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빅, 이 아이는 커서 168cm가 될 운명입니다.”
이런 미래가 SF 밖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4월 국제학술지 ‘셀 지노믹스’에는 아이가 성장한 후 뼈의 길이와 모양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확인했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거든요. 결국 아무리 우유를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도 우리의 최종 키는 정해져있는 걸까요? 유전자와 환경, 미래 키를 결정하는 두 요소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찍 자기, 우유 많이 마시기, 줄넘기처럼 점프를 많이 하는 운동 하기흔히 알려진 ‘키 크는 비법’입니다. 기자도 어릴 적 이 말을 철썩 믿고 우유를 그렇게 마셨더랬죠. 지금도 전국의 어린이청소년들이 키를 키우기 위해 위 ‘행동강령’들을 실천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이런 노력이 정말로 효과가 있는 걸까요? 누구는 밤새 게임을 하고도 키가 크던데, 키는 수정란 시절부터 이미 결정된 거 아니냐고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키를 결정하는 데에는 환경보다 유전자의 역할이 더 큽니다. 키는 유전자의 영향 80%, 환경의 영향 20%로 결정된다고 알려져 있죠. 앗, 그렇다고 이 기사를 그만 읽으시면 곤란합니다. 80%라는 숫자에는 생각보다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거든요.
부모의 키가 80%는 자녀에게 간다는 뜻이 아니예요
키를 결정하는 데 유전자의 영향이 80%라는 말은 키의 유전율(heritability)이 0.8(백분율로 환산하면 80%)인 사실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이 유전율이 오해하기 딱 쉬운 개념입니다. 유전율이라는 용어와 관련한 오해와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논문이 나왔을 정도죠. 페터르 비셔르 호주 퀸즐랜드대 양적유전학과 교수가 2008년 국제학술지 ‘네이처 리뷰스 제네틱스’에 발표한 논문입니다.(페터르 비셔르라는 이름을 기억해 두세요. 뒤에서 또 나올 겁니다.) doi: 10.1038/nrg2322
유전율이라고 하면 ‘유전이 얼마나 잘 되느냐’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비셔르 교수는 논문에서 유전율을 “어떤 집단에서(유전자의 영향으로) 특정 표현형이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비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천천히 짚어보겠습니다.
표현형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물의 특성을 말합니다. 유전자형(생물에서 발현된 유전적 특성)과 환경, 두 가지 요소로 결정됩니다. 생물의 특성이 표현되는 과정을 집을 짓는 과정에 빗대자면, 유전자형은 설계도입니다. 집의 면적, 방의 구조 등(표현형)을 어떻게 만들지 쓰여 있죠. 그리고 환경은 건축자재의 질, 날씨 등 설계도대로 집을 만들 때 작용하는 주변 조건입니다.
키는 표현형의 일종입니다. 키가 168cm일 것이냐, 혹은 186cm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유전자형과 환경의 영향으로 결정됩니다. 키와 연관된 환경 요인에는 영양상태, 수면시간, 운동량 등이 있습니다.
사람의 키는 천차만별입니다. 집단을 두고 봤을 때 표현형이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이 다양성을 나타내는 비율이 바로 유전율입니다. 0부터 1사이의 값을 갖는데, 유전율이 1에 가까울수록 집단에서 특정 표현형이 다양하게 나타났단 뜻이죠. 키의 경우 유전율이 0.8로 무척 큰 편입니다.
비셔르 교수는 이렇게 집단에서 표현형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해당 표현형과 관련된 유전자형이 다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과동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의 키를 분석한다고 가정해 볼까요. 이들은 같은 국가, 같은 지역, 같은 나이 학생들이니 대부분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도 한 학년에는 키가 170cm가 넘는 친구가 있는 한편, 키가 140cm를 넘지 않는 친구도 있을 겁니다. 비셔르 교수의 말은 이처럼 환경 조건이 비슷비슷했는데도 학생들의 키가 다르게 나타났다면, 그 이유는 해당 집단에서 키라는 표현형을 나타내는 데 유전자형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라는 추론에 입각합니다. 그래서 ‘유전’율 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유전율은 집단의 표현형을 가지고 통계를 내 얻는 값입니다. 따라서 집단에 따라 유전율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세일 땐 유전율이 여아는 0.38, 남아는 0.4로 낮았다가, 아동기에 접어들며 유전율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해서, 청소년기에는 유전율이 여아가 0.76, 남아가 0.83까지 높아진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doi: 10.1038/srep28496
집단에 따른 유전율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유전자형이 동일한 쌍둥이를 여러 쌍 모아 연구합니다. 아주 많이 모아요. 예를 들어 앞서 소개한 연령별 유전율 연구는 스페인, 핀란드, 한국 등 국제공동연구팀이 세계 20개국의 1세~19세 쌍둥이 18만 52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입니다. 2016년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발표됐죠. 앞서 여러분이 본 80%란 수치는 이런 연구 결과 여러 건을 종합해서 낸 대략적 수치입니다. 참고로 체중(체질량지수 기준)의 유전율은 40~60%, 당뇨는 20~30%정도입니다. 그러니까 키가 다른 표현형에 비해 유전자형에 크게 좌우된다는 건 맞는 말이에요.
차이를 결정하는 그 유전자가 알고 싶어서
길게 설명하긴 했지만, 키를 결정할 때 환경보다 유전자형의 영향이 크다는 결론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시 놓고 보면, 유전자형을 잘 읽으면 아이의 미래 키가 얼마나 클지 예측해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박종화 울산과학기술원(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는 “신체특성과 관련된 유전자형을 알게 된다면 유전자를 기반으로 신체특성을 예측할 수 있다”며 “향후에 안전성 검증 및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면 유전자 편집(유전자 서열을 바꿔 유전자형을 바꾸는 것)을 통해 신체특성을 변화시키는 것까지도 가능해진다”고 내다봤습니다. 박 교수는 이어 “유전자 편집은 이미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윤리적 문제로 실현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키를 결정하는 유전자형을 알아내려는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2022년 비셔르 교수팀과(또 나온다고 했죠?) 일본, 미국 등 국제공동연구팀은 다양한 혈통의 사람 540만 명의 유전자를 분석해 키를 결정하는 단일 뉴클레오타이드 다형성(SNP) 지점을 1만 2111곳 찾아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doi: 10.1038/s41586-022-05275-y
우리가 서로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더라도 유전자의 염기서열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박 교수는 “예를 들어 ‘가’ 유전자를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더라도, 누군가는 ATGCGCGC를, 다른 누군가는 ATGCGCGT로 다른 서열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여기서 소개하는 유전자는 단순한 예시이며 실제 유전자가 아닙니다.) 박 교수는 이어 “이처럼 동일 유전자임에도 염기서열이 차이 나는 것을 ‘변이’라고 하는데, 신체특성과 관련된 유전자를 찾았다는 건 보편적으로 이러한 변이를 찾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SNP는 DNA 염기서열에서 염기 하나가 달라지는 유전 변이입니다. 위 예시에서 가 유전자의 염기서열 마지막 부분이 C(사이토신)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T(타이민)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요.
많은 사람들의 유전 정보와 신체특성 데이터를 수집하면 통계분석을 통해 신체특성과 관련된 변이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박 교수는 “예를 들어, 위 예시에서 키가 큰 사람들이 ATGCGCGC의 서열을 가지고 키가 작은 사람들은 ATGCGCGT의 서열을 가진다고 가정했을 때, 가 유전자의 마지막 염기서열이 키와 관련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즉, 어떤 염기서열을 가졌는지를 통해 키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2022년 ‘네이처’에 발표된 키를 결정하는 SNP 지점에 대한 연구는 규모에서나, 연구 결과의 중요성에서나 ‘역대급’ 으로 꼽힙니다. 연구팀은 유전적 변이의 빈도와 위치를 밝히는 연구방법인 전장유전체 연관분석(GWAS)을 통해 키를 결정하는 유전자의 SNP 지점들을 찾아냈습니다. 그 결과 키라는 표현형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40%까지 밝힐 수 있었죠.
앞서 유전율의 개념이 특정 표현형과 관련된 유전적 다양성과 연결된다고 설명했었죠? 이 연구는 이런 맥락에서 키의 유전율인 80% 중에서 40%가 구체적으로 어떤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지 밝혔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비셔르 교수는 미국 브로드연구소와의 인터뷰에서 “2010년 우리는(이 연구를 통해) 개인의 키 차이의 40%를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면서 “그런데 그것이 500만 명의 사람들과 1만 2000개의 DNA 변이가 필요하며, 이렇게 빠르게 달성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물론 키를 결정하는 유전적 요인 중 남은 40%에 대해선 아직도 알아낼 것이 많습니다. 연구도 계속되고 있고요. 올해 4월 14일 국제학술지 ‘셀 지노믹스’에는 쥐의 뼈 말단 연골세포를 연구해 키 성장에 관여하는 유전자 145개를 찾아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뼈의 길이와 모양을 결정하는 이 유전자들은 쥐뿐만 아니라 사람에서도 동일한 역할을 했습니다. doi: 10.1016/j.xgen.2023.100299
유전자가 역할을 다하도록 돕는 20%
지금까지 키를 결정하는 80%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은 조금 헛헛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우리의 운명은(적어도 키와 관련해서는) 수정란 시절부터 결정되는 게 아닌가 하고요.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건 아닙니다. 아직 언급하지 않은 20%도 그 역할을 확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 20%가 충족되지 않으면 유전자가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해상 아주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물론 환경 요소도 키 성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서 “만성 빈혈, 만성 신부전증, 크론병 같은 소화기 질환 등의 만성 질환을 앓고 있을 때 키가 100cm 이하인 저신장을 보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교수는 “또한 비만이나 과체중이 되면 성조숙증이 발생할 위험성이 커지고, 성장판의 진행 속도(닫히는 속도)가 빨라져서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는 유전적인 키만큼 성장을 못 하게 되기 때문에 균형 잡힌 식단, 운동을 통해 비만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환경에 따라 유전자가 ‘예견한’ 키가 다 크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골고루 먹지 않으면 키가 안 큰다는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박 교수는 “한국의 노년층과 청년층의 키가 상당히 차이 나는 것에 비춰볼 때(키에 미치는) 환경적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면서 “불과 1~2세대만에 한국인 집단 내에 유전적으로 폭발적인 변화가 일어났을 확률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평균 키가 대폭 상승한 현상은 환경적 영향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유전적, 환경적 요인 모두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2022년 국가기술표준원에서 발표한 ‘제8차 한국인 인체치수조사’에 따르면 지난 40여 년간 한국인 평균 키가 남성은 6.4cm, 여성은 5.3cm 커졌죠.
비셰르 교수의 의견도 박 교수와 같았습니다. 2021년 그는 팩트체크 사이트 ‘메타팩트’에 올라온 질문 ‘환경적 요인이 키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가’에 답변을 했는데요, 다음과 같았습니다. “답은(분명히) 예입니다: 국가들이 산업화되거나 부를 축적할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키가 증가하는 많은 증거가 있으며, 이 변화는 유전적인 요소가 짧은 시간(예를 들어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기 때문에 환경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한 구체적인 요인으로는 풍부한 식량과 더 나은 의료 서비스가 있습니다.”
유전자가 만능은 아니다
결국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방법이 최선입니다.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잠을 잘 자야 하죠. 그러면 유전자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교수는 “운동을 더 많이 하거나, 비타민 D 등의 영양제를 더 먹는다고 키가 더 큰다는 것은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면서 “실제로 운동을 하거나 영양제를 먹은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을 비교했을 때 키 성장에 차이가 없었다고 보고한 연구가 많다”고 덧붙였습니다.
유전자가 인간의 외모, 성격 등 다양한 모습을 결정한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에 ‘유전자 만능론’ 이야기도 돕니다. 키도, 지능도, 성향도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지 않냐는 거죠. 하지만 취재 결과, 아무리 유전자가 뛰어나도 환경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클 키가 다 크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박 교수에게 유전학자의 입장에서 이런 유전자 만능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그의 입장은 동의도 반대도 아니었습니다. 박 교수의 대답을 그대로 실으며 기사를 마칩니다.
“생명체의 모든 형질(외모, 성격, 질병감수성 등)은 유전자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유전자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자의 발현은 후성유전체에 의해 후천적으로도 조절되며, 후성유전체는 잘 변하지 않는 유전체와는 달리, 환경에 의해 민감하게 변합니다. 따라서,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 모두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 또한 게놈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통제할 수 없으니 결국 결론은 유전자 만능론과 같은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체는 환경의 지배를 받음과 동시에 환경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인간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작용하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유전자 만능론, 노력 만능론 등에 치우치지 않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잘 구분하고 그 안에서 최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