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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 우리 할머니들이 깨어날 때

 

나를 돌봐 주는 사람은 나보다 나이 든 여자다. 그녀는 차갑고 무뚝뚝하며 묵묵히 자기 일을 한다. 남들이 볼 때는 그렇다. 그녀는 재생된 내 육체가 운동능력을 회복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돌봐주는 존재다. 나의 팔다리를 마사지하고, 재활시간에 훈련센터로 나를 데려다준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리 본’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본.”

내가 가까스로 입술을 비틀고 혀를 구부려 처음으로 발음한 것은 그 말이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그녀는 두려워했다.

“내가 당신에게 말을 걸었단 사실을 들키면 저는 폐기돼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당신이 깨어나지 못하고 죽을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녀의 눈에 난처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외로웠다. 그래서 내가 아직 신체재생 중이었던 캡슐 밖에서 혼잣말을 떠들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식물인간처럼 누워있었지만, 모든 것을 듣고, 보고, 느꼈다. 덕분에 알고 있었다. 우리는 ‘깨어난 할머니들’이다. 우리는 나이 든 채로 다시 탄생한 불운한 여자들이다.

본은 낮 동안 내 근육과 운동신경이 재생되도록 돕는다. 나를 먹이고 닦이고 부축하고 웃게 한다. 본이 휴식하거나 자러 가면, 밤에는 AI 교육프로그램이 내 머릿속에 교육내용을 주입한다. 신경망을 통해 들어오는 이미지와 상징신호들을 나는 순순히 받아들인다. 대개가 너무 변해버린 이 세계에 대한 정보들이다.

이전 생에 나는 순응하는 여자였다. 그들은 그래서 나를 다시 살렸다. 그들은 아마 수많은 냉동고 속 시체들 중에서 어떤 여자가 되살리기에 적합할지 프로필을 열심히 조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선택했다. 나는 전업주부로 살면서 시부모님과 친정부모님을 모두 병간호했고 아이 넷을 키워냈다. 남편에게 맞아서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지만 이혼하지 않았고, 그가 치매에 걸리자 6년 동안 집에서 돌보았다. 그 와중에 손주 여섯을 키우기 위해 부지런히 불려 다녔다. 내가 죽자 아이 넷은 내 희생적인 인생에 냉동보존장으로 보답했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할머니’였다.

 

 

본은 전생에 간호조무사였고, 요양원의 보호사로 일하다 죽었다. 그녀의 아들은 그녀를 냉동보존하기를 원했다. 그녀는 혼자 아들을 키웠고, 아들은 엄마의 인생에 대해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꽁꽁 얼어붙었다.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녀는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기계와 AI로 빠르게 대체되었지만, 한계에 직면했다. 대체할 수 없는 분야들이 있었다. 세상은 다시 우리를 필요로 했다. 본의 몸은 세포배양으로 재생되었다. 일부 불완전 재생된 말단부분은 사이보그 신체로 대체되었다. 본은 노인의 영혼을 지닌 건강한 신체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다시 살린 신체에 적응하는 재활훈련이 끝나자 본은 자신의 22대 후손을 만났다. 아이의 엄마는 다섯 살 아이를 거실 카펫 한가운데에 세워놓고 브리핑하듯이 본에게 돌봄 방법을 설명했다.

“당신의 미토콘드리아 유전계보를 물려받은 아이예요. 당신의 본능이 반응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당신은 이 아이의 안전과 생존욕구에 반응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을 거예요. 지난 5년간 우리가 파악한 아이에 대한 정보는 이 데이터북 안에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세요.”

아이 엄마는 공학자였다. 출근 전에 데이터북에 아이에게 제공해야 할 서비스를 적어 두고 나갔다. 거의 대부분이 아이의 수학적 지능을 발달시키는 훈련들이었다. 본은 그것을 숙지했고, 아이와 보내는 하루 동안 최대한 모두 이행하려고 애썼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본은 아이를 사랑했다.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들이 기대하던 것처럼 후손에 대한 사랑은 본능이 아닐지도 몰랐다. 본은 처음에 그 사랑을 몰랐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사랑을 깨달았다. 그래서 본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다.

2년 뒤에 그들은 어느 숲에서 발견되었다. 본은 아이를 유괴하여 학대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학대라니. 그랬다. 아이를 자연 속에서 문명의 교육 없이 키운 것은 학대였다. 아이는 DNA를 조작해 기괴할 정도로 뛰어난 수학 학습능력을 가진 채 태어났다. 아이는 2년 동안 그 능력을 나뭇잎의 잎맥 분포도를 만들거나 이끼 번식의 패턴을 분석하는 데 썼다. 경찰이 숲에서 발견했을 때, 까맣게 탄 아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고,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명랑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사회는 경악했다. 그 귀중한 자원을 이렇게 낭비하다니. 2년의 학습이 날아가 버렸어. 그 애는 양자추진체 실현 과정의 딜레마를 풀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시간물질화 가능성 가설인 코리아나-켄트 방정식의 난제를 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본은 폐기, 즉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곳에서는 최상위 시민도 아이에게 해를 끼치면 최고형을 선고받았다. 아이는 귀하고 중요한 자산이었다. 세포배양으로 클론도 만들 수 있는 세상이었으니 아이를 쉽게 만들 기술은 있었지만, 아무도 아이를 키우려 하지 않았다. 아이 양육은 개인에게는 부담이었다.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두 그랬다. 그 양육비용을 자신의 노화방지에 투자하는 편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다. 정부와 사회가 아무리 권장하고 캠페인을 벌여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어쩌다 아이를 키우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들은 아이를 자신의 선천적 콤플렉스를 해결해줄 존재로 생각했다. 그들은 특정한 재능-수학적 지능이나 육체적 근력, 창조적인 미적 감각 같은 것을 보강한 아이를 DNA 디자인으로 만들어 냈고, 그들을 제2의 자신처럼 교육시켰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넘을 수 없었던 벽, 자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아이를 보며 쾌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양육은 성가신 일이었다. 믿을 만한 양육자를 구할 수도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폭력성이 높거나 교양이 부족하기 일쑤였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은 돌봄직종에 종사하려 하지 않았다. AI는 양육자를 보조할 수는 있어도 주 양육자가 될 수는 없었다. 아이에게는 끌어안으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진짜 사람이 필요했다.

그들은 아이를 흔쾌히 자진해서 맡아줄 아이의 ‘할머니’를 원했다. 이 시대에는 늙은 사람이 없었다. 노화방지기술은 대다수 시민을 아주 오랫동안 젊은 채로 살게 했다. ‘할머니’는 점점 줄었고, 이제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없다면, 만들면 되는 것이다.

먼 옛날의 할머니를 깨우는 데 성공한 최초의 부모는 어느 백만장자였다. 그 후로 서너 세대가 지나고, ‘본’이 깨어났다. 나의 본. 나의 스승. 나의 친구.

그녀는 자신의 먼 후손인 아이, 괴물 같은 수학적 재능을 지녔지만 풀잎과 이끼와 나무를 유난히 좋아하는 다섯 살 아이를 훔쳐서, 숲으로 데려가 밝게 웃게 한 죄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조용히 폐기되기를 기다렸다. 폐기란 육신에서 영혼을 지우는 일과 같았다. 많은 재생비용이 들어간 육체는 AI를 장착한 중간관리직 노동자로 재활용되었다. 그러나 누군가 그녀의 폐기시스템에 침입했다. 그녀의 데이터는 지워지지 않고 빼돌려져서 다른 재생신체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데이지가 되었다. 데이지 민. 그녀의 몸은 데이지 민이었지만, 머릿속은 본의 것 그대로였다. 누군가 정부의 전산망을 해킹했고, 본을 살렸다. 본은 그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부르는 이름과 지시에 응했고, 그녀는 데이지 민의 재생 목적에 따라 재활센터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다른 ‘깨어난 할머니’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다.

할머니들이 해마다 더 많이 깨어나고 있었고, 그 이유는 할머니 재생에 드는 비용이 줄어서였다. 젊은 과학자와 간호원들은 이 분야의 현장에서 철수했다. 그들은 데스크 뒤로 물러났다. 현장에는 먼저 깨어난 할머니들이 배치됐다. 그렇게 비용은 계속 절감됐다.

 

 

“후손의 집에 배치되면 진짜 당신이 누군지 궁금해질 거예요. 그때는 이 팔찌를 풀어서 그 속에 기록된 데이터를 읽어요. 방법은 쉬워요. 가정마다 비치된 스캐너가 있어요. 아무도 없을 때 해야 해요. 아무도 없을 때. 알았죠?”

“고맙지만, 전 제가 누군지 잘 알아요. 본, 아니 데이지. 저는 정순영이고 일흔두 살에 죽었죠. 간암으로요. 제겐 네 아이가 있었어요. 저는 그 아이들이 남긴 후손 중 한 집으로 가게 될 거예요.”

본은 미소를 지었다.

“꼭 그대로, 당신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당신이길 바랄게요.”

본은 팔찌를 채워준 손을 꼭 쥐었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병동 밖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본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손을 놓았다. 본, 나의 스승, 나의 구원자.

나를 데리러 온 사람들은 하늘색 의료복을 입고 있었다. 그중에 유일하게 흰옷을 입은 사람은 남자였고, 의사였다. 그는 차트를 뒤적이더니 사무적인 말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정순영 씨. 축하드립니다. 이제 가정으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그는 사인을 마친 차트를 하늘색 의료복을 입은 간호사에게 넘겨주었다. 의사는 피곤한 얼굴을 문지르며 사라졌고, 간호사는 나를 가족 접견실로 안내했다.

접견실에는 나를 되살려 낸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언뜻 소탈해 보였지만 고급정장 차림이었다. 나를 교육시킨 AI가 알려준 브랜드들이었다. 저런 옷은 조심해서 다루어야 했다. 굉장히 비싸기 때문이다. 나를 되살려낸 사람이 경제적으로 하층민일 가능성은 없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저렴해졌다고는 하나 냉동보존 신체의 재생은 아직도 웬만한 집 한 채 값이었다.

 

 

나를 되살려낸 여자의 화장기도 웃음기도 없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본이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던 집의 후손처럼 그도 냉정한 전문직 여성일 것 같았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처음 뵙는군요. 먼저 축하드립니다. 재생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특히 당신의 경우는 운이 좋다고 들었어요.”

“그런가요? 제가 특별히 운이 좋다면 기뻐해야겠네요.”

무례해 보이지 않도록 가볍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만족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예상한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 기쁩니다. 저는 성격이 급한 편입니다만, 집으로 가셔서 돌봐야 할 나의, 아니 우리의 가족을 만나기 전에 당신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혹시라도 당신이 제가 원하던 ‘할머니’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글쎄요. 원하는 할머니는 어떤 모습인가요?”

“당신의 개인사 프로필을 봤어요. 냉동보존되는 사람들의 인생사를 짧게 요약한 파일이죠. 그게 없는 시신들은 거의 폐기되었다고 보셔야 할 거예요. 오래된 순서로요. 언제까지나 시신을 보관할 수는 없었거든요. 당신은 꽤 오래전, 냉동보존 기술의 거의 초창기에 안치된 사람인데도 그게 있었죠. 당신의 삶을 증명해 줄 자료들이요. 아마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을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에요. 육신만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낸 시간들도 잘 갈무리해서 안치했더군요. 당신은 진짜 희생이 뭔지 아는 분이에요. 그게 저의 마음을 끌었어요.”

“우리 애들은…” 

목이 메는 바람에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목을 고르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애들은 착했어요. 모두 착했죠.”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들이 나를 괴롭혔다. 

‘엄마, 절대 이혼해주지 마. 아빠는 엄마와 이혼하고 그 어린애랑 결혼하려는 거야. 재산을 다 뺏길 거야. … 엄마, 우리 애들 좀 봐 줘. 아빠? 아빠는 치매 요양원에 보내라니까. 애들이 아플 때마다 내가 직장에서 얼마나 눈치 보이는지 알아? 엄마는 딸이 엄마처럼 살면 좋아? … 아빠 병원비? 돈은 더 잘 사는 큰언니가 내라고 해야지, 왜 나한테 그래? … 엄마, 너무해. 형에게 엄마 몫으로 남겨진 아버지 재산의 반을 준 거야? 미쳤어? 형은 그걸 다 말아먹을 거야. 그건 나에게 줬어야지.’

그래, 물론 그들은 내가 아프기 시작하자 울었어. 엄마의 인생을 불쌍히 여겼지. 그때 모든 걸 용서했어. 그들이 줬던 상처들 말이야. 그걸로 보상은 충분했어. 내 아이들의 눈물. 내 마음까지 아프게 하는 눈물.

“우리 애들은 착했어요.”

나는 중얼거렸다. 나의 후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정미류입니다. 돌봐야 할 가족은 집에 가서 소개하도록 하죠.”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고, 돌아서서 문을 향해 걸었다. 나는 차분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내가 돌봐야 할 가족은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식물인간이 된 채 누워있는 남자였다. 정미류의 남편이자, 내 31대손이었다.

“나는 당신이 나의 후손인 줄 알았어요.”

누워있는 남자를 보고 당황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정미류에게 말했다. 정미류는 이런 반응까지 예상했던 듯 빠르게 대꾸했다.

“맞아요. 미토콘드리아는 모계로만 전해지죠. 남편의 어머니는 당신의 30대손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남자는 당신의 마지막 후손인 셈이에요. 제가 알기로 남편의 어머니에게 여자 형제는 없었어요.”

나의 딸들. 내 두 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애들에게는 각각 한 명의 딸들이 있었다. 딸들이 계속 많은 딸들을 낳지 못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딸들이 물려받던 돌봄 의무의 족쇄가 사라진 시대가 올 줄 알았다면, 더 많은 딸들을 낳아도 좋았을 텐데.

“저는 회사에 나가봐야 해요. 남편이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함께 운영하던 회사였죠. 모든 간병 매뉴얼은 데이터북에 있어요. 영상과 음성, 활자로 모두 제공되니 걱정 마세요. 의문이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AI 서포터도 있어요. 벽에 붙은 통합 스위치를 누르고 ‘캐리’를 부르시면 돼요. 그게 이 집의 통합 AI 시스템이에요.”

출근하는 미류를 안심시키기 위해 AI 서포터와 데이터북을 사용해 보였다. 미류는 만족했다. 출근하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일은 이전 생의 반평생 동안 해온 일이었다.

집에 반쯤 죽은 나의 후손과 나만 남았다. 욕창이 생기지 않게 시간마다 몸을 뒤집어주고 말단신경이 죽지 않게 주물러주는 것, 대소변 주머니를 갈아주는 것 등이 내가 할 일이었다. 미류는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긴 시간을 말없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

여유 시간에 집안을 둘러보았다. 정갈하고 단정한 집이었다. 디자인이 극도로 단순한 실용적인 가구로만 채워져 있었다.

어느 날, 늘 잠겨있던 미류의 서재 문이 열린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간 방에는 종이책들이 빼곡했다. 데이터북의 단점은 전기를 공급해 끊임없이 새로 쓰지 않으면 데이터가 서서히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이터북의 전원 공급을 끊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 종이책은 그런 염려가 전혀 필요없는 훌륭한 저장매체였다. 이쪽이 훨씬 익숙하고 편했다.

아무 책이나 골라서 책장을 펼쳤다. 그것은 디지털 자료의 색인 같은 용도의 요약본이었다. 불의의 사고를 대비해서 핵심 사항만 아날로그 형태로 인쇄해 보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책의 맨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design by Me-Rew co. 책 속에는 사람이 있었다. 외모, 성격, 취향, 유년기, 청년기, 가족과 직업, 생애의 주요 고비들. 죽음까지. 한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문득 내 팔에 채워진 가는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서 서가의 책등을 훑어나갔다. ㄱ, ㄴ, ㄷ, ㄹ…. 라, 러, 로, 루, 리…. ‘리’가 인쇄된 책을 뽑아 들고 ‘리 본’을 찾았다. ‘리 본’, 그 안에는 내가 모르는 얼굴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잘 아는 한 여자의 생애와 성격, 말투가 있었다. ‘리 본’ 항목을 모두 읽고 나서 급히 ‘ㄷ’에서 ‘데이지 민’을 찾았다. 잘 아는 얼굴이었다. 세부 항목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돌봄 적합형으로 디자인된 최초의 인간. 그녀의 모든 후손과 클론을 통칭하여 ‘데이지 민’이라고 한다. 그녀들은 개별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 취급된다. 자신의 개별성을 주장하는 개체는 즉시 폐기된다. 단, 디자인된 인간과 믹스매치가 가능하며, 그럴 경우에는 개체성을 인정받는다.’

책을 떨어뜨렸다. 황망해져서 한참을 두려움에 떨며 서있었다. 그리고 ‘ㅈ’ 항목을 찾기 위해 책장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책을 뽑는 손이 떨렸다. 정순영.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나였다. 그러나 그 얼굴은 내가 아니었다. 매일 아침 화장실 거울로 보는 내 얼굴은 정순영의 것이 아니었다. 데이지 민의 얼굴이었다. 나는 디자인된 사람이었다. 디자인되어서 주입된 사람이었다.

본의 얼굴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본은 정말 본일까? 모두가 거짓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어떤 부분을 숨기거나 왜곡했다.

본은 진짜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을 때, 팔찌를 스캔하라고 했다. 그 말을 이제 나는 ‘본이 누구인지 알고 싶을 때’로 재해석했다. 정미류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ㄱ자 모양 스캐너 아래로 팔찌를 풀어서 밀어 넣었다. 인간의 동작을 감지하고 가동을 시작한 스캐너는 벽에 동영상을 재생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깨어난 여자들’의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키운 아이들이죠. 우리는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잘못됐다고 믿어요. 인간에게는 돌봄이 더 가치 있는 일로 존중받아야 해요. 그래서 모두가 돌봄을 하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어요. 다른 누군가를 돌보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사회 말이에요. 물론 식물인간처럼 그럴 능력이 아예 없는 사람만 빼고요. 휠체어를 타고도 누군가를 돌볼 수 있어요.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해도 말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 돌봄을 필요로 해요. 우리는 모두 자주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죠. 우리는 모두 어린 날을 지나야 하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 그 시기를 늦추어도 결국에는, 모두 쇠약해지죠. 그리고 되살아난 사람조차 한동안 돌봄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돌보는 사람과 당신은 지금 당장 그곳을 떠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해요. 당신은 누군가를 돌봐야 하지만, 우리는 당신을 돌봐주죠. 당신을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당장 나와 이곳으로 오세요.”

나와 같은 얼굴들이 수백 명 있었다. 어린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손을 잡은 그들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토닥였다. 마지막 화면은 네비게이션이나 택시 호출기에 팔찌를 대면 주소가 자동으로 입력된다는 안내였다.

한참 그 자리에 앉아있다가 내가 어질러 놓은 것을 말끔히 정리하고 방을 나와 문을 잠갔다. 딸깍.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은 생존에 필요한 기구들을 주렁주렁 찬 채로 여전히 누워있었다. 그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고 그의 발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데리고 나갈 방법도 없었다.

밤이 늦어서야 정미류가 돌아왔다.

“아직 안 잤어요? 당신의 마지막 후손은 오늘 어땠나요?”

별 탈 없이 있었다고 답했다. 언제나 그렇듯,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정순영 특유의 미소를 담아서. 그녀는 만족해 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왜 자신의 남편을 나의 마지막 후손이라고 표현하는지 이제 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조작된 사실이고, 본능을 빙자한 이데올로기이다. 그렇게 ‘깨어난 할머니들’을 지난 시대의 윤리관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어디서 왔다고 믿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먼 과거에서 왔다고 믿어지는 존재다. 스스로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내 육체를 구성한 유전자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남자의 육체를 계속 돌보고 있었다. 팔찌가 알려준 곳이 궁금하기는 했다.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내게는 휴가도 휴일도 없었다. 디자인된 나의 기억 속에서 나는 그런 일상을 당연하게 여겼다. 남편과 아이들은 내게 그런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나 스스로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집을 나서서 잠시 어딘가를 다녀올 여유조차 없었고, 갑자기 그걸 요구한다면 정미류는 의심할 것이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말이다.

이따금 탈출할 곳이 없다는 기분이 들면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 역시 탈출할 곳이 없는 곳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정미류가 출근하고 나서 환자 이송용 구급차를 검색했다. 생존보조장치가 달린 구급차여야 했다. 그런 게 있긴 했지만 상당히 비쌌고, 예약제로만 운행했다. 예약을 할 권한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그림자 노동력’이었다. 시민권도 복지코드도 없는 존재였다. 이미 죽은 존재였고, 혹은 죽었던 것으로 간주되는 존재였다.

그날 아침에 남자의 육체를 닦아주고 여느 때처럼 손마사지를 해주다가 머릿속에 반짝하고 작은 의문이 스쳤다. 멀티태블릿을 가져와 남자의 손가락을 찍어보았다. 통합 AI인 캐리는 부르지 않았다. 캐리를 부르면 정미류에게 바로 연락이 갈 것이다.

태블릿에 신원이 떴다. 기준하. 그는 아직 권한에 어떤 제한도 걸려있지 않은 건강한 시민이었다. 그의 신용으로 택시형 구급차를 예약했다. 날짜는 정미류의 귀가가 유독 늦곤 하던 월말 정기이사회 날로 정했다.

 

 

그날이 왔다. 구급차 기사는 응급구조사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생존보조장치를 찬 사람을 어떻게 옮겨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에게 기준하를 맡겼다. 기준하는 분갈이가 되는 관목처럼 얌전히 이동식 침대로 옮겨졌다. 행선지를 입력하기 위해 구급차의 네비게이션에 팔찌를 가까이 대자 시스템 에러 경고가 떴다. 그러나 세 번째 시도에서 정상적으로 도착지가 입력되었고, 차가 출발했다. 급한 이송이 아니라는 말에 운전사는 사이렌을 껐고, 우리는 아주 먼 길을 달렸다. 해가 지고 나서야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회관 건물의 녹슨 깃대에 찢어진 범지구연합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구급차를 기다리게 하고 마을회관으로 들어갔다.

낡아서 삐걱대는 미닫이문을 겨우 열고, 곰팡내가 나는 방 안으로 들어서 불을 켰다. 방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앉은 뜨개질 용품이 담긴 작은 대바구니가 있었고,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건물 안을 모두 살폈지만, 오래전에 폐가가 된 곳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편안하고 아늑했다. 전생에 내가 머물던 공간처럼 느껴졌다.

운전사가 재촉했다. 만약에 환자를 싣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시간이 별로 없었다. 식도로 공급하는 유동식이나 링거액, 산소 같은 것이 빠듯했다. 마을회관에서 돌아 나왔다. 그리고 기준하 옆의 보호석에 올라타면서 잠시나마 헛된 꿈을 꾸며 설렜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창밖으로 멀리서 뛰어오는 ‘본’이 보였다. 낡은 옷을 입고 머리를 아무렇게나 질끈 묶었지만, 본이 틀림없었다. 본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달려와 내 손을 잡았다.

“축하해요. 이제 당신이 누군지 알게 됐군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직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구급차에 실린 환자를 가리켰다.

“도와줄 수 있나요? 그는 아직 살아있어요.”

본은 흔쾌히 승낙하고 가슴에 찬 작은 무전기를 눌러 사람을 불렀다. 폐쇄주파수로 되어 추적과 도청이 불가능한 아날로그 무전기였다. 그녀는 생존보조장치를 가져올 사람들을 기다리며 기준하의 상태를 살폈다.

“이 사람의 부인은 이 사람의 법적 권한을 살려뒀어요. 아마 이유가 있을 거예요. 어쩌면 이곳으로 추적해 올지 몰라요.”

내가 본에게 피해를 끼쳤을까 두려워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본이 굳은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당신이 정미류의 집으로 간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괜찮아요. 우리는 이 사람이 필요하고 당신을 환영해요.”

멀리 검은 밴이 우리를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준비됐나요?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 준비가?”

본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은 모든 게 두려웠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아직도 자신이 할머니라고 생각해요?”

본의 그 물음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웃음을 터뜨리며 명랑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속지 않겠어요.”

우리는 기준하를 옮겼다. 밴을 운전하는 사람은 나와 같은 얼굴을 한 여자였다. 너무 비슷해서 거울을 보는 기분이었다. 개조된 밴에 기준하가 실리고, 사설구급차가 떠났다. 사설구급차를 불러서 본과 비밀조직을 곤란하게 한 건 아닌지 걱정했다.

“걱정 마세요. 그는 우리를 잘 알아요.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움직이면 늘 그도 함께 움직였으니까요. 크게 보면 그도 돌보는 사람이에요. 우리를 배신하려 했으면 옛날에 그렇게 했을 거예요.”

밴의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하기 전에 창문을 내리고 깊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그런데, 있죠? 저 여기가 낯설지 않아요. 이상해요.”

본은 다정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내 손을 잡았다.

“순영, 당신이 정미류의 집에서 뭘 보았는지 저도 알아요. 하지만 말이에요. 모두 만들어낸 사실은 아니에요. 당신은 진짜 존재했어요. 아주 오래전에, 아주아주 오래전에. 그렇게 살아간 여자들이 진짜 있었어요.”

본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를 당연한 할머니로 취급하지 않는 미래를 향해 출발했다.  

 

 

§ 서애라

2022년 현진건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엄마의 이름은 반다>;로 등단했다. SF 장르 내부의 환상, 경이감, 인지적 소외, 비판적 세계관을 모두 사랑한다. 두 아들이 강제로 주입하는 과학 지식을 주로 누워서 습득한다. 칼 세이건보다 린 마굴리스 쪽에 끌리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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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서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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