억 배 무거운 초대질량 블랙홀, M87*이 그 주인공이었다.
EHT 연구협력단은 미국 애리조나, 하와이, 칠레 아타카마, 스페인 안달루시아, 남극 등 전 세계 6개 지역의 8개 전파망원경을 사용해 거대한 가상 망원경을 만들었다. 여러 대의 전파망원경을 동시에 관측하는 방식의 ‘초장거리 간섭계’다. 이 초장거리 간섭계의 이름이 EHT, 사건지평선망원경이다.
블랙홀은 강한 중력에 의해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는 천체다. 이 때문에 EHT 연구협력단은 2017년 사건의 지평선에 가상 망원경의 초점을 맞췄다. 사건의 지평선은 블랙홀의 최대 반경을 형성하는 구의 표면이다. 사건의 지평선 안쪽에서 발생한 사건의 정보는 지평선을 빠져나오지 못하지만, 물질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때 방출되는 빛이 사건의 지평선 바깥에 존재한다.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 때문에 방출된 빛은 구부러지는데, 이것이 사건의 지평선 바깥으로 밝은 고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고리 안쪽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의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1915년 아인슈타인이 정리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질량을 가진 물체가 존재하면 주변의 시공간이 휘는데, 질량이 클수록 주변 시공간이 더 많이 휘어진다. 모든 걸 집어삼키는 블랙홀의 그림자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궁극적으로 증명한다.
최초는 시작으로, 블랙홀의 꺼풀을 벗기다
EHT 연구협력단은 계속해 블랙홀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공개하고 있다. 2021년 3월, 최초의 블랙홀 관측 영상이 공개된 지 약 2년이 지난 시점에서 협력단은 두 번째 M87* 영상을 공개했다. 두 번째 관측 영상은 M87*의 편광 영상이었다.
새롭게 이뤄낸 진전은 방향성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한 것이었다. “빛은 두 가지 편광 성분의 합으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는데, 최초로 공개했던 M87*은 그 합이 모두 더해진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편광 성분을 분리해 각 편광마다 얻은 이미지를 합성했습니다. 즉 편광을 만드는 블랙홀에 대한 정보가 포함된 사진이죠.” M87* 편광 이미지 처리 분석에 참여한 박종호 천문연 전파천문본부 선임연구원은 설명했다.
EHT 연구협력단은 현재 전 세계 7개 지점 총 9개의 전파망원경으로 블랙홀을 관측한다. 따라서 협력단이 얻는 날것의 데이터는 전파 데이터다. 전파를 이미지로 변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이미지 처리 분석 작업이다. 박 연구원은 EHT 연구협력단이 채택한 3개의 이미지 처리 분석 기법 중 ‘클린 기법’ 팀을 이끌고 있다. 클린 기법은 이미 알려진 전파 데이터의 노이즈 패턴을 활용해 노이즈를 제거하는 기법이다.
M87*의 편광 영상은 블랙홀 주변 자기장 구조 연구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일반적으로 전파는 모든 방향에서 진동하는 빛이 혼합된 상태다. 편광 필터를 사용하면 특정 방향으로 진동하는 전파를 얻을 수 있다. 편광 성분을 가진 빛은 블랙홀 주변에 골고루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원리가 편광을 많이 만들기도하고, 적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까지 과학자들은 블랙홀 주변 자기장이 그 역할을 한다고 추측하고 있다. 즉 편광 정보는 블랙홀 주변 자기장의 구조와 작용, 원리에 대한 단서를 담고 있다.
같은 해 2021년 4월에는 M87*의 다파장 관측 결과도 공개됐다. 기존의 전파뿐만 아니라 가시광선, 적외선, 엑스선, 감마선 등 다양한 파장을 동시에 관측했다. 다파장 관측에서는 M87*이 처녀자리 은하 크기보다 더 큰 제트를 분출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2022년 5월에는 우리은하 중심에 위치한 초대질량 블랙홀 Sgr A*의 관측 영상도 공개됐다. Sgr A*는 2017년 M87*과 같은 때에 관측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분석하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우선 Sgr A*는 질량이 M87* 질량의 1600분의 1 수준으로 작아서 지구에서 포착할 수 있는 빛의 노출시간이 매우 짧다. 또 우리은하 중심부 주변이 뜨거운 플라즈마 상태의 두꺼운 구름층에 둘러싸여 있어 Sgr A* 전파 데이터에 강력한 노이즈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Sgr A*는 M87*보다 이미지 처리 분석 작업이 훨씬 더 까다롭고 복잡했던 것이다.
KVN, 230과 345에 86을 더하다
EHT 연구협력단 내 한국 연구팀의 역할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차세대 사건지평선망원경(ngEHT・next generation EHT)’ 시험관측에도 국내 연구팀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ngEHT는 EHT의 성공을 바탕으로, 기존의 장비를 현대화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ngEHT는 사건의 지평선 바깥을 도는 빛의 입자가 만드는 고리와 블랙홀을 둘러싼 자기장 구조 등 지금의 EHT로는 데이터를 얻어내기 힘든 현상을 파헤치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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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험관측은 지난해 11월 24일 이뤄졌다. 시험관측에는 서울 연세전파망원경, 미국 하와이 서브밀리미터 집합체(SMA),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망원경(JCMT), 덴마크 그린란드전파망원경(GLT), 스페인 피코 벨레타 IRAM 등 총 4개 지역의 5개 망원경이 참여했다. 시험관측에서 연구협력단은 86GHz(기가헤르츠는 10억Hz)와 230GHz 등 2개 주파수를 동시관측 했다. 먼저 해가 지는 지역부터 차례대로 Sgr A*, 페르세우스 A 등 총 9개의 유명한 천체를 관측하는 것이 이날의 목표였다. 서울 연세전파망원경 관측을 위해 손 책임연구원과, 정태현 천문연 전파천문본부 선임연구원이 연세대 운영실에, 변도영 천문연 전파천문본부 책임연구원이 대전 천문연 관측실에 자리했다.
여러 가지 주파수를 동시에 관측하는 것은 ngEHT의 중요한 특징이다. 기존 EHT는 파장 길이가 1.3mm인 230GHz를 수신한다. 반면 ngEHT는 86GHz, 230GHz, 345GHz를 동시에 관측한다. ngEHT가 기존 230GHz보다 훨씬 더 높은 345GHz를 새로 채택한 것은 분해능을 높이기 위해서다. 지구를 벗어나지 않는 한 더 이상 기선을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기선이란 가상의 망원경을 구성하는 개별 전파망원경 안테나를 점으로 삼아, 점과 점을 이은 선으로 간섭계 망원경의 구경 크기를 결정한다. 저주파수 영역에 해당하는 86GHz는 관측의 감도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포함시켰다.
사실 ngEHT가 처음 계획했던 동시 관측 주파수는 230GHz, 345GHz 두 개였다. 두 주파수를 동시에 수신할 수 있는 수신기를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고주파수로 갈수록 대기 중 수증기가 만드는 위상 잡음이 커지기 때문이다. 특히 345GHz는 기존 전파망원경에서 흔히 사용하지 않는 초고주파수 영역으로 이를 보정할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한국형 전파망원경 간섭계(KVN)’에 ngEHT의 이목이 쏠렸다.
서울과 울산, 그리고 제주에 위치한 한국의 전파망원경으로 구성된 KVN은 오래 전부터 다주파수 동시 수신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2002년 KVN을 처음 설계했을 당시에 연구원 내부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이후 천문연은 세계 최초로 다주파수 동시 수신 시스템과 동시 수신기를 개발해 왔다.
“여러 가지 주파수를 동시에 관측하면 낮은 주파수에서 관측한 데이터를 활용해 높은 주파수에서 발생하는 위상 잡음을 보정할 수 있어요. 하지만 230GHz와 345GHz는 둘 다 초고주파수 영역이라 그 두 개만으론 보정 효과를 볼 수 없었죠. 그래서 100GHz보다 낮고 천체 전파 관측에 사용되는 저주파수 영역, 86GHz를 함께 관측하자고 제안했어요.” 8월 8일 대전 천문연에서 만난 이정원 전파천문본부 책임연구원이 설명했다. 손 책임연구원은 “KVN 다중 주파수 관측 기술이 ngEHT에 적용될 경우, EHT가 보지 못했던 어두운 천체 관측이 가능해져, 지금보다 100배 더 많은 천체를 관측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손 책임연구원은 “2017년에 KVN이 ‘동아시아 우주전파관측망(EAVN)’의 일원으로 공식적인 블랙홀 관측에 처음 참여했을 때만 하더라도 EHT 연구자들이 다주파수 동시 수신 체계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국 연구자들과 교류가 많아지고, EAVN의 관측 성과가 EHT 공식 논문으로 발표되며 점차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ngEHT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다주파수 동시 관측 방식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그리고 2022년 8월, ngEHT는 워크숍을 개최해 86GHz의 기능과 영향을 살폈고 KVN 다주파수 동시 관측 방식을 채택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아인슈타인에서 다시 아인슈타인으로
지난해 11월 진행된 ngEHT 시험관측 결과는 올해 6월 말부터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 메달을 특별히 올해 6월 한국에 가져온 이유다. (기사 제목에서 제시한 86, 230, 345 숫자는 ngEHT가 채택한 KVN 다주파수 동시 관측 방식에 대한 힌트였다!)
아인슈타인 메달은 8월 21~22일 대전 천문연에서 열리는 ‘2023 전파 여름학교’와 8월 28~29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는 ‘한국지구과학연합 학술대회’에서 공개 및 전시될 예정이다. 그리고 10월 18~20일 제주도에서 열리는 가을 한국천문학회에서 마지막으로 대중과 만난다. 아인슈타인이 현대 물리 연구에 힌트를 준 것처럼, 아인슈타인 메달이 현대 물리 연구에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