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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를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세종대왕

국립 경주박물관에 반지름 약 33.4cm, 최대 두께 16.8cm의 원반형 화강성 유물 한조각이 있다. 1930년대에 경주 월성 성벽밑에서 발견된 것이라 한다.

이것은 6~7세기 무렵,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원반모양의 해시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부분은 자(子)시에서 묘(卯)시까지 뿐이다.

이 해시계는 다음과 같이 복원해 볼 수 있다. 원을 24등분, 24방향(方向) 이 새겨진 시반(時般) 이 있다. 그 주위에는 8괘를 새겨 8방위를 나타내고, 중심에는 시표(時標)인 막대기를 세웠다. 즉 시반면의 원주를 등분, 중심에서 사선으로 시각선이 그어져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 해시계는 그 시반면을 수평으로 놓지 않고 적도에 평행하게 설치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시반면에 수직으로 세워진 시표, 즉 표(表)는 북극을 향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한(漢)나라에서 원(元)나라에 이르는 사이 실존했던 중국의 전통적인 해시계와 아주 비슷하다. 아마도 그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을 것이다. 사료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일자(日者), 백제의 일관(日官)등의 관직은 시간을 측정하고 규표(圭表)나 해시계를 관장했던 관리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에서도 아마도 기원을 전후한 무렵부터 해시계를 쓰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형식의 해시계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그리고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 세종대의 해시계들
 

휴대용 양부일구, 5.6cm×3.3cm×1.6cm, 1871년 강건 제장, 보물 851호


우리나라는 맑은 날씨가 오래 계속되는, 즉 햇빛을 잘 받아지고 좋은 자연조건 때문에 어느 나라 보다도 해시계가 널리 쓰였다. 그래서 삼국시대부터 많은 해시계들이 만들어졌을 것이지만, 조선시대 이전의 유물은 경주박물관의 신라 해시계 파편 하나 뿐이다. 또 해시계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없다.

해시계의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사서는 '세종실록'이다. 여기에는 새로 만든 여러가지 해시계의 이름이 등장한다. 앙부일구(仰釜日晷)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규표(圭表) 그리고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서, 세종 시절 과학자들의 창조적 기기(機器)로 특색있는 과학적 산물이다.

앙부일구와 일성정시의는 그 후에 제작된 유물이 남아 있는데, 정교한 제작솜씨가 특히 돋보인다. 세종때 해시계들의 높은 과학적 창조성이 잘 나타나고 았는 것. '세종실록'의 기록도 아주 자세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때의 해시계를 정확히 복원해 낼 수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앙부일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로서 5백년 동안이나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 궁궐이나 관공서, 그리고 양반들의 집에서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그 모양의 아름다움과 해시계로서의 정확성, 그리고 시간을 알아보기 쉬운 점들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 해시계는 정원에 설치해 놓고 시간을 측정하는 것과 휴대용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시간을 알고 싶을 때 측정하는 것, 크게 두가지가 있다. 정원에 설치하는 것은 돌 받침대 위에 올려 놓게 만들었다. 청동으로 부어 만든 것과 돌로 깎아 만든 것이 많은 편이고, 자기(磁器)로 만든 것도 꽤 있다.

앙부일구란 이름은 그 모양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반구형(半球形)의 대접과 같은 모양, 다시 말해 가마솥이 위로 열려있는 형상의 해시계란 뜻이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쉽게 풀어서 오목해시계라고 부른다. 이은성 유경로 두 교수가 지은 새 이름이다.

오목해시계는 다른 해시계와는 많은 점에서 특색이 있다. 그 모양도 특이하지만, 형식도 색다른 것이다. 보통 해시계는 시반(時般)에 시각선만 그어져 있다. 그 시각선에 드리우는 시표(時標)의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다. 시반은 평면이고, 그래서 시각선은 시표를 중심으로 한 방사선 모양이 된다.

그런데 오목해시계는 시반이 조금 복잡하다. 시각선뿐만 아니고 계절선이 있는 것이다. 즉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13선의 위선(緯線)으로 나타내어 절기를 알게 했다. 동지 때는 태양의 일중고도가 제일 낮으니까 해그림자는 가장 길어진다. 반대로 하지 때는 태양의 고도가 제일 높으니까 해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원리에 따라 줄을 그어나간 것이다. 그래서 시표의 그림자 끝이 가리키는 선이 그때의 절기가 된다.

이에 수직으로 시각선(자오선)을 그었다. 시반이 오목하니까 시각선들은 평행하게 등분되어 있다. 아침 해가 떠서 저녁 해가 질때까지의 사이, 지금으로 말하면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가 나타나 있다. 묘(卯) 시에서 유(酉)시까지이다. 한 시(時)는 반으로 등분되어 초(初) 정(正)이 되고, 그것은 다시 각각 4등분되어 각(刻)이된다. 즉 하루 12시(時)를 각각 8등분한 것이다. 지금의 15분 간격으로 시각선이 그어진 셈이다.

하루에 중간인 오(午)시를 예로 들어 보자, 시표의 그림자가 사(巳)시에서 오시로 가면서 오초(初) 1각(刻) 2각 3각 4각, 그리고 오정(正) 1각 2각 3각 4각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엔 미(未) 초 1각···. 그러니까 조선시대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지금의 15분 간격의 시간 개념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천문관측에서는 물론 더 정밀하게 측정했다. 분(分) 초(秒)까지의 시간도 잰 것이다.
 

신법지평일구(세종대왕기념관)


●- 서울의 위도를 표준으로

세종은 앙부일구를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한 공중시계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시간마다 글자 대신에 짐승(時神)의 그림을 그려넣어 만들었다. 이런 해시계 2개를 만들어 서울 혜정교와 정묘 남쪽거리에 설치하게 한것이다. 따라서 이 해시계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셈이다.

그러나 오목해시계들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없어져서, 명맥이 끊어지는 듯 했다. 그러다가 17세기 후반, 현종~숙종 때에 조선 천문학의 새로운 발전이 시작되면서 앙부일구도 다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때 만들어진 것은 세종 때의 공중해시계와는 용도가 조금 다르다. 대궐이나 명문 대가집에 설치하기 위해 청동으로 만든 훌륭한 오목해시계였던 것이다.

선과 글자는 은으로 상감하여 새겨 넣고 시표는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을 형상화하여 멋을 더했다. 또 4개의 다리는 용을 조각하여 세운 우아하고 정교한 공예품이었다. 이때부터 오목해시계는 조선의 대표적 해시계가 되었고, 조선식 해시계로의 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오목해시계들을 아름다운 무늬가 조각된 균형잡힌 석대 위에 고정, 시간을 재게 했다. 거리나 집안의 마당에 해시계가 설치되는 일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개성있는 과학문화 창조의 한 면을 찾아 볼수 있다.

해시계들은 서울의 위도를 표준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숙종 때 이전에는 한양 북극고(北極高) 37도 20분, 그 이후에는 37도 39분 15초를 기준했음을 새겨넣고 있다.

앙부일구는 휴대용으로도 만들어졌다. 성냥갑만한 크기로 매우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 오목해시계들은 속에 지남침을 넣어 시간을 측정하게 했다. 또 나침반으로 쓸수 있었다. 길을 가다가도 언제나 시간과 방위를 측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들 중에서도 19세기 후반 강윤(姜潤)과 강건(姜建)이 제작하나 해시계는 정말 멋있기 그지 없다. 상아나 돌로 정교하게 만든 이 해시계들은 공예품으로서의 예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할만 하다.

이런 해시계들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다가 시간을 보는 선비의 모습에서 시간의 흐름을 넘어선 멋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 서양해시계를 받아들이면서

16세기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과의 접촉이 많아 지면서 서양식 해시계의 영향이 조선에도 미치게 되었다. 1636년에 전해진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는 특히 중요한 유물이다. 이는 아담 샬(湯若望)의 시헌력법에 의하여 명나라의 이천경(李天經)이 제작한 것이다. 구조는 양부일구를 전개하여 평면 위에 옮겨놓은 것과 똑같다.

18세기에는 관상감에서 58.9cm×38.2cm 크기의 검은 대리석에 신법지평일구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실제로 사용된 서양식 해시계였다. 또 황동으로 만든 휴대용 지령일구(16.8cm×12.4cm)가 남아있는데, 서양식 해시계가 조선에 장착하였음을 말해준다.

1881년 강윤이 만든 해시계도 서양식 해시계의 조선판이다. 얼른 봐도 서양 해시계가 조선식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두 해시계의 문화가 하나로 융합했을 때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 것인지를 보여주는 모델로서 아주 특색있는 것이다.

시반의 디자인부터가 특이하다. 반원 위에 등분된 낮 시각을 새겨 놓았다. 또 시각마다 초(初) 정(正)이 찍혀 있고, 시표는 3각형이다. 시표의 남쪽 작은 원에 24방위가 새겨있고, 북쪽에는 '북극고 37도 39분 15초'(北極高三十七度三十九十五秒)라고 새겨 놓았다. 한양의 북극고도를 전자체로 음각해 놓은 것이다.

강윤의 해시계를 보면 서양 고대·중세의 전통적 해시계가 조선 해시계의 전통 속에 잘도 여과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 위에 올려 놓았던 조선식 전통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해시계는 휴대용으로도 많이 만들어 졌다. 조선 후기에는 조선의 오목해시계와 서양식 평면해시계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 얼마 후, 조선말, 아라비아 숫자를 쓴 서양 해시계의 모습과 똑 같은 해시계가 등장했다. 덕수궁 석조선 앞에 있는 해시계가 그 하나이다. 이와 비슷한 해시계는 휴대용으로 나타났다. 품위와 품질은 헌져히 떨어졌으나, 대중성을 생각해서 대량생산, 값싸게 보급했다는 긍정적 측면은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장식용 선추에 지남친과 영침(影針)을 장치,나침반(패철)으로도 쓰고 해시계로도 사용했다.(온양 민속박물관)


●- 해시계 현대에 되살린다

이렇게 한국인은 고대로부터 여러가지 해시계를 많이 만들었다. 그 전통은 조선시대말까지 연연히 이어졌다. 이 처럼 오랫동안 많은 해시계를 만들어 시간 측정에 쓴 민족은 별로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 오랜 전통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양에는 아직도 곳곳에 해시계가 그대로 설치되어 옛 멋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 좋은 우리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이 최근에 조용히 일고 있다. 한국과학사에 뜻을 둔 몇몇 학자들과 문화재관리국이 그리고 우리의 전통과학을 아끼는 뜻있는 분들이 개인적으로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해시계를 공원과 학교 빌딩 앞에 설치하자는 운동이다. 또 국립표준연구소에서 세종때의 정남일구를 복원해 훌륭히 만든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1989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전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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